기종이는 아직 집에 있다

시설은 선택이 아니라 어쩌면 필수가 되어버린 사람들

by 최국만


제6편


기종이는 아직 집에 있다.


그 말은

사실 한숨처럼 들릴 때가 있다.

“아직”이라는 말속에

날이 서 있기 때문이다.


“시설로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동네 어르신을 만났을 때 어떤 이들은 그렇게 묻는다.

그 질문은 대개, 기종이를 위하고 또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나에게는 조용히 묵직한 질문이 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기종이를 시설로 보내는 게 과연 최선인가.

시설 대신 집에서 살아갈 길은 없는가.

그리고 집에 있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기종이의 집은

연풍면 유상리 산 밑에

작고 평범한 동네 골목 안에 있다.

그 집에는 기종이와 어머니가 함께 살고 있다.

어머니는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3시에 집에 온다.

어제와 같은 항상 오늘을 만든다.


나는 기종이 집에 도착해서는 항상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본다.

어떤 날은

그 집 풍경 자체가 너무 소중해 보인다.

또 어떤 날은

그 소중함이 무겁게 다가올 때도 있다.


왜일까.

왜 우리는

‘아직 집에 있다’는 말을

안도 대신 불안으로 듣게 되는가.


시설은

대체로 선택지가 아니다.

부모가 사라진 뒤 불가피한 장소처럼 여겨진다.

욕설처럼 격리와 통제가 뒤섞여

사회적 안전망이라기보다

숨겨진 방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시설에도 장점이 있다.

전문가가 있고, 프로그램이 있고,

24시간 돌봄이라는 이름의 안정감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살아 있음’과 ‘살아가는 것’을 같게 보지 못할 때 생겨나는 환상이다.


만약 기종이가 집에 혼자 있다면…

집에는 불편함이 많다.

예상치 못한 침묵,

계획된 일정의 붕괴,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매 순간 어려운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 불편함은 우리에게

기종이라는 ‘온전한 인간’을 마주하게 한다.


시설에는

대개 시스템이 있다.

그러나 집에는

삶이 있다.


삶은

질서 정연하거나 예측 가능하지 않다.

사소한 소음,

변덕스러운 날씨,

말이 없는 눈빛 사이에도

살아 있음이 있다.


선진국의 장애인복지 정책을 보면

‘탈시설’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탈시설은

시설을 무너뜨리자는 것이 아니다.


탈시설은

사람이 장소에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며,

장소가 사람을 정해주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시설은

어떤 면에서 사람을 분리된 ‘객체’로 본다.

그러나 집은

사람을 관계 안에 두는 ‘주체’로 본다.


기종이는 아직 말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단지 보호되어야 할 ‘객체’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기종이는 매일

어머니의 손길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 속에서

그리고 우리 눈빛 속에서

존재의 무게를 드러낸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집에 있다는 사실이

괜찮다는 의미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같은 생각이

우리 모두에게 전염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사람의 삶이,

제도나 시설보다 우선일 수 있다는 믿음이

조금 더 당연한 풍경이 되는 날이 오면.


언젠가

기종이가 살던 골목길에서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여기,

사람이 사람답게 살던 집이 있었지.”


그것이

‘아직 집에 있다’는 말의

가장 온전한 의미가 될 것이다.


나는 장애인활동지원사로서 기종이의 미래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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