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자였지만, 그날 나는 사람으로 무너졌다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었다.
렌즈는 침착했고, 나는 차분한 척해야 했다.
하지만 화면 바깥, 나는 울고 있었다.
진실을 기록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날은 그 진실이 너무 아팠다.
나는 타고난 기질이 반골이었다.
어려서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려 했다. 그 판단의 기준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이것이 올바른가’라는 마음속 물음이었다. 부모님 말씀에 따르면, 나는 남에게 나누기를 좋아했고,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았으며,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였다.
중학교 3학년 봄소풍 전날, 선생님이 반장인 나를 불러 각 분단별로 선생님 점심을 준비하라 했다. 그날, 나는 “왜 자기 것을 스스로 준비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준비하지 않았다. 다음 날, 그 일로 심한 체벌을 당했다. 그 시절, 교실은 선생님의 왕국이었고, 학생은 침묵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미 배웠다.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이 내 삶의 지론이 되었다.
방송국에 입사해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맡게 된 것도 이 기질 때문이라 생각한다. 남들은 1년도 버티기 힘든 그 프로그램을 나는 30년 가까이 했다. 사회복지시설의 부패, 장애인단체의 비리, 임금착취, 공무원의 부정부패, 지역 토착비리, 건설업자의 뇌물수수… 수많은 현장을 카메라 뒤에서 지켜봤다.
그중에서도 00의 한 종교재단 기도원에서 벌어진 ‘피의 안수’ 사건은 잊을 수 없다. 불치병 환자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찾은 곳에서, 사이비 목사는 손톱으로 피해자의 살을 뜯어내 그 피를 바르는 기괴한 의식을 했다. 방송이 나간 뒤 지역 사회는 경악했고, 나는 생각했다. 세상은 자비를 입에 담지만, 때로는 잔혹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카메라 뒤에서 내가 가장 오래 울었던 장면은 충북 음성의 ‘꽃동네’에서였다. 한 장애인은 온몸이 마비돼 입만 움직일 수 있었고, 또 다른 장애인은 양팔이 없었다. 그 팔 없는 장애인이 발로 밥을 떠서, 누워 있는 장애인의 입에 조심스레 넣어주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촬영 지시를 멈췄다. 숨소리마저 죄스럽게 느껴졌다.
그 장면 앞에서 나는 불교의 가르침, 연기(緣起)를 떠올렸다.
서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 한 생이 다른 생을 살게 하는 인연.
그들은 비록 몸은 불편했지만, 서로의 존재로 온전히 살아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삶의 불평이 부끄러웠다.
숨만 쉰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산다’고 할 수 있음을 배웠다.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하며 나는 사회의 어두운 면만 본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 인간의 탐욕, 분노, 무지를 마주했고, 동시에 연민과 자비의 빛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 속의 보리심처럼, 고통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깨달음이었다.
한 기자가 내게 물었다.
“남들은 힘들어서 기피하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30년 가까이 하셨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저 카메라 뒤에서 인간의 참모습을 보고 싶었고,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나를 소모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현장에서 ‘고발’보다 먼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웠다.
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내 마음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카메라 뒤에서 울었던 밤들,
그것은 나의 수행이었고, 나의 배움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나를 조금 더 사람답게 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