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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an 17. 2022

남겨진 흔적을 따라 몸과 마음을 이동해보며 3

장애-탈시설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공연 <관람모드-있는 방식>

(계속)



공연이 끝나고 모든 관람객이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이 닫히고 커다란 자물쇠가 다시 잠긴다. 도로변에 정차된 버스까지 걸아가는 길에 그날 공연의 일일 해설자였던 향유의집 전대표님(성함과 직책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과 나란히 걷게 됐다. 나는 대표님께 귀한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혹시 궁금한 점 여쭤봐도 될까요?"


"네, 그럼요."


"시설을 폐지하는 일은 재단과 운영진의 결정이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의 동의도 있어야 하잖아요. 보호자들을 설득하는 일이 어렵지 않으셨어요?"


 대표님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셨다. 나는 그분의 망설임이 옛날을 회상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대표님은 신중하게 말을 시작하셨다.


음, 물론 쉽지 않았죠. 찬성하시는 분도 있고 반대하시는 분도 있고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여기에서 지냈던 이들의 의사지, 그들의 보호자나 가족의 의사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장애인 당사자들은 탈시설과 자립에 대한 결정 주체로 생각하지 않죠. 그래서 주변인의 동의여부를 주로 묻는데 그건 잘못된 접근이라고 봐요.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장애와 탈시설 문제에 대해 나름 공부를 해왔고, 향유의 집을 돌아보며 사회의 뿌리깊은 편견에 대해서도 통렬하게 깨우친 참이었다. 그러나 문제적이라 비판했던 인식의 전제를 내가 질문으로 반복하고 있던 거였다. 대표님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투가 혹시라도 내가 무안하지 않도록 어루고 있었지만 나는 정말이지 부끄러웠다. 나는 황급히 대표님께 부족함과 경솔함을 반성하고 사과드렸는데, 그분은 허허,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두에게 만연한 관점에서 벗어나긴 힘들죠. 별 수 있겠습니까. 계속 배울 수 밖에요."




향유의 집 방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거주인들은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을까 싶었다. 거동이 불편해 누워있거나 낮은 휠체어에 앉은 이들의 시선에 맞지 않는 정형화된 창문.






 권김현영은 <질문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글에서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을 구분한다. 좋은 질문은 대화자간에 대화와 토론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나쁜 질문은 이미 질문에 질문자의 편견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질문 자체가 공격이고 갈등이 될 수 있으며, 더 최악으로는 그 편견을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만든다. 권김현영은 글에서 이런 예시를 든다. 피해자에게 "왜 그때 가만히 있었니?" 같은 질문은 사실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네가 문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이 질문은 정말 이유가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 아니다. 실상 상대방의 대답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대방을 비난하고 위축하는 질문인 셈이다. 가정해본다. 만약 내가 향유의 집에 머물렀던 당사자가 옆에 있는 상황에서도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20년 넘게 시설 안에 갇혀있던 당사자 앞에서 '당신의 생각보다 보호자의 편의가 중요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질문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을까?



 권김현영은 좋은 질문을 "알고 있는 지식의 기반을 스스로 묻고 상대의 대답이 대화의 시작이 되게 하는 질문"이라고 정의한다. 그때 내가 던진 질문은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것은 맞았다. 그러나 질문하는 나는 내가 가진 앎의 기반, 시각의 편향을 검토하는데 불성실했다. 그 안일함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나쁜 질문을 만들었다. 한번 잘못을 했다면 그 다음이 중요하다. 편견을 내려놓고 내가 일반적이라 믿는 상식과 관점을 의심하면서 다시 세계를 봐야한다. '나'만의 앎을 이기적으로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나은 세상을 위한 앎을 구축하기 위한 좋은 질문. 대표님의 너그런 용서와 격려에 나는 다시 여쭈어 보았다. 우리의 시작된 대화가 이어지되 나의 무지가 폭력이 되지 않도록 고민하면서.


"그런데 현실적으로 소통이 어려운 분들도 계시지 않나요? 중증장애가 심하신 분들 같은 경우에는.."  



그렇죠. 그분들에게는 명확한 의사표현을 받기란 굉장히 어려워요. 그런데요, 반복해서 알기 쉽게 설명하다보면 눈빛과 표정이 갑자기 확 변하는 순간이 와요. 그러면 느껴집니다. '나가고 싶어요, 독립하고 싶어요'라고 말하진 못하지만, 기대하고 있구나, 도전해보려 하는구나, 이런게요. 그렇게 듣고 확신하는 겁니다. 우리 식의 '예, 아니요' 문답이 아니라 같이 만들어나가는 거죠. 여기선 그들의 표현을 잘 읽어내는게 중요합니다.



 대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읽는 것. 어쩌면 장애의 문제, 그리고 툭하면 걸고 넘어지는 '당사자'의 문제에 대해 기본이 되어야 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사회의 모든 것은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짜여져 있다. 살기좋은 도시의 경관, 정부의 복지서비스, 장애인거주시설이라는 장소와 그 안의 질서까지. 장애는 사회의 모든 공간에서 소외당하며 '시설'의 몇 뼘 되지 않은 바닥에 삶 전체를 묶어두도록 강요받았다. 물리적인 소외 뿐만이 아니다. 일반적인 대화가 쉽지 않다는 이유로 소통의 참여자로서도 제외되어 왔다. 하지만 '대화'라는 것이 늘 명확한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눈빛, 표정, 몸짓은 느낌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한 비언어적인 요소들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그 사람에 대한 이해가 동반될 때 '다른' 대화의 길은 열릴 수 있다. 그 길이 뻗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할 사람은 그동안 편협한 대화의 양식을 고수해왔던 우리라는 걸. 나부터라는 걸. 대표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라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이제 다르게 대화할 책임이 있다고.   




*권김현영, 손희정, 한채윤, 나영정, 김홍미리, 전희경, <<페미니스트 모먼트>>, 그린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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