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가장 먼저 꽃이 피었다.
눈 속에서 피어오른 앙증맞은 꽃, 복수초!
꽃 이름이 퍽 생소했다.
복수초라......... 복을 누리며 오래 사는 것을 상징하는 꽃?
아니면 누군가를 향해 복수를 꿈꾸는, 몹시 뾰족한 식물?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식물인데 그럴 리가.......’
‘아니면 배에 물이 들어 있는 꽃인가?’
실없이 던져보는 농담처럼 떠오르는 생각들을 끄집어냈지만 내 머리는 계속 갸웃갸웃거렸다.
인터넷을 뒤적여보니 그곳에도 복수초(福壽草)가 피어있었다.
키는 20-30센티 미터 정도이고, 잎은 잘게 갈라진다.
2~3월에 꽃이 피며 얼음을 뚫고 나와 봄을 부른다.
꽃이 황금색 잔처럼 생겼다고 측금잔화(側金盞花)라고도 부르고, 설날에 핀다고 원일초(元日草),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고 설연화(雪蓮花), 쌓인 눈을 뚫고 나와 꽃이 피면 그 주위가 동그랗게 녹아 구멍이 난다고 눈 색이 꽃, 얼음새 꽃이라도 부른다.
복수초 많은 이름으로 불리어졌다는 것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복수초는 자신의 열기로 눈을 녹여 세상에 나온다는 것이다.
얼마나 세상에 나오고 싶었으면 몸으로 쌓인 눈을 녹일 생각을 했을까?
그 작은 몸집에서 어떻게 그런 에너지가 나올 수 있는 걸까?
미처 봄이 오기도 전에 추위 속에 있는 꽃을 보면 기쁨보다는 애처로운 마음이 더 크지 않았을까?
온갖 애틋함과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일어선다.
가장 먼저 봄을 전해주려고 안달하는 꽃, 복수초!
나는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간밤에 눈이 내렸다.
눈은 밀가루를 흩뿌려놓듯 하얗게 길을 덮었고 산비탈에 쌓여있던 낙엽마저 덮어버렸다.
멀리 형제봉 정상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순백색의 세상으로 변해있고 가끔씩 눈보라가 이는지 눈이 흩어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내가 사는 곳은 남쪽이어서 내린 눈은 금방 녹아 없어지곤 했는데 눈 쌓인 풍경을 보니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 놀랍고 반가웠다.
모처럼 눈 구경한답시고 집 주위를 걷다 보니 매서운 바람이 얼굴에 쩍쩍 달라붙는다.
단단히 옷을 입었지만 집요하게 몸을 파고드는 찬바람에 정신이 번쩍 든다.
언덕을 다가서자 큰 백합나무 가지 끝에 앉은 까치 두 마리가 소리를 지르고 있다.
눈이 내려 반갑다는 뜻 인지 먹이가 보이지 않아 걱정스러운 뜻인지 통 알 수 없다.
저들도 세상의 모습이 많이 달라진 것에 대해 놀라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바람에 굴러다니던 낙엽들도 눈 속에 가려지고 잔디밭 한구석에 내린 눈 속에 꽃과 잎들이 섞인 모습이 드러난다.
꽃이 피기에는 아직 이른 듯한데 몸을 땅에 바싹 붙인 채 파릇하게 피어있다.
꽃은 철 따라 피는 것인데 그런 자연의 질서에 반기라도 든 것일까?
하긴 요즘따라 날씨의 변덕이 심하니 꽃들도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한 손으로 눈을 조금씩 걷어내니 동그란 이파리들 속에서 와우! 붉은 광대나물 꽃과 노란 꽃망울을 지닌 복수초가 드러나고 연두색 봄까치꽃(큰 개불알꽃)도 보였다.
눈과 낙엽으로 덮인 안에서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꽃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그제야 그들이 철 모르고 핀 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봄이구나! 봄이 시작되고 있었구나!
파릇하게 둘러싸인 잎들 속에서 조용히 내쉬는 봄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겨울이 너무 길다고 느껴질 때마다 헤아려보는 봄은 아득했는데 어느새 턱밑에 와 있었다.
저들은 진즉부터 엉덩이를 들썩이며 바깥세상으로 나올 기회를 노렸고 어느 햇살이 따뜻해진 날이면, 이때다! 하며 힘차게 고개를 내민 꽃들이 분명하다.
반가운 마음에 여린 꽃잎을 비벼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입에 넣어 씹어도 본다.
과연 광대가 입은 옷을 어떻게 닮은 것인지 개불알 모양이 어떤지 집 나갔던 아들을 끌어안듯 요모조모 살펴본다.
광대나물 잎에서는 약간 비릿한 풀내음이 느껴지지만 달콤하고 향긋한 맛이 입속에 퍼진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연의 냄새며 봄의 향기이다.
추위에 아랑곳 않고 얼굴을 내민 저들을 보니 내 가슴에도 훈기가 돈다.
저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천으로 퍼져 밭을 이루지만 정작 세상에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간다.
나를 봐달라며 요란을 떠는 것도 아니고 발길 닿지 않는 변방에서 꽃인 듯 잡초인 듯 피었다가 잊히는 그런 꽃들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작은 꽃들이며 이름 모를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화단에서 주인의 손길과 영양분을 듬뿍 받으면서 자라는 화초에 비해 화려하다거나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남 모르는 곳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이끌린다.
어쩌면 내가 살아온 세월을 닮아있어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광대나물(붉은색) 큰개불알꽃(파란색) 광대나물 그들처럼 구석진 곳에서 이름 없는 풀꽃들이 그들의 영역을 키워갈 때면 봄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들을 시작으로 차츰 메말랐던 나무와 뿌리에 물이 오르고 들판이며 언덕이며 산천에는 새싹들의 열기로 꽉 채워질 것이다.
조금씩 커가는 그들의 기쁨과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즐거움이 합쳐지면 새로운 기대감에 부풀고 내가 살고 있는 산촌은 구석구석 힘을 얻는다.
그들에서 얻어지는 희망과 에너지로 지나간 힘든 시간은 잊히고 세상은 다시 힘차게 꿈틀거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