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회사에는 디자이너만 있는 줄 알았어요

by 베리피아 다이어리

솔직히 말해서,

패션회사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패션회사 = 디자이너들의 놀이터’인 줄 알았다.


굉장히 패셔너블하게 입은 사람들이

‘엣지있게!’라고 외치는 그런 직장 상사와

큰 보드에 각자 한 디자인이 붙어있고 이건 좋고 이건 아니고를 논하며

한 손엔 커피, 다른 한 손엔 펜을 들고
“이번 시즌은 좀 더 파스텔 톤으로 갈까요?” 같은 대사를 하는 그런 곳.


디자인하면 제품이 뚝딱 나오는 줄 알았고,
브랜드마다 자체 공장을 가지고 있어 그들의 제품은 모두

그 브랜드의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줄 알았다.


나이키는 나이키 브랜드의 공장이 있고 아디다스는 아디다스 브랜드의

자신들의 공장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들과 협력하는 공장에 외주로

제품을 생산하였다.(나에게 이것은 꽤나 큰 충격이었다)


어쩌다 나는 패션 대기업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10년 넘게, 몇 가지 브랜드를 넘나들며 MD로 일했다.

운 좋게도 내가 거쳤던 브랜드들은 대부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곳들이다.

패션회사는 생각보다 복잡한 생물 같았다.
디자이너 한 명이 모든 걸 하는 건 아니었고
그 한 벌의 옷 뒤엔 수많은 직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MD가 있고,
디자이너가 있고,
패턴사가 있고,

생산을 조율하는 사람도 있고,
마케팅을 담당하는 사람,

매장에 물건을 내보내는 사람,
매장을 운영하는 사람,
데이터를 보는 사람,
법률, 재무, 인사까지.

이 모든 사람이 협업해서 결국 하나의 시즌을 만들어낸다.

대기업일수록 그 역할은 더 세분화되고,
소기업은 그걸 몇 사람이 멀티 플레이어로 이 모든 일들을 동시에 맡는다.


패션도 카테고리가 참 많다.
여성복, 남성복, 아웃도어, 스포츠, 스트리트, 라이프스타일...
그 안에 또 세부 카테고리가 있고, 그 안에도 브랜드별 철학이 다르다.

darling-arias-0tBvf_HJ34c-unsplash.jpg

무엇보다, 패션은 ‘시간’의 산업이다.
늘 변한다. 무섭게 빠르다.


스키니진이 거리를 장악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걸 입고 골목골목을 누비던 날들.
지금은 헐렁한 와이드핏의 바지가 대세다.


유행은 5~10년 주기로 바뀌고,
그 안에서 수많은 브랜드가 떠오르고 사라진다.


트렌드와 유행이 민감한 한국에서는

정말 많은 브랜드들이 뜨고 진다.


누군가의 사진 한 장 때문에 브랜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도 하고,
사회적 이슈에 브랜드가 매장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재용 회장이 입고 나타난 아웃도어 브랜드의 옷은

대기업 회장도 입고 다니는 옷으로 소문났고

일본과의 정치적 이슈로 일본 브랜드 불매 운동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일본 브랜드들 매장에 파리가 날리는 날도 있었다.


운과 실력과 타이밍과 관계와 윤리, 그 모든 게 섞인다.


패션이라는 세계에 몸을 담고 있던 시간 동안
나는 계속 질문했다.

‘브랜드가 이렇게 방향을 잡고 가야 하는데’

‘상품을 이렇게 만들어야 사람들이 더 좋아할 텐데’

‘이렇게 마케팅해야 판매가 더 잘될 텐데’

브랜드 회사에 다니면서 윗선에서 하는 결정이

답답할 때도 있었고 아쉬운 점도 있었고

내가 윗사람이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하는

불만들도 있었다.


그러다 나에게 기회가 왔다.

내가 브랜드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다음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