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달러를 날린 조급함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 결승3번기 3국 (흑)양카이원 - (백)박정환

by 이연

[춘란배 결승3국] (흑)양카이원(백)박정환

이 판은 1:1 상황에서의 최종전. 우승자는 15만 달러(약 2억 원), 준우승자는 5만 달러(약 7천만 원)를 손에 넣게 된다. 이 한 판에 10만 달러가 걸린 셈이다.

초반부터 백을 잡은 박정환이 앞서나갔으나 양카이원이 끈질기게 판을 흔들어가며 형세는 알 수 없게 변하고 말았다. 거의 승기를 잡았던 박정환은 속이 타들어간다.

0.장면도.PNG <장면도>

<장면도> 흑이 1로 중앙을 씌우면서 백이 약간 곤란한가 싶은 장면이었는데, 이때 박정환의 백2가 절묘한 수.


<참고도1>

<참고도1>

그냥 백1,3으로 끊고 나가는 것이 일감. 하지만 4~13까지 싸바른 다음 14로 우변을 공격해 가면 백이 곤란하다. X의 곳이 모두 선수가 되기 때문에 우변이 아무 탈 없기는 어렵다.

<참고도2>

<참고도2>

백세모 자리 찝는 수를 당했을 때 흑의 일감은 1,3으로 연결하는 수. 백이 4로 끊을 때 5로 단수치면 축이된다. 하지만 그것이 백의 의도. 백도 두 점을 버리고 6으로 빠져나올 수 있기에 오히려 흑이 곤란해진다.

<참고도2-1>

<참고도2-1>

흑은 7로 따낼 수밖에 없다. 백은 8,9 교환을 해둔 다음 10으로 빠져나간다. 흑의 11,13은 절대수. 이때 14,16으로 모양을 흔들어가는 것이 좋은 수로 18까지 우변 흑4점을 잡을 수 있다.

1-1.실전진행1.PNG <실전진행1>

<실전진행1> 방금 전의 <참고도2>에서 보았듯이 흑은 중앙 쪽으로 나갈 수 없고 <실전진행1>의 1,3으로 연결할 수밖에 없다. 백은 2로 시원하게 뚫고나가며 다시 우세를 잡았다. (AI 추산 백 승률 85%, 3~4집반 차)


10만 달러를 좌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순간, 선택권은 박정환의 손에 넘어왔다. AI는 박정환의 우세를 주장하지만, 아직 바둑판에는 결정되지 않은 곳이 너무나도 많다. 본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면 안전하게 A로 지킬 것이다. 만만찮다고 느낀다면 A에 받는 것과 우상귀에 수를 내러 가는 것을 놓고 고민하게 될 것이다. 상대인 양카이원도, 검토실의 한·중 프로기사들도, TV해설자와 시청자들도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죽인 채 초읽기에 몰린 박정환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었다.


2.실전진행2.PNG <실전진행2>

<실전진행2> 박정환의 손이 백1로 향했다. "아..." 바둑TV 박정상 해설자가 탄식을 내뱉는다. 이곳은 절대 먼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자리다. 양카이원은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신중히 수를 읽은 뒤 흑2로 응수한다. 이 당연한 응수에 백은 대책이 없다. 무엇이 박정환의 눈을 가렸을까.


<참고도3>

<참고도3>

백1자리 잇는 수가 너무 중요한 자리였다. 흑은 우변 모양 때문에 2로 지켜야 한다. 백은 3을 선수해두고 5로 끝내기를 한다.

<참고도3-1>

<참고도3-1>

흑이 우변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백2,4를 교환해둔 다음 6,8로 파고들면 10까지 우변이 끊기게 된다.

<참고도4>

<참고도4>

<참고도3>에서 이어진다. 흑은 6.8로 우상귀를 지켜야 한다. 이때 백9가 좋은 수.

<참고도4-1>

<참고도4-1>

<참고도4> 흑8은 절대수. 흑이 지키지 않으면 백1,3으로 두어서 수가 난다.

<참고도5>

<참고도5> 흑이 10~14로 물러날 수밖에 없을 때, 좌변 쪽 15~21까지 선수하고 23~27까지 우변을 차지한다면 백 우세가 확실하다. 이 진행으로 갔다면 우승컵은 박정환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박정환은 아마 이 진행이 끝내기로 최선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수를 연달아 두고, 끝내기까지 다 차지해야 유리한 상황이다보니 실전에 형세를 판단할 때는 '무난하게 가서는 진다'내지는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고 여겼고, '우상귀에서 수를 낸다면 어찌 되든 이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성급한 결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2-1.실전진행3.PNG <실전진행3>

<실전진행3> 박정환은 눈앞이 캄캄해진다. 수가 없다. 큰일났다. 졌다. 졌다. 졌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헝클어뜨린다. 1,3으로 움직여보지만 흑4가 결정타로 우상귀 백은 살아나갈 수 없다.


<참고도6>

<참고도6>

백은 1로 연결하는 수밖에 없다. 이때 흑이 2,4로 잡는다면 백은 5,7을 선수한 다음 9자리에 이어서 다시 역전을 노릴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백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참고도6-1>

<참고도6-1>

백이 1로 둘 때 흑은 2,4로 중앙을 먼저 두는 것이 좋다. 백이 5로 나갈 때 6,8로 둔다면 백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2-2.참고도3.PNG <참고도7>

<참고도7> <참고도6-1>의 백7로는 백1,3으로 두어야 한다. 4로 받을 때 5~12까지 선수끝내기를 하고 13으로 중앙 집을 짓는다. 이렇게 둔다면 AI추산 흑 승률 80%, 1집반 정도 차이. 아직 상대가 실수 몇 번 해준다면 뒤집을 수도 있는 차이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그렇게 냉정할 수 없다. 애초에 중앙을 지켜도 유리할 것 없다고 본 상황에서 4~5집 이상을 날려버렸는데,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어찌 보면 전후사정을 덮어놓고 '이때라도 뭐든 해볼 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망상이고 미련한 후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3.실전진행3.PNG <실전진행4>

<실전진행4> 박정환은 홀린 듯 수렁으로 걸어들어간다. 백1은 성립하지 않는 수. 흑이 2로 끊어가자 우상귀 백이 모두 잡혔다. 아주 잠깐이지만 초점을 잃은 박정환의 눈이 카메라에 잡힌다.


<참고도8>

<참고도8>

백이 1,3,5로 중앙을 공격한다면 흑은 6으로 둔다. 흑2자리에 돌이 왔기 때문에 촉촉수가 성립한다.

<참고도8-1>

<참고도8-1>

백1로 안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2,4로 안 된다. 7때 8로 치중가면 사는 수가 없다.

4.실전진행4.PNG <실전진행5>

<실전진행5> 1,3으로 건드려보다가 5로 두었고, 흑은 6으로 끝내기를 이어갔다. 박정환은 몇 수 더 둬보다가 항복을 선언했다.


한 사람은 생애 최고의 기쁨을, 다른 한 사람은 최악의 고통을 맛본 직후이지만, 그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복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흑)양카이원 - (백)박정환 183수 끝, 흑 불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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