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chelle Kim Sep 17. 2023

우린 여자를 뽑지 않아

2001년도 이야기다.

석사과정을 끝내고 취직을 준비하던 때였다.

아직 IMF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취업은 너무 힘들었다.

전공과 상관없이 신입사원을 뽑는 곳이면 가릴 것 없이 이력서를 넣어야 했다.

그 때 학과 사무실 앞 게시판에 오래도록 붙어 있던 공고.

바로 내가 공부한 전공을 살려 일을 할 수 있는 석유개발팀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한다는 공고였다.

그것도 대기업이었다.

석사 학위자및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바로 온라인으로 입사지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아무런 답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서류 심사에서 떨어졌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다른 회사 면접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같은 면접을 보러 온 우리 학과 동기를 만나게 되었다.

면접 후 우리는 취업에 대해 서로 이것 저것 정보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가 그 석유개발팀에 면접을 보러 갔다 왔다는 것이었다.

비록 자신은 합격하지 못했지만 면접 후 그곳이 정말 맘에 들었다고 했다.

나도 지원했는데 면접 보러오라는 말은 없었다고 하자, 내 동기는 의아해했다.

'너 정도면 석사학위도 있고 영어도 잘하고 나보다 나은데.. 이상하다.'

그랬다.

내가 생각해도 내 동기에 비해 채용공고에서 적힌 모든 조건을 충분히 갖고 있는 나였다. 

석사학위도 있었고, 전액 장학생으로 다닐 만큼 학점도 높았고, 영어 동아리 회장을 하고 외국인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영어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 입사지원서 데이터가 누락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날 다시 온라인으로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여자라는 이유 말고는 면접에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열이 받았다.

그래서 인터넷에 들어가 석유개발팀을 담당하고 있는 팀장 이메일을 알아내 메일을 보냈다.

'저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귀사에 입사지원을 했으나 면접에 오라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5분만 주시면 제가 찾으시던 그 팀원임을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라고.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이런 회사, 망해버려라'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나는 다른 회사들 면접을 열심히 보러 다녔다.

그러던 중, 그 석유개발팀 팀장님에게서 답장이 왔다.

'남미 출장이 있어서 메일을 오랬동안 확인을 못했습니다. 인사팀에 확인해 보니 귀하의 입사지원기록이 없던데, 내일 면접 보러 올 수 있겠습니까?' 라는.

입사지원 기록이 어떻게 없을 수 있을까.

두번이나 지원했고 확인 메세지까지 봤는데.

그런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 다음날 나는 면접을 보러 갔고, 그 팀장님은 나를 아주 맘에 들어 하셨다.

그러나 최고 결정자는 본부장님이었다.

본부장님 면접을 통과해야 했다.


팀장님과 함께 본부장님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냥 공기에서 나를 탐탁지 않게 느낀다는 게 느껴졌다.

오랜 침묵 후, 본부장님이 말씀하셨다.

'우린 여자를 뽑지 않아.'

그리고 다시 또 침묵 후, 말씀하셨다.

'나는 자네가 우리 남자 직원들만큼 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거기서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저를 믿어 주십시오! 남자 못지 않게 잘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했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리라.

사실 난 막 석사과정을 졸업한 것 뿐, 그 기업과 그 석유개발팀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그렇기에 거기서 일하는 남자들 못지 않게 잘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순 없었다.

또 남자들만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서서 볼일을 본다던가, 아니면 남자 사우나에서 클라이언트를 모시고 가라고 한다면,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대답없이 그냥 멍청한 애처럼 웃었다.

그리고 그 방을 나오는 순간, 난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다음날 내가 채용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채용된 순간부터 여자를 뽑지 않는다던 그 본부장님은 나에 대한 엄청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해외 출장도, 교육도, 다른 남자 직원들 보다 2배, 3배 보내주셨다.

영어로 진행해야 하는 회사의 중요한 행사에서도 나를 사회자로 적극 추천해 주셨다.

게다가 회사의 인사규정을 초월해서 나의 특진을 강력하게 밀어주시기도 했다.

이런 많은 지원을 받으며, 행복하게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본부장님이 왜 나를 최종 채용하기로 결정했을까가 내내 궁금했다.

그런데 감히 그것을 여쭤 볼 순 없었다.


외국회사로 옮겨 몇년이 더 지난 후, 본부장님을 다시 찾아뵈었다.

식사를 대접해 드리며 벼르던 그 질문을 여쭤보았다.

'그때 여자를 안 뽑는다고 하셨었는데, 왜 저를 채용하셨나요?'

본부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자네 입사지원 소개서를 읽어보았네. 어릴 때 늦잠을 자도 어머니께서 깨워주지 않아 학교에 지각을 하고 벌을 받아야 했다고,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신이 할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을 배우고 자랐다는 말에 채용을 결정했어.'


그건 정말 그랬다.

사실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가 너무 바빠 아침에 우리를 깨워주실 여유가 없으셨던 이유도 있었다.

우리 자매는 알아서 도시락, 준비물 등을 챙겨가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어머니가 깨워 주실 수 있었음에도 그냥 늦잠을 자게 내버려 두어 학교에 지각을 했고,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아야 했다. 어머니가 야속했지만, 그건 우리 가족의 룰이었다. 

자기 할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기.


그렇게 나는 본부 최초의 대졸 신입 여직원으로 들어갔고, 회사 최초의 여자 주재원으로 해외 지사에 근무하게 되었고, 그 경험이 바탕이 되어 외국 회사로 이직하여 지금까지 여러나라를 돌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즐겁게 일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외국 회사에서 외국인 주재원으로 살아남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