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사이를 유영하는 차가운 리슬링 한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앤드루 포터

by 오후의콘파냐


5년 차 독서모임 정모 이틀 전,

도서관으로 슬라이딩해 구출해 온 낡은 앤드류 포터의 소설집. 노랗게 바랜 책장과 테이프 자국은 마치 20년 동안 마케팅 현장에서 굴러온 내 명함만큼이나 연식이 예사롭지 않다. 서둘러 펼친 책장 위로 차갑게 칠링된 셀바흐 리슬링 '더 글린트'를 곁들인다. 낡은 종이 냄새와 리슬링의 싱그러운 과실 향이 섞이며 책의 서사가 시작된다.



1. 구멍

부모는 낚시터를 가고 아이들만 남은 집에서 집 안 맨홀 아래의 비닐을 집으러 들어간 아이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아이들만 두고 놀러간 부모의 탓일까, 불법 맨홀을 파둔 아버지의 탓일까, 동생들에게 싼값에 잔디 깎는 아르바이트를 시키고 방치한 형의 탓일까, 곁에서 유일하게 지켜본 친구의 탓일까, 나중의 꾸지람이 무섭고 도전에 설레서 무모했던 주인공의 탓일까

"어떤 일들은 일어나고, 그러면 세상은 영원히 바뀌어버린다."

유일한 목격자였던 친구의 기억은 끊임없이 바뀐다. 기억이 왜곡된다는 것은 인간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가기 위한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닐까.


2. 코요테

"그때는 아버지의 정신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버지는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었고, 우리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무너져가는 가정의 질서를 지켜보는 아이의 무력감과 성장의 아픔


3. 아술

"대체로 우리 둘 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식이 없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부모 경험이 전무한 커플이 갑작스럽게 부모의 역할을 잘 해내려다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혼돈의 상황을 맞게 되는 아이러니


4.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나는 그때에도 콜린이 내게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러다보니 나도 나 자신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이 두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정신을 채워주는 빛의 존재, 현실을 채우는 물질의 존재 그 사이를 오가는 여주인공을 통해 다시 정의해보는 결혼의 의미


5. 강가의 개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책임과 방관 그 어느즈음에서의 혼돈의 시간... 침묵은 공유한 비밀보다 무겁다.


6. 외출

"나는 그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은 알고 있다. 그 아이가 무엇을 하려고 했든, 그날 밤 그 아이가 원한 것이 무엇이든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는 것을."

같은 현관에 앉아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7. 머킨 (Merkin)

"우리는 거짓을 진실처럼 느끼게 만드는 위장의 전문가들이었다."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가면이 성공적일수록, 그 가면을 유지하는 비용이 정작 내 본연의 정체성보다 비싸지고 있는 건 아닌지


8. 폭풍 (Storms)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 누나가 미소 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렸지만 또 다른 폭풍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


9. 피부 (Skin)

"창문밖 종려나무들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잔인한 짓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안개 속의 꿈을 믿으면서"

현재면서도 과거에 있고 과거면서도 미래인 사건을 보는 시점. 완벽과 행복을 꿈꾸었던 미래가 잔인한 현실이 되는 과정을, 그 감정적 충격을 우리는 찰나의 순간에 경험한다.


10. 커네티컷 (Connecticut)

나는 지금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침만 해도 해가 환하고 산들바람이 불고 가을인데도 때아니게 따뜻하더니, 늦은 오후, 초대한 손님들-벤틀리 씨 부부와 올리앤더 씨 부부 - 이 우리 집에 도착한 즈음에는 사랑살랑 불던 산들바람이 차가워졌고 하늘은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잿빛으로 변했다.

어머니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게된 어린 아들, 그리고 이어지는, 이어져가는 긴 침묵


기억은 과거의 존재를 연장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과거가 영향을 끼치는 한 방법일 뿐이다.

- 버트런드 러셀, 종교와 과


인생에는 누구나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찰나를 움켜쥔 기억보다 허망하게 놓쳐버린 가지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고통의 우물이 깊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죄책감에 기억을 수없이 왜곡하고 무너지는 부모를 그저 바라만 봐야했던 아이의 무력감, 마지막 퍼즐 한조각을 채우려다 퍼즐판 전체가 엉켜버리는 순간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거창한 위로가 아니다. 오히려 인내하는 침묵이며 타인과 결코 공유할 수 없이 견뎌내는 고독이었다. 상실을 실패가 아닌 삶의 필연적인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 덤덤한 문체는, 책장을 덮은 뒤에도 서늘하고 진한 잔상으로 남는다.






첫 모금: 날카로운 산도와 정교한 균형

냉장고에서 막 꺼낸 리슬링의 청사과 향이 코끝을 스칠 때, 소설 『구멍』의 첫 문장을 읽는다. "어떤 일들은 일어나고, 그러면 세상은 영원히 바뀌어버린다."는 문장처럼, 2023 빈티지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산도가 입안을 일깨우며 일상의 모드를 순식간에 '독서 모드'로 전환시킨다.


안주의 미학: 건새우 전과 리슬링의 '단짠' 케미

애호박, 표고, 알배추를 채 썰어 건새우 한 주먹 넣고 바삭하게 부쳐낸 전. 여기에 만두 간장을 찍어 한 입 크게 오물거린다. 소설 속 인물들의 무력함이나 이기심에 화가 치밀어 오를 때쯤, 리슬링 한 모금을 넘긴다. 리슬링의 미세한 당도가 건새우의 짠맛을 감싸 안는 '단짠'의 조화는, 소설 속 인물들의 비릿한 슬픔을 다정하게 토닥여주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 잔의 여운: 미네랄리티와 묵직한 고독

시간이 지나며 와인의 온도가 올라가면 가벼운 과실 향 뒤에 숨어있던 모젤 점판암(slate)의 짭조름한 미네랄리티가 고개를 든다. 이는 앤드류 포터가 담담하게 그려낸 '인내하는 침묵'과 '견뎌내는 고독'의 맛과 닮았다.

결국 우리 삶도, 사업도, 관계도 거창한 성공보다는 이런 소소하고 정교한 페어링들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2023 빈티지의 싱그러움 덕분에, 낡은 책 속의 서늘한 잔상이 기분 좋은 온도로 갈무리된다.


셀바흐 리슬링 "더 글린트"(Selbach Riesling "The Glint") 2023

품종: 100% 리슬링 (Riesling)

지역: 독일 > 모젤 (Mosel)

스타일: 일반적으로 '파인헤르브(Feinherb)' 스타일로 약간의 기분좋은 당미가 느껴지는 오프-드라이(Off-Dry) 화이트 와인(알코올 도수 약 10.5~11% 내외)

향: 갓 딴 청사과, 잘 익은 복숭아, 살구의 과실 향이 풍부하며, 여기에 레몬 제스트의 상큼함과 젖은 돌에서 느껴지는 미네랄 향

맛: 2023 빈티지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산도와 부드러운 단맛, 깔끔한 피니쉬

가격대: 2~3만원대


(덧붙임: 2010년판 구판에서 발견한 '신간에는 없는 옮긴이의 말'은 뜻밖의 선물이었습니다. 오역된 부분이 수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인 것들을 발견하는 것은 구판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덤이었네요)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