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삶에 건네는 황금빛 위로 키케(Kike)

오베라는 남자 / 프레드릭 배크만

by 오후의콘파냐

오늘을 죽는 날로 정하고 살아가는 남자...

소설은 까칠한 노인과 컴퓨터 매장의 젊은 판매원들의 대화에서 텁텁하게 시작된다. 용어를 전혀 못알아듣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 노인과, 역시 이해못할걸 알면서 자신의 언어만 쏟아내는 젊은이들 간의 거리가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나이듦에서도 언젠가 마주할 풍경인 듯해 마음 한구석이 숙연해진다.


그가 죽는 걸 꾸준히 방해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이웃들은 한 사람을 광기와 자살의 경계까지 몰고 가는데
확실히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었다.
확실했다.
220p


겉으로는 투덜대고 짜증내고 무관심한듯 보여도

결심에 차서 약을 털어 넣으려는 순간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약을 내려놓고 나가보는 사람

내 집은 호텔이 아니라고 투덜대면서도

불쑥 재워달라고 온 청년을 재워주고 허락없이 주방을 사용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

운전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무시하는 듯 하다가도

결국 자기 보물차를 내어주고 운전이 무서워서 주눅들어하자 오히려 대신 창밖으로 화를 내주고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 주는 사람

그를 찾는 다소 성가신 이웃들 덕분에 한시간 후, 내일 이렇게 그의 죽음은 끊임없이 방해를 받고 결심으로부터 4년의 시간이 여느 일상처럼 흘러간다.



"우리는 사느라 바쁠 수도 있고 죽느라 바쁠 수도 있어요. 오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276P



세상이 내 편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 그런데 선물같이 찾아온 사랑. 평생을 흑백의 삶을 살던 사람에게 빛이 되어 준 그녀는 그의 삶을 색깔로 물들이는 존재였다. 그녀를 통해 프리즘처럼 세상의 색깔을 마주하던 그의 시간은 안타깝게도 결코 길지 않았다. 임신한 그녀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음주운전차와 충돌로 아이를 잃게 되고 심각하게 다친 그녀는 암에 걸리면서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가느다란 휠체어의 삶에 놓여진다. 가르치는 즐거움이 유일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휠체어로도 출근할 수 있는 길이었다. 아무 반응 없는 곳을 향해 끊임없이 민원을 넣고 있는 그에게 그녀는 더이상 편지를 쓰지 말라고 한다.

"당신이 쓴 이 편지를 다 집어넣을 공간이 인생에는 없어요."


소설 내내 등장하는 하얀셔츠를 입은 사람들. 무분별한 개발과 자본, 제도,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들의 틀 속에 오베는 늘 그들의 원칙과 권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약자였다. 그럼에도 빛의 존재였던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 앞으로 나아가자는 긍정의 손을 내민다.



"하나님이 우리 아이를 데려갔어요.
사랑하는 오베.
하지만 수천의 다른 아이들을 주셨지요."
356p


가족이라고는 유일하게 자신의 빛이 되어주던 아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자 매일을 그녀의 곁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까칠하게 주변을 쉼없이 밀어내던 그의 마지막은... 반전이였다.

시작부터 내내 고독사가 예상되는 결말이였고 본인도 조용하게 장례를 치뤄달라 유언했건만, 그의 장례식장은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조문을 왔고 그가 남긴 재산은 평생 가장 아끼던 아내의 이름으로 고아들을 위한 자선 기금으로 사용된다.

딱히 그가 계획하고 실천한 일은 아니였다. 자기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들만 이해했던 사람, 자기 일은 스스로 하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한 사람, 남에게 절대 피해를 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고집스러운 원칙주의자에 자신의 신념을 벗어나는 변칙과 의롭지 못한 행동에는 본인이 손해보고 누명을 쓰더라도 신념을 굳히지 않는 사람. 그로인해 빼앗기고 상처 받고 쫒겨나기를 수없이 당해온 지난한 세월이였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철학과 원칙이 결코 어긋남이 없었다는 것, 그것을 통해 그가 떠나고 난 뒤에 남은 사람들에 의해 그녀가 생전에 바랬던 대로 그들의 삶이 같은 방향으로 향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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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벤쿠버 여행 중 너무 예쁜 풍광이 딱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감탄을 하다가 마침 벤치가 있어 앉아서 한참을 바라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벤치 등받이에 그것을 기증한 이들이 남긴 짧은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을 떠날때 무엇을 남길 것인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살아갈 이들에게 힘이 되는 무형의 무언가로 남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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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함 속에 달콤하게 피어오르는 아로마

요즘 세상에서 보기 힘든 것 중 하나는 다정함이 아닐까.

선한 마음에 건네던 호의가 되려 상처가 되고 가슴속 어딘가 늘 켜켜이 쌓여있던 '화'는 누군가 툭 건드리기만해도 쏟아져 나오는 세상이다보니 서로에게 다가서지 않고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거리두기가 안전과 평화를 상징하는 것마냥 건조해진 요즘이다. 이사를 오면 떡을 돌리던 풍습도, 오갈때 눈마주치며 인사하고 안부를 묻던 모습도 이젠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가족도, 직장도 없이 홀로 세상에 남겨진 노인에게는 살아갈 명분도 이유도 없다. 쓸모가 없어진 존재가 되어 하루빨리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노인. 그러나 정작 그는 세상에서 아직 할일이 너무 많은 사람이였다. 그 존재의 이유를 찾아준 것은 이웃이였고 서로 주고받는 도움과 관심 속에서 관계가 확장이 되고 삶이 의미있어진다.

와인을 따르면 첫 향에서 장미꽃, 리치, 망고, 파인애플 등 기분좋은 이국적 열대과일 향이 강렬하게 피어오른다. 식물따위에 돈을 쓰지 않는 오베가 큰맘먹고 꽃을 사간 그 첫 데이트에서, 햇살아래 꽃다발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던 소냐의 미소가 떠오른다. 덥고 습한 한여름의 끈적이는 과일향이 아니었다. 시칠리아의 따듯한 햇살에 그을은 건조한 바람에 스며오는 향이라 오히려 다행스럽게 반갑다.


황금빛 일렁임

오베의 삶은 흑백이였다. 자신이 분해해서 눈으로 확인한 것만 믿고 숫자와 같이 정확한 것에만 집중하는 그의 삶은 단조롭다. 대신 그 원칙 속에서의 오베는 안정을 찾고 만족한다. 세상이 흑백이라고 믿던 사람에게 다양한 색이 보일 때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 다양한 색이 평생 느껴보지 못한 어떤 감정을 가져다줬을까... 와인잔 속의 화이트 와인을 조용히 흔들어본다. 게뷔츠트라미너 특유의 묵직한 황금빛이 일렁인다. 색을 가져다줬던 소냐가 곁에 없자 빛을 잃은 오베는 다시 흑백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녀를 통해 다채로운 색으로 세상을 보았던 오베는 그 전과 같은 흑백의 삶이 아니였다. 색을 기억하고 그 온도를 기억하는 오베의 삶은 겉은 흑백처럼 보일지라도 속은 소냐가 남긴 색채를 머금고 있었다. 그 색채는 세상과 오베를 연결해주고 있었다. 눈치 못챌 만큼 자연스럽게... 오베의 색을 담아 더욱 단단하게...

내일도 이어질 나의 일상 위에, 키케 한 잔의 황금빛을 더해본다. 삶은 그저 이렇게 반짝이는(Glint) 순간들로 채워지는 것이리라.



칸티네 피나(Cantine Fina)의 키케(Kebrilla Kike)

생산지: 이탈리아 > 시칠리아 (Sicilia DOC)

포도 품종: 트라미너(Traminer) 약 90%,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약 10%

알코올 도수: 보통 13.5% 내외

향: 달콤한 파인애플, 리치, 구아바 등의 트로피칼 향

맛: 드라이 와인이나 산도와 시칠리아 특유의 미네랄감이 과하지 않아서 오히려 목넘김이 부드러움

가격대: 2만원 이하 (코스트코 구입)

차갑게 칠링해서 바로 마시는 것 추천! (금방 열리는 편인데다 온도가 올라가면 살짝 쓴맛이 피니쉬에서 올라옴)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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