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은 나를 만나는 여정 w.마코네

너를 아끼며 살아라 / 나태주

by 오후의콘파냐
프롤로그: 동갑내기 친구의 선물과 7년의 기다림

연말에 만난 친구에게서 선물로 책을 받았다. 같이 추억할 학창시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창 어른이 된 후에 만났지만 태어난 해가 같다는 동갑이 주는 공감대는 서로가 보지 않았어도 충분히 볼 수 있는, 부연 설명이 없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접착력 강한 그 무엇이 있다.

바쁜 연말과 새해를 지나며 슬쩍 한두번 들여다보다 점점 책상에서 멀어져간 책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이미 받은지 세 달이 지났다. 다시 책상 구석으로 밀려갈까봐 서둘러 책을 펼쳤다. 셀러 깊숙한 곳에서 7년간 잘 익은 푸이퓌세(Pouilly-Fuissé) 한잔 곁들여서.



사랑의 위치: 마주 보는 곳에서 나란히 앉는 곳으로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

생택쥐베리는 그의 소설 <인간의 대지>에서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96p


복싱도, 테니스도, 축구를 봐도 그렇다. 서로가 마주보면 둘 중 하나를 넘어서야하는 대결구도가 되어 분위기가 팽팽해진다. 나란히 앉으면 수평구도로 상대에 대한 견제 없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한 곳을 바라보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 보는 것만도 즐거웠다. 품에 안은 아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짧았다.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앞자리가 아닌 옆자리로 옮겨 가는 법을 배운다. 상대방이 바라보는 것을 같이 봐야 같이 기뻐하고 같이 아파할 수 있음을 알게되었다. 평생을 함께하는 관계일수록 그 무엇보다도 공감과 위로가 중요하다는 것을, 무조건 내편이 있다는 안도감은 그 어떤 힘보다 강하다는 것을. 꼬물거리는 아기를 안고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와 눈을 맞추던 보석같은 시간을 지나고 사춘기가 오면 더이상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하나의 인격체로 독립하는 영혼을 기꺼이 존중해주고 이제는 아이의 앞자리가 아닌 옆자리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응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사랑은 그렇게 나란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오크통 속 와인처럼 차분히 성숙해가는 과정임을 말이다.



일상의 온기: 지나치는 사랑을 한 알씩 줍는 일
"그 사랑이 지금 우리 곁에 있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있을 예정입니다. 단지 우리가 모르고 지나갈 뿐이랍니다. 117p


때론 삶의 무게가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어둠이 양어깨를 짓눌러 고개조차 들기 힘들고, 방문 너머의 세상이 두려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어기제가 될 때. 슬픈 건, 이런 침잠의 순간에는 자꾸만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게 된다는 것. 마치 보이지 않는 차들에 등 떠밀려 출구 없는 일방통행 터널을 끝없이 달리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럴 때 시인은 우리에게 나지막이 제안한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는가'를 가만히 생각보라고. 여기서 사랑은 거창하거나 요란한 것이 아니다. 지인이 툭 던진 "밥 먹었니?"라는 카톡 한 줄, 길을 가다 물건을 떨어뜨렸을 때 낯선 이가 건네준 작은 친절, 건물의 무거운 유리문을 밀려는 찰나 앞선 사람이 잠시 문을 잡아주던 그 짧은 배려까지.

생각해보면 우리 일상은 이런 미세한 온기들로 촘촘히 짜여 있다. 독서모임 친구가 정성스레 읽은 책을 집 앞에 몰래 두고 간 다정함이나, 어제 사온 사워도우 빵이 정말 맛있다는 가족의 사소한 칭찬 속에도 사랑은 분명히 숨 쉬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큰 사랑만 찾느라 발치에 떨어진 보석 같은 마음들을 무심히 지나쳤던 건 아닐까.

길가에 흩어진 이 작은 사랑들을 '한 알씩' 줍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려 한다. 그렇게 모인 온기가 마음의 틈새를 메우다 보면, 언젠가 스스로 어둠을 걷어내고 문을 열고 나갈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 그 온기를 전해야겠다. 다음 사람을 위해 문을 조금 더 길게 잡아주고, 낯선 이의 호의에 눈을 맞추며 감사 인사를 건네는 일. 단 한 번 마주칠 인연일지라도 내가 내어준 작은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필요했던 '온기의 씨앗'이 될 수도 있으니까.



실천의 무게: 지식으로 아는가, 삶으로 사는가
"지식으로 안다 vs 할 줄 안다"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되려면 단순히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생활 속에서 그 지식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218p


과거에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두꺼운 백과사전을 뒤지거나 어디든 강연장을 찾아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손가락 끝의 클릭 한 번으로 세상의 모든 정보가 쏟아져 들어온다. 이제 '몰라서 못 한다'는 핑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이 알게 되어 생기는 '지식의 과잉'이 발목을 잡곤 한다.

정보를 수집하는 동안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다이어리에 오늘 할 일을 빼곡히 적어 넣고는, 그 치밀한 계획에 스스로 감격해 다이어리를 덮어버리는 마음과 비슷하다. 정작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그 일을 다 해낸 것 같은 묘한 뿌듯함이 우리를 주저앉게 만든다.

과거에 정보를 하나씩 느리게 배울 때는, 서툰 앎을 실행으로 옮기며 겪는 '시행착오의 미학'이 있었다. 몸으로 부딪히며 배운 지식은 근육처럼 삶에 배어들었다. 하지만 방대한 정보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려 고민하고, 체계를 세우고, 정리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다 보면 정작 실행에 옮겨야 할 에너지는 소진되고 없고 출발 신호는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한다.

한두 개를 알 때는 곧장 뛰어들 수 있었던 용기가, 백 개를 알게 되니 '무엇부터 해야 할까'라는 망설임으로 변해버렸다. 엉덩이가 무겁게 느껴지는 요즘, 시인의 이 문장은 내게 날카롭게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사람인가를.



에필로그: 숙성의 미학, 만나고 싶은 나를 향하여
"청소년 시절에 꿈꾸었던 자기를 늙은 나이에 만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성공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도 내가 만나고 싶은 나를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221p


아이유의 <아이와 나의 바다>라는 노래의 가사 중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오는 구절이 있다.

"아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 걸까?"

과거의 어린 나와 지금의 내가 만나는 멀티버스를 상상해 본다. 과연 나는 그 꼬마에게 당당한 어른일 수 있을까? 저자는 성공이란 자기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어 그 일을 평생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청소년 시절에 꿈꾸었던 자기를 늙은 나이에 만나는 것이 성공이라 정의하고 있다. 과연 나는 성공한 삶의 눈금에서 얼마만큼 다다랐을까. 80을 넘은 저자가 여전히 성공한 자신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면 나는 가물지 않는 바다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성공의 눈금에서 조금 멀어지더라도 더디더라도 적어도 돌아오는 길은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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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코네, 한계를 넘어 지켜온 집념의 맛

부르고뉴의 샤르도네는 그 이름만큼이나 매혹적이지만, 한편으론 가혹할 만큼 비싸다. 잔 속에 꽃다발을 한가득 안겨주는 샤샤뉴 몽라셰나 풀리니 몽라셰, 특유의 고소한 참깨 향이 압도적인 뫼르소까지. 우아함의 정점에 선 이 와인들 앞에서는 늘 '가격'이라는 현실적인 장벽과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현실과 조금 타협하며 눈을 돌린 곳이 바로 마코네(Mâconnais)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크 숙성의 풍미가 보석처럼 빛나는 푸이 퓌세(Pouilly-Fuissé)를 발견한 것이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의 나는 화려한 이름값 대신 실질적인 내실과 가능성을 택했던 셈이다.

세월이 흘러, 셀러 깊숙이 아껴두었던 그 와인들을 하나씩 꺼내 마실 때면 묘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름난 명성보다 본질을 꿰뚫어 보려 노력했던 과거의 나에게, 그리고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준 와인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게 되는 시간. 마코네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자신만의 고귀함을 지켜낸 이 와인의 집념은, 가성비 없는 와인의 세계에 로또같은 행복이다.



시간을 견딘 맛, 푸이 퓌세의 숙성

사실 이 와인을 처음 구입해 맛보았을 때만 해도 기억에 남는 건 시트러스와 흰 꽃의 날카로운 강렬함뿐이었다. 그 강렬한 산미 탓에 함께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극명히 나뉘곤 했다. 마치 날이 서 있어 누구와도 쉽게 화해할 수 없던 어린 시절처럼.

하지만 7년 넘게 셀러 깊숙한 곳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낸 뒤 마주한 푸이 퓌세는 전혀 달랐다. 오크 숙성의 풍미는 비로소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고, 그 위로 구운 견과류와 버터, 달콤한 꿀, 그리고 잘 익은 복숭아의 복합적인 향이 층층이 피어올랐다. 세월이 흐르며 모나고 거칠었던 산미는 둥글게 깎였고, 그 빈자리를 오크의 깊은 풍미가 따스하게 채워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 빚어내는 '숙성의 미학'이다.

화해할 수 없을 것같고 나아지지 않을 것 같던 무거운 시간들도, 묵묵히 견디며 기다린 어느 순간에는 이토록 눈부신 선물이 된다는 것. 중요한 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만의 농도를 채워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간을 관통하며 완성되어가는 자아의 여정을, 나는 오늘 이 잘 익은 푸이 퓌세 한 잔에 비춰본다.



도멘 J.A. 페레(Domaine J.A. Ferret)의 푸이 퓌세(Pouilly-Fuissé) 2018

생산자: 도멘 J.A. 페레 (Domaine J.A. Ferret)

지역: 프랑스 > 부르고뉴 > 마코네 > 푸이 퓌세 (Pouilly-Fuissé)

품종: 샤르도네 (Chardonnay) 100%

Tête de Cru: 푸이 퓌세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구획(Climat)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상급 와인

이 도멘은 1840년부터 이 지역의 테루아를 세분화하여 관리해온 선구자로 유명하며, 부르고뉴의 명가 '루이 자도(Louis Jadot)'가 그 가치를 인정해 인수한 곳이기도 함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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