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둑 성장기 / 함윤이
태생적 낙인: 뼛조각을 쥐고 태어난 아이
책은 뼛조각을 손에 움켜쥐고 세상에 나온 주인공의 탄생에서 시작된다. 본인이 의도한게 아니지만 엄마의 뼈를 훔친 아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졌다. 평범해서 더 나아보이는 다른 혈육들과 비교되면서 이 죄의식은 사미의 정체성을 '결핍을 타고난 존재'로 정의해 버린다.
아이에게 무심히 내뱉는 말이 아이 평생에 나침반이 되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기준이 된다는 건... 이 서사의 가장 아픈 지점이다.
나와 닿는 세상의 면적이 넓어질수록 우린 자신이 가진 재능을
점점 보편적인 것으로 느끼게 되는 듯해요. 98p
주먹 크기만큼의 도둑질
주인공은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뼛조각이 비워진 주먹에 다른 소소한 것들을 훔치며 마음의 평안을 느낀다. 빈 주먹을 채우기 위해 시작된 소소한 도둑질은 단순한 물질적 탐욕이 아니다. 그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 탐한게 아니라 그저 상실된 조각에 따른 공허함을 타인의 물건이나 가치로 돌려막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게 그녀의 전리품들은 방의 진열대에 고이 모여진다.
반드시 그녀의 주먹 안에 들어갈만한 사이즈의 것이어야하고 누군가에게 강제로 뺏는 것도 안된다. 그 나름의 그녀만의 규칙은 아마도 엄마의 뼈를 훔쳤다는 죄의식과 한 몸으로 태어난 그 조각의 상실에 따른 공허함, 아무 능력도 없다고 스스로를 낮추며 타인의 무언가로 그 공허함을 채우고 싶은 욕망이였을까. 사미만의 규칙은, 역설적으로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결핍의 크기와 죄책감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녀의 도둑질은 이제 타의반 자의반으로 시험대에 오른다. 좀도둑을 벗어나는 대범함으로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지. 그러나 그 의도와 다르게 결과는 그녀 스스로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게된다. 그 울림이 과연 그녀에게 터닝 포인트가 될지 아니면 소도둑의 더 큰 성장으로 이어질지...
단호한 참견: 무너짐으로써 시작되는 구원
유일하게 그녀의 행동을 지적하는 ‘성준’의 등장은 사미에게 터닝 포인트가 된다. 그녀에게 도둑질을 하지말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성준 앞에 그녀는 눈물 콧물 쏟아내며 주저앉아 목놓아 운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어쩌면 그것은 들킨 자의 수치심이기보다, 누군가 자신의 잘못된 항해를 멈춰주길 바랐던 오랜 기다림의 끝이 아니었을까.
시작이 어려워도 어떻게든 느릿느릿 끌고 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미래도 여럿 있더군요. 101p
보편성의 위로와 성장의 역설
남의 물건을 훔치고 남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이런 유무형의 도둑질이 결코 내가 움켜진다고 해서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마음속 공허한 구멍이 결코 채워질 수 없다는 것... 타인의 가치를 훔치는 것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마음속 공허를 직면하는 순간, 비로소 진짜 성장이 시작된다.
재능이 넓어질수록 특별함이 보편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상실이 아닌 '확장'이다. 작가는 특별한 재능보다 그것을 '지속하는 힘'에 주목한다.
여기저기 헤매며 만나는 여러 미래 속에서, 사미는 타인의 것을 가로채 채우려 했던 구멍이 결국 스스로에 의해서만 메워질 수 있다는 준엄한 진실 앞에 서게 된다.
사미가 진정으로 채우고자 했던 결핍은 무엇이었을까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신화를 언급했듯이 만약 그 뼛조각으로 아이에게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줬다면, 네가 얼마나 특별한 아이인지, 놀랍게 성장할 아이인지로 정의해주었더라면 그녀의 삶의 나침반은 보다 밝은 곳을 향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훔쳐 나온 것은 엄마의 뼈가 아니라, 세상을 놀라게 할 너만의 특별한 조각이란다"
라고 말해줄 수 있는 어른이 우리 곁에, 혹은 우리 안에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태생부터 무언가를 훔쳐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소설 속 ‘사미’의 결핍은, 아이러니하게도 에트나 화산의 척박한 검은 돌밭에서 자라난 카리칸테 품종의 생명력과 닮아 있다. 풍요로운 평야를 거부하고 화산재가 날리는 척박한 고산 지대에 뿌리를 내린 이 와인은, 생존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 끝에 ‘네타로(신의 이슬)’라는 우아한 결실을 맺는다. 사미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것을 훔쳤듯, 이 포도나무 역시 무기질 가득한 차가운 돌의 기운을 훔쳐 제 몸 안에 단단한 구조감을 세워 올린 것이다.
화산지대의 척박한 떼루아가 주는 미네랄리티는 충분히 예견된 상황이였다. 그런데 그 미네랄리티 뒤에 찾아오는 예상치 못한 옅은 달콤함이 숨어 있다. 왜지? 다소 의아하면서도 늘 시칠리아 화이트 와인이 주는 둥근 평온함이 있기에 오히려 미소짓게 되는 반가움이랄까.
사미가 도둑질을 하는 순간 느꼈던 기묘한 평화, 어쩌면 이렇게 날선 산미와 짭조름의 여운 뒤를 감싸주는 작은 달콤함과 같은 포옹이 아니였을까. 결핍을 채우려 애쓰는 우리 삶의 긴장된 순간들을 조용히 위로하고 다독인다.
윈터타이어를 교체하러 들른 매장에서 잠시 시간떼우며 서성이다 발견한 두릅 한상자. 짭조름한 소금물에 데쳐 물기 꼭찬 이들을 대충 손가는대로 집어서 우걱우걱 씹는다. 초장도 그 어떤 소스도 필요없다. 그저 마른 안주 집어먹듯 봄의 쌉싸름함을 씹다가 문득 사미가 잘못 삼켜버린 그 뼛조각의 감각을 떠올린다.
버터와 라임 향이 밴 참돔구이의 부드러움이 와인의 산도와 만나 녹아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사라졌기에 비로소 내 것이 된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척박한 화산토에서 길어 올린 이 맑은 정수는, 고단한 성장기를 지나온 소도둑 사미와 오늘도 각자의 성장기를 치열하게 통과하고 있을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서글프고도 찬란한 축배이다.
생산자: 마세리아 세테포르테 (Masseria Setteporte)
역사와 철학: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 지역에서 수 세대 동안 포도를 재배해온 포르타라로(Portalaro) 가문이 운영. '세테포르테'는 이들이 소유한 역사적인 농장의 이름에서 유래
지역: 시칠리아, 에트나 DOC (Etna, Sicily)
주요 품종: 카리칸테 (샤르도네의 구조감과 리슬링의 산미. 숙성될수록 부싯돌 향과 같은 복합적인 풍미가 발달)
특징: 유기농법 고수. 과도한 오크 사용보다는 포도 자체의 생동감을 살리는 스타일
맑고 투명한 볏짚색
레몬, 라임, 청사과, 흰꽃, 야생 허브향
구입처: 현대백화점 이탈리(Eataly) 매장 (7만 원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