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행복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행복은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결국 행복은 장소의 문제로 본다. 가까이에서 찾을 수 없으니 멀리서 찾으려 한다. 행복을 만나면 너무나 반가울 것 같다. 힘든 세상에서 보이는 것은 불행뿐인데 행복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 이럴 때면 사람들은 행복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행복을 본 적 없고 생김새를 몰라서 만나도 그게 행복인지 모르고 지나친다. 그대가 행복을 찾는 이유는 행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대는 불행 아닌 것을 찾으면 된다. 불행만 보이는 데에서 특별한 것이 나타난다면 그것이 행복일 수 있다.
행복은 발명인가?
행복 발명가. 행복이 없다면 발명해야 하나? 발명은 실체를 만들어서 보이고 만질 수 있게 한다. 문화재에 유형과 무형이 있듯이 형상을 보여야 그 실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전기와 전화기의 발명은 세상에 필요했기 때문에 나왔다. 행복을 발명하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행복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 행복을 발명해야 한다. 여러분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건 그 자체로 행복한 것일 수도 있고 불행을 겪은 후에 생기게 된 지금의 재발견일 수도 있다. 불행을 맞닥뜨리면 그 이전이 행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인생에서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적다. 살아온 날을 회상하면 행복한 순간이나 추억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그대가 지금 현실을 견디고 있는 힘은 그때의 소중한 기억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행복이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불행은 아니다. 그래서 행복은 발명될 필요가 없다. 결국 행복은 발견이다.
행복을 어떻게 찾지?
모리스 메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의 《파랑새(L'Oiseau bleu)》에는 행복을 찾아 떠나는 틸틸(Tyltyl)과 미틸(Mytyl)이 나온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가까이에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라는 교훈이다. 결국 행복은 어디라는 위치가 아니다. 행복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해석에서 출발해야 한다. 행복을 찾는 방법은 ‘바라봄’으로서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는 관조(테오리아)를 통해서 얻은 진리로 행복에 이른다고 보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완전한 행복은 관조적 활동(1178b)’이라고 했다. 즉 사람은 테오리아를 통해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자신을 바라보면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여기에서 관조는 성찰, 반성이며, 이는 행복을 찾기 위해 나침반이다. 그 지침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조에 있으며, 돌이켜 봄으로써 보이지 않던 행복이 보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