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 주문을 하고 사라져 버린 당신에게
책방에서 단체주문, 그러니까 대량 도서주문은 운이 좋으면 1년에 한두 번쯤 있는 일이다. 학교, 공공기관 등은 도서를 구입할 때 500만원 이상은 자체 시스템이나 나라장터를 통해 공개입찰을 하도록 국가계약법으로 정해져 있고, 이 금액 미만으로 구매 하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지난 달 경기도 지역번호가 찍힌 전화를 한통 받았다.
"안녕하세요. 땡땡도서관 땡땡땡 사서선생님이 너의 작업실이 일을 잘하신다고 소개해 주셔서 연락드렸어요. 블라블라~. 예산은 300만 원입니다. 급한 건이니 내일까지 견적서를 보내주셔야 합니다."
책방 생존과 돈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나는 300만 원이라는 말에 300만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마냥 신이 났다. 연신 네네, 그럼요! 친절하게 응대했다. 그런데 이번 주문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보통은 구매할 책의 목록을 기관에서 정해서 책방으로 보내주는데, 구매할 도서 목록을 작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컴퓨터, 경제, 창업 분야 등으로 카테고리만 정해주었고 그 분야 베스트셀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 우선 반려인 홍님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고, 롱패딩을 사주겠다고 잘난척 좀 했다. 퇴근길 노트북을 가방에 욱여넣었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목록을 정리하니 약 200권 정도가 되었다. 밤 11시 3분 메일을 보낸 후 잠이 들었다.
참고로, 기관 도서주문도 대부분 10% 할인 적용을 하기에 300만원 도서판매시 책방에는 대략 60만원의 수익이 남는다.
다음 날 아침 아홉 시쯤 다시 전화를 받았다. 목록에서 2만 원이 넘는 고가 도서, 2023년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도서는 빼달라는 등 소소한 요청이었다. 어디를 다녀올 일이 있어 오후 3시까지 수정된 견적서를 보내겠다는 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어서 예산을 다시 200만원으로 맞춰 작성해 달라는 발신을 할 수 없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예산이 100만원 줄었지만 그쯤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 다른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급했다. 책방에 도착하자마자 요청 내용대로 견적서를 수정하고 오후 3시쯤 메일을 보냈다.
그 후로 5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났다. 분명 급한 건이라고 했는데 2주가 넘도록 답이 없으니 불안한 기분이 되었다. 찍힌 번호로 전화를 해 볼 용기는 나지 않고, 다시 한번 차후 일정을 알려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며칠이 지나도 답이 없었다. 왜 연락이 없을까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다 우리 책방을 소개해 주셨다는 사서 선생님께 조심스레 카톡을 보내 보았다. 선생님도 얼마전 바쁘신 부서로 발령받아 더 물어보기도 미안했다. 포기하려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내 주문처에 메일을 보냈다. 도서구입 목록을 작성하고 수정하는데 서점원의 시간이 적어도 3시간 이상 소요되었다는, 읍소를 가장했지만 누구의 시간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담은 내용이었다. 구매를 할 수 없는 여러가지 사정이 기관에 있을 수 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기다리지 않도록 답이라도 달라고 덧붙였다. 단어를 오래 골라가며 적었다. 마지막 메일을 보낸 건 이틀 전, 꼬박 3주가 된 오늘도 답은 없다.
어제 저녁 홍님에게 고민상담을 했다. 홍님은 책방에서 보내준 목록을 일부 수정만 해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냐고 했다. 내선번호를 알고 있으니 메일이 아닌 전화를 해보라고 세상 답답한 듯 눈빛을 쏘았다.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고 이유가 궁금한건 맞지만 용기가 없다고 했다. 지금에 와서 전화를 걸어 물어보는 일도 우스울 것 같았고, 빌려준 돈이 있는 것처럼 따져 묻는 일도 자신이 없었다. 왜 응답이 없냐는 원망의 말을 숨긴 채 정중하고 온화한 목소리를 낼 배짱도 내겐 없는 것이다. 홍님에게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니까 잊어버릴래."
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그는 왜 응답이 없을까? 무심코 내가 결례가 되는 행동을 한 것일까? 이유라도 알려주면 좋겠다. 불러도 대답 없는 사람. 이 글을 쓰고 깨끗하게 잊을테니 부디 잘 먹고 잘살아 해.
# 표지 책 사진 : 마르타 바르톨, <하나의 작은 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