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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당호수 나동선 Sep 28. 2021

가슴시린 향수

       어제 오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북한강을 따라 대성리 부근을 갔다.  추운 날씨라 옷을 더 껴입었더니 몸에서는 열기가 느껴진다. 달릴수록 차가운 강바람은 열굴에 더 세게 다가와 상쾌함으로 가득하다.  목적지 강가 밴치에 앉아 드넓은 강을 바라본다. 준비해 간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로움. 여기가 바로 지상낙원이다. 강 건너편 문호리를 보니 옛 고향생각이 절로난다. 저 곳은 15년 전까지만 해도 어머님 산소가 있어서 자주 갔던 곳이다. 잔잔한 강물 위로 유년시절의 고향이 파노라마 처럼 눈 앞에 펼쳐진다. 지긋이 감은 눈엔 그 시절의 추억이 너무나 그립고 사무쳐온다.  확트인 그 넓은 들녘이며 정감이 넘치는 그리운 얼굴들.


        내가 초등학교 시절 60년대 우리 바로 옆집에는  김용산 선생님이 사셨다. 선생님 집은 당시 초가집을 헐고 지은 기와집으로 우리 동내에서 가장 크고 좋았다. 선생님은 아침마다 나보다 일찍 집을 나서 학교에 가셨다. 4학년 무렵부터는 나도 서둘러 선생님을 따라 학교에 같이 가곤했다. 가끔은 선생님의 점심 꾸러미를 내가 들고서... 아니 들게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영광인 것이다.  자전거도 다닐 수 없는 십리 남짓한 논길을 걷다보면 풀이슬에 바지가랭이며 신발도 다 저졌었다. 선생님 뒤를 따라 가면서 한 마디씩 해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선생님은 다른 학년 담임을 맡고 계셨다. "동선아, 학교 수업 끝나거든 내 교실로 와라. 집에 갈 때 냇가로 가면서 고기잡게"   "예, 선생님"


       나는 책가방을 등 뒤에 단단히 붙들어 멘다. 선생님 옷가지며 신발은 다른 보자기에 싸서 등 뒤로 묶는다. 그러면 선생님은 내게 고기를 꽤멜 수 있는 풀끈을 준비해 주신다. 선생님은  펜티바람에 붕어나 메기 빠가사리 등을 맨손으로 정말 잘 잡으셨다. 지금은 농지정리가 잘 되어서 일자로 쭉 뻗은 작은 강이 되었지만, 당시 우리 동네 옆에는 강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작고 그렇다고 실개천도 아닌 냇가가 흘렀다. 몇십리 떨어진 저수지에서 흘러 넓은 벌판을 지나며 구불구불  영산강으로 합류하는 자연천이었다. 여름철이면 동내 어른들이 모여 물고기를 잡아 천렵을 즐기던 그런 냇가였다. 물이 흐르는 주변엔 갈대며 억세풀들이 어른 키가 넘게 자라고 있었다. 그 풀들과 냇물이  맞닿아 흐르는 지점은 풀뿌리가 흐느적 거리고 그 아래 물속에는 영락없이 고기들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 곳에  두손을 조심스럽게 넣는다. 손에 닿는 감촉만으로도 무슨 고기인지 금방 알아차리고 맨손으로 잡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냇가 주변을 따라가며 던져준 고기꿰기에 바쁘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선생님한테 배운 실력으로 나도 손으로 고기를 잡아서 친구들한테 던져주고 했다. 친구들은 그저 신났고 너무나 신기하게 생각들을 했다. 언젠가 직장 동료들과 저녁회식 자리에서 였다. 서로 고향 얘기가 나와서 내가 손으로 고기잡던 시절을 이야기 하니 누구도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충청도 한 친구는 강에 있는 큰 돌을 들어서 물 속에 뿌리박고 있는 큰 바위주변을 돌로 내리친다고 했다. 그러면 물고기가 기절해서 뜨게되는데 그 걸 잡았다고 했다.  또 다른 경상도 친구는 전기 밧데리로 잡아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한 경험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퇴직한 지금도 가끔 만나면 우스게 삼아 그걸 묻는 친구도 있다.   


        선생님은 항상 나를 귀여워해 주시고 아껴주셨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진학할 엄두도 못내던 내게 장학생 제도가 있던 중학교에 갈 수 있도록 지도해주신 분도 선생님이셨다. 외독자셨던 선생님은 나보다 두세 살 적은 큰 딸 은희를 시작으로 내리 딸만 다섯이나 되었다. 당시에는 집안에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강했다. 큰딸 은희부터 시작해 은자, 은남, 은옥?이었고 멘 마지막 다섯째 이름은 '꼭기'였을 정도다. 그러셨던 선생님이 내가 고등학교 들어가던 해 봄에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사모님도 3~4년 후에 겨우 큰 딸만을 결혼시킨 후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갑자기 집안에 구심점을 잃은 딸들은 시집을 가거나 외갓집으로 갔다고 전해 들었을 뿐이다. 외지로 나왔던 나는 이후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 후 수 십년이 흘러간 사이 선생님 집은 몇번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했다. 지금은 내 동생이 매입해서 옛 우리집 터와 합한 후 농가로 활용하고 있다. 2년 전에 시골에 갔을 때 그 집에서 하루밤을 지내고 왔다. 당시에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크고 좋았던 그 기와집이 지금은 너무나 누추해 보인다. 수 십년의 시간이 흐른 탓에 큰 수리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겨울 나기도 쉽지 않을 듯 했다. 물밀 듯 밀려오는 선생님에 대한 그리운 추억과 감사함...... 그리고 항상 인자하셨던 사모님과 그 딸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라는 말 외 더 적확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둘째 딸도 내 여동생과 동갑이고, 넷째 딸은 내 막내동생하고 나이가 같아 서로 허물없는 친구들이었다. 


        말이 없는 옛 집은 나의 이 늙고 초라한 모습을 닮은 듯 어찌 그리 낡고 허름해 보였던지...... 형언할 수 없었던 그 착잡함. 나 자신이나 옛집이나 한 세월 흘러가며 겪었던 희로애락들. 이글거렸던 한낮의 시간은 다 가고 험한 풍상에 지친 채 하염없이 서산으로 져가는 오늘의 저 태양.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의 해가 뜨겠지.  그 때는 너무도 몰랐다. 내 태양은 오직 그날  한 번 이었다는 것을. 강가에서 마시는 진향 커피향과 함께  아쉬운 미련은 그것으로 족할 뿐 두 번 다시 나의 해는 뜨지 않는다.  그저 감사와 겸손만이 오늘의 내 몫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한 장 남은 마지막 달 섣달이다. 햇볕이 반가운 늦은 오후 북한강변의 밴치에서 서산의 해를 본다. 한 모금 머금은 따뜻한 커피 맛이 가슴시린 향수되어 몸속 깊이 퍼진다. 순간 몇 발치 안되는 물가에서 퍼득 거리는 물고기 소리가 선명하다.  그것은 아련히 들려오는  그 분의 목소리였다. "동선아, 집에 올때 고기잡으며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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