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디자이너의 다이어리 #7
브랜드 디자이너의 다이어리 #7
오늘은 디자이너이자 회사원으로서 철학적이지만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얘기를 하려고 한다.
예전에 있었던 에피소드로, 한번은 후배 디자이너에게 디자인 수정 피드백을 줬는데 그다지 수정하지 않고 계속 가져오길래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유관부서 담당자와 다양한 논의 끝에 협의한 시안"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실 그 이면에는 '담당자의 강력한 주장'과 '촉박한 일정'도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우스갯소리로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다면 돈이 모자란 것이 아닌지 의심하라'라는 말이 있다. 이걸 회사 생활로 대입해 보면 '노력으로 성과를 낼 수 없다면 노력이 모자란 것이 아닌지 의심하라'가 아닐까?
10의 노력을 쏟아붓고도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100의 노력을, 100도 부족하다면 1,000을...
말은 쉽다. 꼰대라고 욕하고 넘어간다. 다들 알고 있지만 쉬쉬한다. 어렵기 때문이다. 솔직히 10의 노력도 힘들다. 1,000은커녕 100도 무리다.
그런데 확실한 건, 회사 생활은 성과를 낸 결과로만 평가된다.
에피소드로 돌아가서, "유관부서 담당자와 다양한 논의 끝에 협의한 시안"이라는 단순한 문장 안에는, 다양한 주장을 좁히기 위한 노력과 시안을 제작하기 위한 노력, 피드백에 따른 디자인 수정,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한 수고 등 갖은 노력들이 녹아있을 것이다. 필자도 모르는 부분은 아니나 솔직히 그런 부분을 감안해도 디자인 완성도가 부족하였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촉박한 일정에 쫓긴 적당한 타협안으로 보여지는 게 더 컸다. 분명 필자는 업무의 완료보다 완성도를 더 중시한다는 걸 몇 번이나 설명했음에도 퀄리티에 신경 썼다기보다 완료 여부에 급급했던 것으로 보였고 자초지종의 설명은 자기 합리화를 위해 어떤 핑계를 대는 것으로 밖에 안 보였다.
물론 실무자 입장에서는 억울했을 것이다. 자신은 담당자의 의견을 반영한 것뿐이고 촉박한 시간에도 분명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걸 인정해 주지 않는 내가 원망스러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더라도 그것이 결과물을 인정하는 전가의 보도가 될 순 없다. 회사 업무들은 (특히 디자인..?) 완료 자체보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 일방통행 주장, 일정 압박 등이 완성도를 높이는데 걸림돌이라면 적절히 치워놓는 노력을 먼저 하는 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본인은 매운 걸 잘 못 먹는다. 아마 본인이 가장 많이 속은 거짓말(?)이 "이거 하나도 안 매워~"일 거라 생각한다. 음식을 주문할 때도 혹시라도 매울까 봐 물어보면 분명 안 맵다고 해서 주문했더니 매운 경우가 더러 있었고 그럼 사실 짜증이 난다. 어릴 적에는 이해가 안 됐다. "매운데 왜 안 맵다고 하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상대방 입장에서는 정.말.로 안 맵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 사람과 나의 기준은 다르니깐. 그래서 요즘은 조금 더 명확한 기준을 포함해서 이렇게 묻는다. "이거 아기도 먹을 수 있나요?" (아기=1의 매움도 허용치 않는 가장 낮은 기준)
이처럼 노력의 기준도 다들 천차만별이다. 자신은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실상은 나와 같은 맵찔이의 기준, 즉 상대적으로 낮은 기준의 노력이었을 수 있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누구에게나 기본이 되는, 가장 평범한 기준 안에서의 노력은 누구나 한다. 다만 슬프게도 현실은, 그 안에서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다'는 기준에 따른 입장일 뿐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각자의 노력을 평가절하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상황에 따른 각자의 노력을 폄하하거나 비하하는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바는 노력의 기준은 상대적인 거라서 자신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다고 해도 누군가 보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고 누구 말이 맞냐 틀렸냐는 결국, '잘했냐 vs 못했냐'로 판가름이 난다는 사실이다.
요약하자면, 노력은 목표를 달성(완료) 했냐 안 했냐 즉, O/X로 평가를 받는 게 아니라 잘했냐 못했냐 즉, Good or Bad(=성과)로 평가받고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해 글로 옮기는 큰 재주가 없고 민감한 주제를 다루다 보니 글을 썼다 지웠다만 수십 번은 넘게 한 거 같다. 필자의 생각이 왜곡되지 않고 쉽게 이해되게끔 쓴다고 '노력'했지만 초보 작가인 필자의 글 또한 내공 풍부하신 작가님들 수준에는 한참 모자랄 것이다. (본인의 글쓰기 노력은 이제부터...)
구구절절 노력에 대해 얘기했지만 아이러니한 건 인생에서의 성공은 꼭 노력이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노력 외 운, 타이밍 등 기타 부가적인 요소들이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괜히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닌 게 코로나 때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력했다.) 하지만 그 운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갑자기 오고 그것을 잡을 수 있는 건 준비된 자들뿐, 그 준비 또한 노력을 통해서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