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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knock Dec 17. 2023

<원더풀 라이프> 고레에다 히로카즈, 1998

4.0

누군가 영원히 추억할 영화의 주인공, 당신에게.


※스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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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같아서 더 좋았다. 내 주위에 있을 법한 평범하고도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소재 삼아 점잖고 따뜻한 응원을 건네주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손님이 되었다가, 직원이 되었다가, 영화 속 영화의 주인공도 되었다.


오버더숄더 샷으로, 관객들은 손님들 사이에 앉아 앞으로의 일주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설명해주는 직원들의 말을 들으면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직원이 되어 책상에 앉았다. 추운 겨울에 아늑하고 따뜻한 카페에 앉아 이런 저런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떤 아이는 디즈니랜드가 좋았다고 자랑하고, 어떤 할아버지는 와이프 분 이야기를 하시고, 어떤 할머니는 오빠 앞에서 춤을 추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어떤 아저씨는 비행기 조종을 하며 본 하늘 풍경을 묘사해주었다.


다시 관객의 자리로 돌아온다. 영화감독이자, 각본가이자, 주연배우가 된 손님들이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 사이 직원들과 손님들의 감정선과 관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보게 된다.


손님들은 영원히 간직할 삶의 한 조각을 영화 한 편에 담아냈다. 이제 상영 시각이 되어 손님들은 영화관에 입장한다. 관객들도 손님들의 느릿느릿한 발걸음을 따라 영화관에 들어서고, 손님들이 앉아 있는 뒷모습과 스크린을 비춘 장면은 마치 관객들도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것처럼 만든다.


영화가 시작되자, 영화를 보는 손님들의 앞모습이 비춰진다. 손님들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이 꽤나 인상깊다. 영화 속 손님들은 영화 밖의 관객들을 보고 있다. 그들이 영원히 간직해갈 행복했던 인생 한 단락은 다름 아닌 우리와의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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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모치즈키는 공교롭게도 손님의 와이프와 약혼했었다. 일찍 죽는 바람에 영영 결혼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가 손님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은 것은 손님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상처받기 싫었던 까닭이다.


모치즈키는 약혼녀 고쿄가 자신과의 기억을 영원히 간직할 영화로 만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시오리는 모치즈키가 행복한 순간을 찾았으니, 이제 곧 떠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시오리는 모치즈키를 사랑하기에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나를 잊을 거잖아." "나는 이곳에서 함께한 시간이 정말 행복했어. 그래서 난 이 기억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모치즈키는 고쿄가 영원한 한 편으로 담아간, 자신과 앉아 있었던 그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을 영화로 만든다. 그런데 모치즈키는 그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던 적이 없다. 모치즈키는 벤치에 앉아 정면을 응시한다. 자신을 촬영하고 있는 직원들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렇게 그는 직원들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을 영원한 한 편으로 담아 간직한다.


한 순간이 아니라 눈에 담은 사람들과 나눈 오랜 추억을, 그들과의 관계를 간직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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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둥근데, 빛이 들어오는 방향이 어떤지에 따라 초승달이 되기도, 보름달이 되기도 한다. 모치즈키가 떠난 뒤, 시오리가 올려다본 밤하늘의 초승달은 갑자기 보름달이 되고, 갑자기 밤하늘이 그려진 판이 들어올려지더니 화창한 하늘이 된다.


시오리는 한껏 들뜬 기분이다. 세상은 자기가 보기 나름이기에, 시오리는 이곳의 일도 이제 재미가 있다. 어쩌면 그녀도 조만간 영원히 간직할 한 편을 찾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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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 조각, 가장 행복한 순간을 투박하나마 영화로 제작한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인생 전체가 이미 녹화되어 있음에도 실제 모습을 담은 과거의 영상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파벨만스>에서 삶의 단면을 영화로 새롭게 재현해내던 소년처럼, 떠나갈 이들은 흐릿한 추억을 자신의 감정과 약간의 허구적 장식을 더해 재구성해낸다. 재현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생생하게 그 순간에 흠뻑 빠진다. 과거의 시간 속 인물과 사건은 그대로 있겠지만, 그것을 보는 시선과 감정에 따라 플롯은 달라지고 추억은 재탄생한다. 달은 그 자체로는 둥근 모양이지만 그것을 보는 방향에 따라 초승달로 그려내든, 보름달로 그려내든 모두 아름답다. 그러니까, 기억하고 싶은, 재현하고 싶은 순간이 없는 삶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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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아리나 제작환경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다. 누구나 영화를 직접 만들 기회가 있다니, 심지어 누군가의(나만의) '인생 영화'를 직접 만들 수 있다니,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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