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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라 Apr 26. 2024

나는 어떤 기준으로 '피해자'임을 주장했는가

#선의의 가해자와 영악한 피해자

'나만 피해자'라고 생각했을 때의 나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있었다. 나를 함부로 대했던 가족이나 사회에서 만났던 괘씸한 사람들을 언젠가는 꼭 더 크게 복수하고 갚아줘서 나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보길 바랐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을 꽤 벌여보기도 했다. (그냥 그대로 진행했다면 어쩌면 금전적으로나마 보상받았을지도 모르는데 가끔 그게 좀 아쉽다.)


다른 한 편으로는 그렇게 아팠던 나를 살리려 심리적 회복을 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심리를 공부했다. 상담만 받는 것으로는 성에 차질 않았다. 감질나게 나의 특정한 단면을 파악해 보는 MBTI나 애니어그램, TCI나 다중지능검사 등등 성격이나 심리를 분석하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싶어 했고 이해가 안 되면 몇 번이고 파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듣게 된 얘기들 중 하나가 너무 충격이었다. 김태경 교수님의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책은 정말이지 컬처쇼크 그 자체였다.


그들이 원하지 않은 도움을 줘 놓고 그들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나를 돕기를 바라는 것이 과연 선의인지, 그 기준은 누구의 기준인지를 묻는 얘기였다. 그렇게 내가 *인에이블러였다는 걸 깨달았었다. 타인이 힘들어하고 있는 그 순간은 그 사람이 이겨내야 하는 그 사람만의 성장의 기회였는데 그걸 내가 탈취한 꼴이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어떤 사소한 일이 생길 때마다 알게 모르게 당연하다는 듯 나에게 의존하고 있었고 나는 거기에서 나의 존재감과 성취감을 느껴왔기에 반복적으로 헌신을 선택했던 것이다.

*인에이블러 : 타인을 위해 과도하게 희생해서 타인의 자기 주도성을 침해하는 사람




각자 닥친 상황이 힘들다고 서로 무례하게 감정을 분출했던 것이 나에게는 도움의 요청으로 잘못 받아들여졌었고, 그래서 그들이 도움을 원하는지 묻지도 않고 대신 해결해줘 왔었다. 그게 결국 어떤 일이 터질 때마다 당연하게 헌신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굳어지고 반복되어 왔던 것이다. 이 새로운 관점의 시각을 찾아 깨달아 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면 누군가는 가족이 힘들다고 감정을 호소하는데 그저 내버려 둘 수가 있다는 건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고 감정선이 들쭉날쭉 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이 깨지고 부서지면서 새롭게 받아들여지는 순간마다 충격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 시각을 알게 된 다음부터 복수가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모든 게 가족들이 밀어붙여서 나만 피해자가 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만족스럽게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고 뿌듯함을 느껴왔던 건 오직 나였다. 그로 인해 나의 원가족은 여전히 전에 겪었던 비슷한 일에도 대처할 수 있는 법을 모르게 됐다. 어떤 일이라도 그들이 스스로 학습했어야 했고 겪어봤어야 했다. 극복했을 때의 뿌듯함을 직접 알아야만 또 다른 갈등이 생겼을 때 서로에게 화만 내고 무례하지 않고도 할 수 있다는 걸 배워야 했던 것이다. 그 기회를 앗아간 건 어쩌면 과도한 헌신을 하며 힘들다고 툴툴대왔던 나였다. 스스로 삶을 헤쳐갈 학습과 성장의 기회를 누가 더 많이 차지하고 누려봤는지에 대한 기준으로 바라봤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가해자와 피해자는 바뀌었었다.


굳이 복수를 하지 않아도 나를 힘들게 했던 이들은 각자가 성장하지 못한 분야에서 저마다 과분하리만치 힘들다. 이미 존중이 뭔지 배려가 뭔지 하는 심리적 경계선과 기준이 다 무너진 채 본인도 인지가 불가능한 부정적 감정분출의 연속이었던 나의 원가족은, 아마도 엄청난 파장이 있을 것이 분명했지만 늦게 깨달았을지언정 나는 더 이상 어느 쪽도 불필요한 희생을 멈춰야 했다. 더는 서로의 무례함과 과도함을 묵인하고 방치하고 허용해선 안 됐다. 나 역시 그들에게 무례했던 감정적 행동을 멈춰야 했고 의존의 기대를 접고 스스로 독립하기 위해 서로의 존재를 그저 인정하고 각자 성장하고 성숙해지기를 바라야 했다. 이 과정을 글로 정리하는 것은 고작 몇 줄이지만, 필자가 이 시각을 인지하고부터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은 약 5년이 넘게 걸렸던 것 같다. 과정이 처음엔 매우 서툴기도 했고 다소 극단적이고 격정적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감정이 올라오는 상황마다 이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를 알아내는 훈련하고, 그다음에는 왜 이런 감정이 올라오는지를 파악해야 했다. 이 과정도 인지하는 것부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아 상대방인 타인에게 원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훈련을 하는데 이게 너무 힘들다. 내가 무언가를 원하면 항상 나를 지지하는 누군가가 필요했고 나를 돕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더욱 그랬다.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받았으면 좋았겠지만, 성인이 된 지금은 부모님 조차도 그저 나를 돕기 위한 존재가 아닌 단순한 타인에 불과해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끝내 수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아름답지 못했던 관계가 차라리 도움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지금은 원가족을 대할 때 아무런 감정적 동요가 안 되는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가 됐다. 여전히 당신들의 불편한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모르기에 또다시 나를 비난하는 것으로 재접근을 시도해 오는 미숙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때로는 다시 조금씩 선을 넘으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못 이기는 것처럼 수용해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렇게라도 여전히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집중할 곳을 잃또다시 상호 간에 불필요한 헌신으로 채워져 흔들릴 것임을 반복되어 왔던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의 감정을 해소하는 법을 몰라 서툴게 감정을 쏟아낼 것이고 나는 그 신호를 완전하게 무시할 자신이 없다. 중간중간 나를 비난하는 말들을 재해석하고 성숙한 언어로 분석하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진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홀로 이겨내 왔듯 각자의 갈등은 각자 이겨내야 할 숙제이고, 잘 해결해 가기를 바라는 것까지가 나의 최선의 경계임을 깨달았다. 쉽게 용서하는 것이 결국 허용의 뜻이기에 분명한 경계를 세워 확실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높은 수준으로 발달된 나만의 '보호가 필요한 타인을 보살피는 능력'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내가 '선택'한 나의 현 가족의 존재하고 거기에 내가 잘하는 힘을 쏟을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제대로 얻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 에너지를 기꺼이 돌봐야 하는 지금의 가족에게 집중하기로 선택했고 거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의 생애주기 중 가장 빛날 시기는 지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그저 자신들의 강점이 뭔지 제대로 파악하고 사회를 위해 자신들의 에너지를 적절하고 알맞게 분출할 있게끔 자라기만을 바란다. 거기에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고 싶다.


이 힘을 쓸 기회는 의외로 사회에도 간간히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진짜 약자들이 있는 곳들이 그랬고 각종 하위정부기관에서는 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한 뒤 봉사하거나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또한 이런 경험들을 통해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자 한다면 활동할 수 있는 기회 역시 나 스스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기회로 가진 재능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행복하다.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정말 진심으로 뿌듯하고 울컥하고 뭉클하다.




물리적인 기준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하겠지만, 더 깊이 있게 상황을 분석할수록 그 둘을 구분 짓기는 매우 어렵다.

누군가는 의도가 선했지만 방법이 미숙해 선하지 못했던 뜻밖의 가해자가 되었을 뿐이고, 나 역시 피해자 치고는 다른 방면에서 얻은 것이 좀 많았던 사람에 불과했다. (부디 의도마저 불순했던 순수 가해자들이 이 말에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않길 바란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누구의 피해자도 아니고, 누구도 가해하고 싶지도 않음을 확인했고 지금부터는 내 안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와 작별을 하고자 한다.

이제부터는 그저 내가 선택했던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나를 괴롭혔던 진짜 가해자는 나 자신이었음을 대면했을 때의 충격을 이제는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기꺼이 보내줄 수 있어서 기쁘다. 이 글은 그때 처음 만난 나의 진짜 가해자에게 전하고 싶은 작별인사였다.


안녕(Bye), 나의 가해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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