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인간은 누구나 저 자신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현상들이 교차하는 지점, 단 한 번뿐이고 아주 특별한,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고 특이한 한 지점이다. 단 한 번만 그렇게 존재하는, 두 번 다시는 없는 지점이다. 그래서 각자의 이야기는 소중하고 영원하고 거룩하며, 그래서 어쨌든 아직 살아서 자연의 의지를 충족시키는 인간은 누구라도 극히 주목할 만한 경이로운 존재인 것이다. 그 모든 인간 각자에게서 정신이 형상이 되고, 각자에게서 피조물이 고통받고, 각자에게서 구세주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 - 데미안
사람은 꿈을 꾼다. 미래를 그리고 밤을 수놓는 꿈은 미지의 영역이자 삶의 동력이다. 한여름 밤의 꿈 dream과 초록빛 소원 wish의 간극에서 우리의 삶은 광연廣衍하게 발산하지만, 때론 올곧은 한 점으로 수렴된다. 그리고 이 발산과 수렴은 일생을 통틀어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장자의 나비가 실존의 모호성을 탐닉하듯, 꿈을 꾸는 우리들의 세계 인식도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저 감각을 통해 인식한 피상적 결과물이던 의심을 동반한 본질의 성찰이든 간에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발흥되는 현실과 꿈의 간극은 우리들을 꿈의 본질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게 한다. 그렇기에 ‘단 한 번만 그렇게 존재하는, 두 번 다시는 없는 지점’인 인간, 즉 그들 각자가 ‘단 하나뿐인 세상’인 인간들이 꾸는 꿈은 각기 다른 형태를 지니기 마련이다. 특히 소원으로써의 꿈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논하려는 것은 바로 소원에 대한 탐구이다. 20대로서 앞으로의 삶을 설계할 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주제인,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범주 안에서 쓰일 글은 ‘어떻게 꿈꿀 것인가’에 대한 내 고민의 산물이다. 이 논의를 위해 선정한 첫 번째 작품은 바로 ‘데미안’이다. 헤르만 헤세의 싱클레어가 써 내려간 이 자전적 에세이는 흩어질 수밖에 없던 이상을 좇던 나에게 경종을 울린 작품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20대는 어쩌면 처음으로 꿈을 정해야 하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학창생활을 지나 좀 더 큰 창문이 있는 대학에 들어온 이후로 우리가 바라보는, 아니, 자기 밖의 손가락들이 가리키는 곳은 언제나 저 언덕 너머에 있을 미지의 영역이었다. 보이지 않는 내일이라는 그 막연한 두려움을 주입당한 이들은 그 누구보다 현실을 직시하지만 그들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비현실적이다. 그렇다면 정녕 내가 원하는 길을 가는 것은 사치일 따름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 않는 그 길을 걷는 것은 지금껏 내가 일궈온 모든 것과 맞바꿔야 할 정도로 덧없는 일장춘몽일 따름일까.
조금 다른 꿈을 꾸는 것, ‘나이’와 ‘학년’에 비해 막연한 소원을 품는 것은 누군가에겐 용인되지 않는 문제였다. 나는 그것을 대학에 와서 깨달았다. 그들에게 20대는 성인이란 자격증이 부여된 순간이었고 그 딱지로 누릴 수 있는 여러 단물을 빨아먹은 후에 소위 ‘정신’이란 것을 차리면 묵직한 책 몇 권에 둘러싸인 채 하염없는 시간을 도서관에서 갖다 바치며 남들이 다 꾸는 꿈을 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의 무리를 만들어 어떤 기준에 따라 정수기처럼 정제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다른 사람들을 의심과 비아냥거림의 눈초리로 재단했다. 그들의 행태는 자신은 ‘주류’에 속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는 저열한 것이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일수록 확실한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욕구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살아가는 이들을 사로잡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기승전결이 뚜렷하며 투자 대비 효율이 괜찮다고 여겨지는 방법론에 집중한다. 다만 세상이 변하는 속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즐기는 문제에 있어선 회의를 느낀다. 배움의 전당에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해있다. 정작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작품 데미안은 출간 이후 헤르만 헤세가 내세운 가공의 인물 싱클레어 덕분에 작품성과는 별개로 세간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심지어 싱클레어는 책이 출판된 1919년에 이 데미안으로 재능 있는 젊은 작가에게 수여되는 상이었던 폰타네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데미안의 작가 싱클레어에 대한 대중의 의문은 날로 커져갔다. 그러던 차 심리학자 카를. G. 융은 헤르만 헤세에게 ‘당신의 익명’을 간파했다며 편지를 보냈다. 실제로 헤세가 작품 내에 설계한 치밀한 이중구조는 20세기 초에 인간의 심리구조를 탐구하던 심층심리학의 영역에서 차용한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카를. G. 융의 분석심리학적인 개념을 작품 내 심층구조 내에 녹여냈다고 할 수 있다. 융이 자서전에 남긴 경구,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와 헤세가 작품에서 그려낸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관계는 언뜻 보아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융은 데미안이 간행될 당시 싱클레어의 저편에 침잠해있던 헤세를 통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앞서 언급했듯 융은 자신의 이론을 ‘분석심리학’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블로일러의 심층 심리학과는 분명하게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러한 분석심리학의 핵심은 다름 아닌 ‘개성화 과정’이며, 이는 자아가 다양한 층위로 나눠진 무의식을 인식하고 통합하는 ‘무의식의 자기실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융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이지만 개인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가 원하는 모습, 즉 페르소나를 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욕망을 대변하는 인격적 측면이 억압되면, 무의식에 억압된 욕망만큼의 보상을 치러야 한다.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의 균형이 깨지면 정신질환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작중 싱클레어의 세계 인식은 이분법적이다. 신실한 종교인이었던 다른 가족들과는 다르게 싱클레어는 하느님이 설파하는 진리의 이면에 존재하던 미지의 세계를 인식한다. 그는 모두 앞에서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순종적인 아들의 모습을 투영하지만 이쪽과 저쪽, 선함과 악함, 명과 암에 대한 의문은 그의 내면에서 아름답고도 기이한 모순의 세계로 치환되었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결국 그 이채로운 섬뜩함에 매혹되기에 이른다. 프란츠 크로머를 만나 어울린 것은 ‘누구든 자기 자신이 되기 전에 무너뜨려야 할 기둥에 최초로 난 금’이라는 작가의 표현처럼 싱클레어 내면에서 발현된 최초의 모순이자 그가 ‘외부’라는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강렬하고도 매력적인 일탈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 일탈은 문제를 일으킨다. 경계를 허무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싱클레어에게 정신질환과 같은 염증을 유발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그는 데미안이란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는 크로머와 얽힌 싱클레어를 구원해주었다. 이때 등장한 데미안은 융의 심리학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소리를 모두 듣는 내면의 ‘자기 The Self’이자 ‘참 나’였다.
융의 이론에서 ‘자기’는 자기실현의 최종단계이자 의식과 무의식이 온전하게 통합된 것을 말한다. 일상적인 의식 속에 존재하는 ‘나’, 에고 ego는 평소에는 ‘자기’를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꿈 dream을 통해서 내면에 형성되어있는 다양한 무의식을 접할 수 있다. 꿈은 형체가 없는 무의식을 이미지화시켜준다. 그리고 때론 이 이미지가 인격화 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꿈에 등장하곤 하는데, 여기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개념을 도출할 수 있다. 아니마는 남성에게 내재된 여성성이며 아니무스는 여성에게 내재된 남성성이다. 이것은 개인이 무의식을 인식하는 데에 있어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무의식을 인식하고 ‘자기’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역할은 실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작품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참다운 나 자신인 데미안이 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싱클레어는 ‘자기’인 데미안과 아니마인 ‘에바 부인’을 만나게 되고 아프락사스로 대변되는 전체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는 작중에서 자기인식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을 이어간다.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는 새처럼, 알이라는 세계를 깨뜨리고 아프락사스라는 통합의 신에게로 비상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이 작품은 당시 사람들을 획일화시켰던 기존의 질서가 모두 무너지다시피 한 유럽의 젊은이들에 커다란 화두를 던졌다. 헤세는 작품에서 세상이 가르치는 진리에 의문을 품으라고 말한다. 통념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외부의 시선이 아닌, 스스로의 세계와 마주하는 법을 설파한다. 자신의 삶에 재판관이 되라면서 금지된 그대로를 따르는 편한 이들을 다그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론 존재를 억압하는 운명과 주입당한 꿈에 절망한 이들을 위로하고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무언가를 추구하면서 살 때야 느낄 수 있는 실존의 쾌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안에서 매일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내야 하며 한편으로 자기 밖의 모습을 현실이라 여기면서 자기 안에 있는 본래의 세계를 외면하는 이들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 이들이 감내해야 할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국 작중 싱클레어가, 작가 헤르만 헤세가 추구한 궁극적인 소원은 ‘온전한 자기 자신에게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헤세는 작중에서 싱클레어의 아니마, 에바 부인의 입을 빌려 소원에 관해서도 고찰한다.
당신 스스로도 믿지 않는 소원에 매달려선 안 되죠. 그 소망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제대로, 올바르게 소망해야 해요. 당신 스스로 그 실현을 온전히 확신할 수 있는 방식으로 원할 수 있다면 실현도 가능한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소망한 다음엔 다시 후회하면서 두려워하죠. 그 모든 것이 극복해야 할 일이에요.
카를. G. 융의 분석심리학 개념을 차용해 헤세가 구축한 데미안의 이중구조는 마지막 즈음에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내면에 각인시키는 순간, 나선형으로 변화하면서 두 세계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헤세는 융의 개성화 과정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던 ‘개인 내부에 있는 고유성의 실현’을 싱클레어에게 녹여내어 어디서나 인간을 획일화하려는 세상에 내던져진 젊은이들의 영혼을 위로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 안에 속한 인간은 외부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시선에 의해 자신의 본질마저 꿰뚫린다면 그의 자기인식은 공허한 메아리로만 가득 찰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는 인류 지성사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원론적인 질문이다. 특히 세상을 향한 문턱에 서있는 20대에게 이 질문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에 개인의 특성을 잘라내고 가장 보통의 존재가 되는 것이 미덕인 이 시대에, 헤세가 어느 편지에 남긴 말처럼 ‘영혼의 항거’를 통해 맞서는 세상의 모든 싱클레어들이 데미안이 되기를 서툰 진심을 다해 기원해 본다.
헤르만 헤세(안인희 역), 데미안, 문학동네, 2013. (인용)
카를. G. 융(이윤기 역), 인간과 상징, 열린책들, 2009.
네이버 지식백과 카를 구스타프 융 항목 (링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2698&cid=59014&categoryId=59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