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규의 느린작업실 602호] 오기가미 나오코의 힐링영화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처절한 얼굴로 카메라를 향해 외치는 배우 유해진의 광고를 보면서 격하게 공감했던 적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런 날, 멍하게 침대나 소파에 누워 건성건성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를 본다면 제법 괜찮은 처방전일 수 있다. 사건같은 것들은 딱히 없이 화면은 느릿느릿하다. 지루한 부분은 잠깐 졸다 봐도 괜찮다. 자다 일어나서 봐도 괜찮다. 바로 그것이 그녀의 영화들이 말하고 있는 ‘슬로 라이프’이기 때문이다.
#. 왜? 전학생은 바가지 머리를 거부하는가
1. 요시노 이발관(2004)
모두가 서로를 알고 있는 작은 해안가 마을에는 이상한 전통이 전해져 오고 있다. 소년들이 그들의 나이와 상관없이 이발사 요시노로부터 같은 헤어스타일-바가지 머리-을 하고 있다는 것. 그러던 어느 날, 대도시로부터 염색까지 한 헤어스타일의 학생이 전학을 오게 된다. 이발사 요시노는 새 전학생의 머리도 여느 다른 아이들처럼 하려고 하는데….
‘요시노 이발관’은 매 순간 다채롭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전통의 가치를 새삼 돌아보게 만드는 한편의 재미있는 이야기다.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아이들의 앞머리를 일자로 자르는 우스꽝스러운 ‘바가지 머리’를 하지 않으면, 괴물의 눈에 띄어 희생된다는 것.
이유야 어찌됐든 한번 굳어진 믿음은 관습이 되고, 전통이 됐다. 전설을 철석같이 믿는 요시노 이발관의 주인아주머니는 전통을 지키는 일이 바로 아이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전학생의 ‘바가지 머리 거부 운동’에 자극받은 아이들은 전통에 반기를 들고, 두발자유를 외치며 함께 가출을 감행한다.
이 영화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바가지 머리’라는 전통을 두고 대치하는 두 세대의 갈등을 통해, 전통을 꼭 지켜야 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되묻는다. 마지막 이발소 장면에서, 아이들과 아주머니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 마을의 전통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마음의 상처 달래는 따뜻한 밥 한 끼
2. 카모메 식당(2006)
헬싱키의 길모퉁이에 새로 생긴 카모메 식당. 이곳은 야무진 일본인 여성 사치에가 경영하는 조그만 일식당이다.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를 대표 메뉴로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지만 한달째 파리 한 마리 날아들지 않는다. 어느날 일본만화 매니아인 토미가 첫 손님으로 찾아와 대뜸 ‘독수리 오형제’의 주제가를 묻는가 하면, 눈을 감고 세계지도를 손가락으로 찍은 곳이 핀란드여서 이곳까지 왔다는 미도리가 나타나는 등 하나 둘씩 늘어가는 손님들로 카모메 식당은 활기를 더해간다. 사치에의 맛깔스런 음식과 함께 식당을 둘러싼 사연 있는 사람들의 정체가 서서히 밝혀지는데….
‘카모메 식당’ 과 연이 닿은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참 특이하기 그지없다. 눈을 감고 찍은 장소 어디라도, 그저 지금 처한 현실을 떠나야만 했던 미도리. 긴긴 부모님 병수발에 자신의 삶을 내어 주다가, 난생 처음 자신만을 위해 어딘가로 떠나온 마사코.‘카모메 식당’ 속 세 명의 일본 여성들은 모두 나름대로 아픔을 안고 낯선 땅 헬싱키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보듬는다. 서로 순수하게, 서로의 무게가 버겁기 않게 만나, 서로를 부담스럽지 않게 받아들인다. 미도리와 마사코는 처음엔 삶으로부터 일탈, 탈출을 생각했지만 사치에처럼 자아찾기에 동참한다.
사치에는 식당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해서 좋은 게 아니라 싫었던 일을 하지 않아서 좋은 거에요”
# 이 섬에선, 사색조차 안해도 괜찮아!
3. 안경(2007)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떠나고픈 타에코는 어느 날 남쪽 바닷가의 조그만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맘씨 좋은 민박집 주인 유지와 매년 찾아오는 수수께끼 빙수 아줌마 사쿠라, 시도 때도 없이 민박집에 들르는 생물 선생님 하루나를 만나게 되고, 타에코는 그들의 색다른 행동에 무척 당황하게 된다. 아침마다 바닷가에 모여 기이한 체조를 하는가 하면 특별한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들이 이상하기만 한 타에코. 그곳 사람들에게 질린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민박집을 바꾸기로 하는데….
일본 가고시마의 '요론섬'이 배경인 ‘안경’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사색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영화다. 타에고가 머물기로 한 민박집 하마다는 손님이 많이 올까 두려워 명찰 크기만한 간판을 달고 있고, 민박집 주인 유지는 밥을 짓고 먹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다.
‘졸고 있는 봄의 바다’처럼 늘어진 시간은 밥때를 제외하곤 별 의미가 없고, 사색을 특기 삼아 지내는 사람들은 빙수를 먹으며 언제나 똑같은 바다를 바라본다.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빙수를 먹으며 요론섬의 눈부신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장면은 몇 번을 봐도 평온하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잠시의 여유로움도 즐기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느리게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선사하고, 느림의 의미를 스스로 터득하게 만드는 특별한 선물을 전달한다.
# 수상한 가족의 비밀스러운 공간
4. 토일렛(2010)
늘 같은 색 셔츠와 바지를 입고 정적만이 감도는 연구실에 출근하여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하는 레이.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로봇 프라모델을 수집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그에게 은둔형 외톨이 형, 버릇없는 여동생,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올 때마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수상한 할머니가 짐처럼 남겨진다. 설상가상 혼자 살던 아파트에 불이 나고, 어쩔 수 없이 문제 많은 가족들과의 예측 불가능한 동거가 시작된다.
설정만 봐도 ‘소원했던 가족들이 서서히 교감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인간적으로 한 걸음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려낼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심상찮다.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서양인 세 남매(영화의 배경은 캐나다 토론토)와 일본인 할머니. 그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기에 대화가 거의 없다.
‘토일렛’은 알다가도 모를 가족의 진심을 ‘화장실’이라는 공간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풀어나간다. 서로 달라도, 서로의 이유를 알지 못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도, 심지어 언어조차 통하지 않아도, 우리는 반언어적, 비언어적 요소로도 충분히 이야기 나눌 수 있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고, 그리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 외롭니? 고양이에게 부탁해
5.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2012)
어릴 때부터 뒤만 돌아보면 남자 대신 고양이가 쫓아왔다는 사요코. 같이 살아준 고양이들의 다재다능한 특기 덕분에 생계를 유지하며 고양이 렌트와 돌아가신 할머니 불상 앞에서 대화하는 것이 그녀에겐 일상의 전부이다. 하지만 혼자여도 외로움에 사무치지 않을 수 있는 건, 바로 마음의 ‘구멍’을 쏙 메워주는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이 늘 옆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사요코는 외로운 사람들을 찾아 리어카에 고양이들을 싣고 돌아다니며 외친다.
“외로운 사람들에게 고양이 빌려드려요~”
고양이가 잘 지낼 수 있는 환경인지를 심사한 후, 고양이를 빌려주는 독특한 사업관을 가진 사요코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고양이를 외로운 사람들에게 대여하는 것이다. 말년을 혼자 보내는 외로운 노인, 가족과 떨어져 혼자사는 가장, 12년째 렌터카 회사에서 홀로 앉아 일하며 링 도넛을 먹던 노처녀 등 그들의 구멍난 마음을 메워주는 것은 사요코에게 빌린 고양이다. 결국, 고양이를 통해서 사요코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고양이를 통해 다른 외로운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 그리고 더불어 자신의 외로움도 함께 털어버린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외롭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얻는 사요코의 모습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사진=네이버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