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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영 May 29. 2023

무지를 인정하는 용기

인정하기


1. 화가 나요? 누구한테? (이디스 워튼 『징구』, 책읽는 고양이) 



혼자 하는 걸 두려워하는 밸린저 부인은 자기처럼 끊임없이 배움을 갈망하는 여성 몇 명을 모아 '런치클럽'을 만들었다. 회원은 밸린저 부인을 포함해 레버렛 부인, 폴린스 부인, 벤 블레이크 양, 로라 글라이드 양, 로비 부인 이렇게 총 6명이었다. 3, 4년 정도 함께 점심을 먹고 토론하다 보니 런치클럽은 지역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고 저명한 외부 인사를 초대해 접대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드디어 <죽음의 날개>를 쓴 당대 유명 작가인 '오즈릭 데인'이 클럽의 초대로 다음 모임에 오기로 했다. 


회원들은 들떠있었다. 그들은 지난 모임에서 <죽음의 날개>를 미리 읽기로 했다. 하지만 로비 부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저명한 교수의 소개로 들어온 그녀는 런치클럽 회원들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처음부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그녀를 회원들은 불편해했고, 자기네 수준과 맞지 않는 사람으로 여겼다. 회원들이 오즈릭 데인에 대해 얘기하자 로비 부인은 그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이름만 들어봤을 뿐 아무것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회원들은 어떻게 오즈릭 데인과 <죽음의 날개>에 대해 모를 수 있냐며 그녀를 힐책했다. 그들은 그 작품에 대해 토론했다. 


"전 책을 재미 위주로 고르진 않아요."

"맞아요. 그 책이 재미는 없죠."

"꼭 그렇지는 않죠."

:뭔가 얻었다는 느낌은 들게 하죠."

"글쎄요, 뭔가 얻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즈릭 데인은 뜻하는 바를 아펠레스로 가려놓았어요. 이피게니아의 희생은 아가멤논의 얼굴로 덮었고요."

"그 책의 장점은 독자마다 정말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점은 결정론 연구가 럽턴 교수의 <윤리의 자료학>과 견줄 만하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로비 부인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그 책의 내용이 도대체 뭐란 말이에요?" 회원들은 모두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런치클럽 회원들의 책에 대한 토론은 이런식이었다.


드디어 오즈릭 데인이 왔다. 회원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서로 눈치만 봤고 작가의 작품에 대해 뭔가 얘기하려다 심리학을 언급하게 되었다. 작가는 어떤 심리학이었냐고 질문을 했다. 회원들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는데, 미소 띤 얼굴로 로비 부인이 "징구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회원들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일제히 징구가 맞다고 했고, 곧 징구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전 그것 때문에 인생이 변한 경우를 많이 봤어요."

"제게도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을 아까워해서는 안 돼요."


회원들이 한참 징구에 대해 토론하고 있을 때, 로비 부인이 말했다. 책을 읽지 않아 할 말이 없는 자기는 브리지 게임 약속에 가야 한다고. 그때 오즈릭 데인 작가가 같이 가자며 일어섰다. 


두 사람이 나간 후, 징구에 대해 뭔가 찜찜했던 회원들은 사전을 찾아봤다. 심리학과 관련해 징구에 대해 얘기했던 회원들은 깜짝 놀랐다. 징구는 브라질에 있는 강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로비 부인이 유명한 작가 앞에서 그들을 가지고 놀았다며 분통해하고 런치클럽에서 그녀를 내보내기로 한다.




2. 허풍



밸린저 부인은 혼자서 뭘 하는 게 두렵다. 꼭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와 체면상 아무나 하고 함께 하고 싶진 않고 남들 보기에도 있어 보이고 싶다. 그렇게 만든 것이 런치클럽이었다. 시작부터가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하고 만들었기 때문에 이미 그 모임은 허풍이 가득하다. 


런치클럽은 독서 모임이다. '자기처럼 끊임없이 배움을 갈망하는 여성들'을 모았다고 근사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자기처럼 혼자서는 뭘 못하는, 하지만 남들에게 과시하고 인정받고 싶은 여성들'을 모았다. 그들은 독서 모임이라는 모양새를 갖춰 지적 우월감을 과시하고 지적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허풍으로 가득한 독서 모임이 3, 4년이나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그들이 그들 입맛에 맞는 사람들하고만 함께 했기 때문이다. 서로 비슷한 생각으로 모인 그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이 모임을 계속하기 위해선 괜히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서로의 부족함이 보이지만 아무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당연한 모임의 룰이 되었다.   


그것이 정상인 듯 그들이 허풍으로 그들의 지적 우월감을 키우고 있을 때, 그들은 새로운 회원인 로비 부인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불편해한다. '자기네 수준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부러워서 그리고 부끄러워서였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당당함이 부러웠고, 몰라도 모른다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가식적인 모습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왜?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에.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내려놓자니 두려운 것이다. 남들의 시선이. 남들이 자신들의 실체를 보고 비웃을까 욕을 들을까 겁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그렇게도 인정하기 싫었던 그들의 무지는 그들이 그토록 만나기를 고대했던 유명 작가 앞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것도 수준이 맞지 않는다며 무시했던 로비 부인에 의해서 말이다. 그들은 평상시 습관 그대로 아는 척 대충 얼버무리며 잘난척하다 그야말로 망신을 당한다. 로비 부인이 던진 강 이름 '징구'를 심리학이라며 또다시 아는 척 서로 얘기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서로가 얘기를 주고받을 때, 징구가 뭔지 모르면서 아는 척 얘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로비 부인과 작가가 떠났을 때, 그들은 곧바로 사전을 찾아본다. 그들은 징구가 심리학이 아니라 강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고 어쩔 줄 몰라한다. 창피해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한다. 누구한테? 로비 부인한테. 그리고 그녀를 모임에서 내보내기로 한다. 그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무지를 탓하지 않는다. 오로지 로비 부인 탓으로 돌린다. 왜 그럴까? 로비 부인만 아니면 그들의 무지를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해서다. 


그렇게 인정하기가 힘들까? 아무리 아닌 척 해도 알 사람은 다 안다. 말해도 듣지 않을 테니까, 기분만 나빠할 테니까 말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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