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히 간직하기
35살의 직장인 찬우. 대학 졸업 후 신문사에 들어갔으나 실직을 하고 5년 동안 실업자로 지내다가 어렵게 들어간 지금의 회사. 몇 달째 봉급이 밀려있다. 가망이 없어 보여 사표를 썼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왜 이렇게 먹고사는 게 힘든지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지긋지긋했던 가난은 지금도 벗어나지를 못한다. 항상 허기가 져 있던 어린 시절. 그는 마을의 빈민 구호소에서 파는 국수가 너무 먹고 싶어서 버스 터미널에서 구걸을 했었고, 버스 회사 직원들한테 걸려서 학교로 넘겨졌다. 학교에 오신 어머니는 젊은 담임선생으로부터 굴욕적인 말을 들어야 했다. 그 기억 때문에 그는 지금도 국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노인성 치매에 걸린 칠순의 어머니. 매일 죽은 아버지와 죽은 형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빨리 가자고 조른다. 아버지는 그가 3살 때 돌아가셨다. 사진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아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다. 학비 걱정 말라던 5살 터울의 형은 월남에 파병된 지 두 달 만에 전사했다.
그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괘종시계를 떠올리곤 했었다. 꾸준하게 똑딱거리면서 어김없이 제시간에 종을 울려 주는 믿음직한 시계. 그 믿음직한 어머니 곁에서 살아온 35년. 힘들 때마다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주었던 어머니였다. 그런데 그 믿음직한 시계가 어느 날 갑자기 멈추어 버렸다. 그의 삶에 어머니가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주었는지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지금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매일 어머니가 반복하시는 말씀, 죽은 아버지와 죽은 형이 그곳에서 기다린다는 그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기억은 지금 여기가 아닌 비록 가난했지만 아버지와 형이 함께 있는 그 시절 어디쯤에 가 있는 것 같다. 그때를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며,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렇게 도착한 고향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산골 마을이 고층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어머니를 다방에 계시도록 하고 잠시 나갔다 돌아오자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한 아낙네가 저쪽 언덕바지 길로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가시더라고 말해준다. 기차를 탈 때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했던 눈은 어느새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을 맞으며 어머니를 찾아 나선다. 차츰 눈송이가 굵어져 가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은빛이었다.
이 작품에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등장한다. 주인공, '그'(찬우)에게 그 누구보다도 믿음직한 힘이 되어 주었던 어머니. 그는 어머니의 치매를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 감히 그 심정을 누가 알 수 있을까? 감히 그 심정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나에겐 3살 터울의 오빠가 있다. 주인공에게 어머니가 그랬듯 항상 나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던 오빠였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돈의 중요성을 몸소 느꼈던 오빠는 정말 열심히 일했고, 뒤늦게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가족 모두의 자랑이었고, 든든한 울타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오빠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노인성 치매 진단을 받았다. 가족 모두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족들은 오빠의 치매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언젠간 좋아지겠지 언젠간······
노인성 치매에 걸린 오빠가 매일 반복해서 하는 말이 있다. 대학교에 가야 한다고 동아리 모임이 있다고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빨리 대학교에 가야 한다고 반복한다. 아직도 가족들은 오빠에게 정신 차리라며 지금 현재를 알려주는 말을 반복한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가장 그리워하는 시절, 비록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온 가족이 함께 살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듯, 오빠 또한 비록 가진 것 없고 되는 것 없어 매일매일이 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대학생 그때이지 않았을까.
치매에 걸린 오빠의 행복은 지금 여기가 아닌 비록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선·후배 동기들이 함께 있는 그 시절 어디쯤에 있는 것 같다. 오빠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그 시절의 기억만은 소중히 간직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