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심리학이 말하는 육아와 마음의 평온

〈어른 안의 어린 내가 흔들릴 때, 관계의 시간이 어긋납니다〉

by 김신형

관계가 어긋나는 순간은

항상 말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말보다 먼저,

몸이 아주 미세한 속삭임으로 먼저 반응할 때가 있습니다.


숨이 예전보다 더 얕아지고,

명치 아래 어딘가가 조용히 굳어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가슴이 먼저 여기 어딘가가 틀렸다라고 알려주는 순간들.


그때 우리는 보통 상대를 탓하거나

상황을 분석하려고 하지만,

융 심리학은 관계 속에서 흔들리는 어린 나의 움직임이라고 합니다.



- 어른의 말이 아니라, 오래된 말이 관계를 덮을 때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난 뒤

뒤늦게 찾아오는 당혹감과 죄책감이 있습니다.


그 당혹스러움의 정체를 따라가 보면

그때 내가 내뱉은 말은

지금의 나가 아니라

예전에 들었던 말일 때가 많습니다.


어린 시절,

설명할 틈도 없이 끊기던 말.

왜인지 모르게 참아야 했던 감정들.

받아들여졌던 적이 없던 불안들.


그 오래된 말들이 지금의 입을 통해

다시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융은 이것을 그림자의 반복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관계라는 무대에서 다시 연기됩니다.

그 대상이 이번에는 부모일 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고,

혹은… 내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 감정은 말보다 먼저 몸의 결로 온다

아이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감정을 몸 전체로 표현합니다.


눈빛이 갑자기 흐려지는 것,

어깨가 살짝 움츠러지는 것,

숨의 리듬이 한 박자 무너지는 것.


아이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몸으로 먼저 반응합니다.


그런데 어른이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 몸의 신호를 끊어버리면

아이의 감정은 말이 되지 못하고

몸 어딘가에 멈춘 채로 저장됩니다.


둔탁함으로,

침묵으로,

내성적인 성향으로,

혹은 과한 예민함으로.


감정이 말이 되지 못하면,

몸이 대신 말하게 됩니다.


심리학은 이것을 정동의 체내화(somaticization of affect)라고 하고

융 심리학은 Self의 메시지가 차단될 때 생기는 왜곡이라고 해석합니다.


-- 어른의 평온이 오래가지 않는 이유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며칠 전엔 괜찮았는데

오늘은 이유 없이 흔들려요.

그 흔들림은 실패가 아닙니다.


평온은 결코 지속되는 상태가 아니며,

융은 평온을 통과 상태라고 했습니다.

의식이 무의식의 깊은 층을 지나칠 때

잠시 머무는 고요 같은 것.


그런데 어른이 완전함을 유지하려 들수록

그 고요는 더 빠르게 사라집니다.

완벽한 어른을 유지하려는 마음은

대부분 어린 나의 두려움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 나는

불안이 들키는 것이 두렵고,

상처받는 것이 두렵고,

존재가 흔들리는 것이 두렵습니다.

완전함을 유지하려 하면

오히려 흔들림이 더 빨리 찾아옵니다.


--관계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돌봐야 할 사람

관계가 어려워질 때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왜 그럴까.

아이를 어떻게 더 잘 키워야 하지.

나는 왜 자꾸 흔들릴까.


하지만 융 심리학의 답은 정반대입니다.

관계의 문제는

언제나 내 안의 어린 나가 흔들릴 때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 어린 나는

아직도 인정받지 못한 경험을 기억하고,

조금만 거절당해도 금방 움츠러들고,

누구의 감정보다 내 감정이 먼저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은

양육 기술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래 울리고 있던 목소리를 마주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된 곳,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내면의 자리에서 올라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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