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줄 놓지 말자
수술로 열흘 입원해 있는 동안 섬망이라는 증상을 처음 목격했다. 처음에는 도대체 저게 무슨 병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간호사로부터 섬망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수술 직후였다. 마취 후유증과 내 몸으로 들어가는 각종 진통제와 항생제 등등의 약물에 취해 몽롱함에 빠져 있던 어느 날 밤, 병실 밖 복도에서 노인의 비명과 고함에 정신이 들었다. 남자 노인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중얼거렸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이 새벽에 무슨 일인가 하는 궁금증과 함께 혹시 치매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모두가 잠든 병원의 고요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귀를 기울였다.
그는 끊임없이 주변을 질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마라, 그러면 더 아프다. 등등의 소리가 들렸다. 그때마다 간호사들이 뭐라고 대꾸했다. 타이르는 목소리도 있었고 때로는 꾸짖는 듯한 말소리도 있었다. 얼마간 소란이 있었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도 잠 속으로 빠졌다.
노인의 소동은 다음 날 오후에도 있었다. 새벽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나는 무거운 몸을 끌고 소리의 근원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실이 아닌 처치실이라고 쓰인 곳에 그 노인이 누워 있었다. 의료진 몇 명이 주변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고 깡마른 노인은 침대에 누운 채로 혼자 중얼거렸다. 부인으로 보이는 보호자는 노인의 발치에서 무기력하게 이런 상황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입에서는 의료진을 향한 욕설도 간혹 나왔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궁금했지만, 모두가 바쁜 상황에서 물어본다는 짓은 생각할 수 없었다.
또 밤이 왔고 전날과 비슷한 시간대가 되자 노인은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 노인은 누구를 찾는 듯이 이름을 연신 불렀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소리치고 또 누구를 찾는 노인의 소란은 두 시간 정도 계속됐다. 그러다 어느 순단 또 조용해졌다. 아마 잠에 빠진 듯했다.
다음날, 담당 간호사가 혈압을 재러 왔다. 며칠 동안 얼굴이 익은 미소가 넉넉한 간호사였다. 정체불명의 그 노인에 대해서 물었다. 간호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섬망증이라고. 처음 듣는 병명에 어리둥절했지만 바쁜 간호사에게 그게 뭐냐고 다시 묻지는 못했다. 간호사가 떠난 후 구글링을 했다. 답은 이랬다.
“섬망(delirium)이란, 갑작스러운 의식의 변화와 함께 주의력·인지기능 장애가 생기는 일시적 상태이며, 섬망 상태가 되면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짐. 또 지남력(방향을 찾아가는 능력)이 상실돼 사람, 시간, 장소를 알아보지 못하고 헛것을 보거나 심하게 초조해함. 섬망은 중환자실에서 입원해 있거나, 노인들에게 흔하게 나타남. 수술 전 또는 후 회복 중인 상태에서 극심한 불안을 느낀 상태 또는 약물의 부작용 등으로 인해 나타날 수 있음.”
간호사에 따르면 그 노인은 멀쩡한 정신 상태로 입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술이 끝난 후 갑자기 섬망증이 왔고 자기가 이 병원에 왜 왔는지, 아니 여기가 어디인지, 그리고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헷갈리며 폭력성까지 보였다고 했다. 아들과 부인도 무기력해졌다. 하지만 의료진들은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은 듯 무심하게 그 노인을 치료했다.
섬망은 단기적인 치매 현상이라 퇴원을 하거나 병 자체가 나으면 곧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이렇듯 우리의 의식은 사실 강해 보이지만 약하다. 수술이라는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수술을 준비하고 마무리하는 강력한 약물에 의해 짧은 시간이지만 넋을 놓고 바보가 돼 버리는 것이다. 다섯 시간 수술을 받은 나 역시 그 후유증이 몇 주간 지속 되고 있다. 특히 전신마취는 강력한 약물로 사람의 중추신경을 마비시킨다. 이는 죽음에 준하는 상태로 내장기관들도 활동을 멈추는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전신마취는 16시간을 넘기면 안 된다고 한다. 마취의 시작과 끝까지 마취통증전문의가 환자 곁에서 환자의 상태를 살피며 약물을 조절해야 한다고 하니, 수술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지만 동시에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어느 날 아침, 섬망증 노인이 있던 처치실이 조용했다. 그는 섬망증 때문에 입원실에 있지도 못하고 혼자서 처치실에 있었다. 처치실을 지나며 흘낏 쳐다보니 처치실이 비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아침 일찍 퇴원했단다. 모든 것이 다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예전에 “정신줄 놓지 마”라는 독특한 제목의 만화영화를 봤다. 아마 지금도 방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술 몇 잔에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우리들. 하물며 약물 앞에서는 어떻게 버틸 수 있겠나. 스스로의 정신줄을 놓지 않고 살아가야겠다. 내가 누군지를 잊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은 무너진다. 나라는 자아(自我)가 상실되는 순간 나는 없다. 자연이, 신이 부르기 전까지 그리 되지는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