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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04. 2022

꿈이 보내는 신호

어린 내가 나에게

그녀가 또 아기를 건넨다. 아기는 이불에 감싸여 있다. 때로는 포대기와 함께 온다. 얼굴이 없는 그녀, 누군지도 모르는 그녀는 나에게 아기를 맡기고, 나는 이유를 묻지 않고 아기를 받는다. 아기를 받고 나면 잘 돌봐 줘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아직 걸음마를 배우지 않은 어린 아기를 안거나, 업어서 봐준다.


아기 엄마가 언제 돌아올까. 엄마가 돌아와서 아기를 데려가기를 바라지만 그녀가 돌아오는 일은 없다. 이런 불편한 마음은 달에 한두 번 혹은 몇 달에 한 번 일어나지만 이십여 년이나 반복된다.


잠자는 동안 깨어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사물을 보고 듣는 현상을 꿈이라고 한다. 꿈은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을 의미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의 산물이라 했던가.




내가 꾸는 대부분의 꿈은 현실 경험의 재탄생인데, 실제 일어났던 상황에 실제적이지 않은 요소가 섞이는 식이다. 가끔은 바람이 꿈에 나오기도 한다. 텔레비전에서 본 연예인과 놀이동산을 간다거나 회사 생활을 하는데 동료가 다른 사람인 경우도 있다. 대개는 현실 안에서의 작은 변형에 불과하기에 기억에 남는 건 별로 없다.


가끔은 꿈에 전혀 새로운 것이 등장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본 적 없는 물건, 집의 구조, 거리 등이 나타나는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도 있지만 꿈속의 나마저 그 생경함에 놀라기도 한다. 현실에서 부족한 창의력이 꿈속에서 발휘된다는 것이 재밌다. 물론 이미 본 것을 기억하지 못하다가 꿈에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초등학생 때 나와 같은 반이었던 아이가 스무 살 때쯤 꿈에 나타났는데, 꿈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하기에는 이름이 분명했다. 졸업앨범을 뒤적여 그 아이를 발견했는데, 같은 반 아이라는 걸 인식할 정도 외에 별다른 친분이나 기억이 없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왜 십 년도 더 지나 내 꿈에 나온지는 모르겠다. 내 머리에는 정리되지 않은 흩어진 기억들이 많은 걸까.


특정하게 기억에 남는 꿈은 흔치 않다. 대부분은 눈을 뜨며 잊기 마련이다. 하찮은 꿈같지만 기억에 남을 때가 있는데,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번 반복되는 꿈이 그렇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줍는 꿈, 하늘을 나는 꿈을 자주 꿨다. 땅에서 발이 떨어질 때의 짜릿한 경험과 함께, 높이 올라 지상을 바라볼 때 지극히 자유로움을 느꼈다. 하늘을 나는 꿈은 도망치기 위해 하늘을 날거나, 날아서 누군가를 도와주는 꿈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꿈, 아기를 건네받고 돌보는 꿈도 반복되는 꿈 중의 하나였다.


십 대, 이십 대에 다른 사람의 아이를 돌보는 꿈은 무얼 의미할까. 반복되는 꿈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꿈 풀이에서 찾아보니, 아이를 맡는 꿈은 일거리를 떠맡는다거나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을 암시하는 의미라 한다. 그렇게 믿었다. 그저 귀찮은 일이 생기려나보다 여기며 살았다. 그 의미가 아닐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채로.




글을 쓰며 나에 대해 알아간다. 옛 기억을 떠올려본다. 쓰다 보면,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좋았지만 지나간 일도 있고, 잊고 싶어서 지운 일도 있다. 아이 때의 어떤 작은 경험은 평생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아기가 등장하는 꿈은 혹시 아기 때의 경험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닐까. 묻혀 있던 기억의 조각 하나를 꺼낼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에게 돌 전에 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엄마는 6개월에서 8개월 즈음에 나를 고모에게 맡긴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시절의 나는 떨어지면 큰 일 날듯 엄마에게만 붙어있던 아이였다. 고모가 나를 안아주고 업어줘도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을 울었다고 한다.


단지 몇 시간이었지만 아기에게는 영겁과도 같은 느낌이었을까. 어느 누구에게는 대수롭지 않을 그 일이 나에게는 생을 흔드는 혁명 같은 사건이었을까. 늘 같은 나이로 이불이나 포대기에 감싸여  내 품에 안기고, 내게 업히는 꿈속의 아기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으니.


기억에는 없으나 내 몸에 남아 있던 분리의 느낌은 오래도록 꿈으로 나를 찾아왔다. 꿈속에서는 아기를 돌보는 자의 마음으로 아기 엄마가 돌아오길 바랐지만 그 바람은 아기의 마음이기도 했다. 아이를 돌봐주고 놀아 준 것은 아기였던 나를 스스로  토닥여주었던 것일까.


유년기를 지나 성인이 된 후에도 가끔씩 그 꿈을 꾸었다. 아이를 돌보고, 늘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잠이 깨었다. 오직 한 번, 아이를 엄마 품에 돌려주었을 때, 나는 안도하며 잠에서 깼다.




고통의 경험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재된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생의 전반에 영향을 준다. 내게 분리의 경험은 이십여 년 동안 수시로 꿈에 찾아오는 형태로 신호를 보냈다. 헤어질까 두려워 새로운 만남을 밀어내던 내 모습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아가고 있다.


이제 더는 아기를 맡는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관계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내 안의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때로는 작아지고, 때로는 커지는 그 마음을 바라본다. 갈 수 없도록 나를 붙드는 그 마음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만남과 헤어짐을 받아들이자고 다짐을 한다.


마음을 주어도 돼. 준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야. 헤어진다고 소용없는 게 아니야. 함께 한 그 시간들은 어딘가 남아있고, 헤어짐을 받아들이면서 단단해지는 거야. 스무 살을 배로 살고 나서, 이제야 진짜로 어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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