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봄이, 그리고 어린 날의 보리와 환갑의 내가 그 안에 있었다.
토요일 아침, 출장을 앞두고 남편과 마주 앉아 아침을 먹다가 숨이 멎었다.
통창 너머로 대왕참나무가 연두의 손바닥을 펼치고 있었다.
다섯 갈래로 갈라진 잎마다 봄 햇살이 내려앉고, 바람이 지나며 그 잎을 흔들었다.
솨아솨아—
햇살을 타고 들어온 연두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내 눈을 덮었다.
작년 가을, 갑작스럽게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뿌리를 버리기 위함이었다.
퇴직 후에는 마음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오래 살던 집, 오래 묵은 가구, 오래 쌓인 기억들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물 흐르듯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꿈꿨다.
남들이 옳다고 말하는 방향, 사회가 정해놓은 틀에 따라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고 싶었다. 살아가는 그 일상이 바로 기쁨과 행복이 되는, 타인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삶을 꿈꿨다.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오래 그려온 모습이라 이 삶이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지 의심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불확실한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미루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일 자체가 곧 행복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에 온전히 몰입하며 살고 싶었다. ‘집’이란 놈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핑계같지 않는 핑계를 대면서, 이 ‘집’만 아니면 그리 살아질 것만 같았다. 대왕참나무처럼 나는, 늘 출렁이기만 할 뿐, 쉽게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 이사 왔을 때 나는 불안했다. 그 불안을 잠재운 것은 바로 통창으로 들어온 저 대왕참나무였다. 늦가을, 마른 단풍이 또르르 말린 채 가지에 매달려 늦은 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던 모습.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도 그는 바람에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며 매일매일 다른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나는 그 풍경을 보며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책도 읽었다. 참, 대왕참나무라니. 참참나무도, 진참나무도 아닌 대왕참나무라니. 이름은 투박하고 운치라곤 없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나에게 근사한 위로가 되었다.
그 대왕참나무의 연둣빛 손바닥들이 아침 햇살 속에 일렁이는 오늘, 고요했던 시간 위로 봄이 덮이며, 문득 청보리밭이 떠올랐다. 햇살 사이로 흔들리는 그 잎의 물결이, 바닷가 다랑이 밭 위에서 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와 닮아 있었다. 마침 수필 아카데미에서 청보리밭으로 스케치를 떠난다고 하니, 해풍이 닿는 다랑이 논마다 청보리가 자라고, 바람이 불면 물결처럼 넘실댄다는 이야기. 머릿속에는 환한 초록의 그림이 펼쳐졌고, 그 속에 붉게 물드는 노을이 겹쳐졌다.
갑자기 온몸이 깔끄러워져서 몸을 부르르 떨렸다. 내게 보리는 고단한 노동의 다른 이름이었다. 청보리란 말은 최근에 들은 말이고, 어릴 적에는 그냥 ‘보리’로 통칭되었다. 푸른 보리도 ‘보리’였고, 다 익은 황금 보리도 그저 ‘보리’였다. 보리를 베고 나면 곧장 논에 물을 대 모를 심어야 했기 때문에, 보리 수확철은 밥 먹을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기였다. 지금은 생소한, 농번기 방학(일손 돕기 휴일)이 3~4일이 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바쁜 시기인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책가방 대신 낫을 들고, 학교 대신 들로 가야 했다. 땡볕 아래서 보리를 베고, 널어 말리고, 단으로 묶어 지게로 져서, 구루마에 실어 날랐다. 밤이면 호야등 아래 자정 넘도록 타작을 했다. 비라도 오면 겨우 수확한 보리를 잃을 수 있어서 맑은 날 서둘러 한다는 것이 하필 더위 속이었다. 아버지와 장성한 오빠들은 탈곡기를 돌리고, 나는 언니와 함께 보릿단을 안아 동가리를 만들었다. 하기 싫다는 어리광을 부릴 언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어려도 모두 농사일을 거드는 것이 당연했으므로. 밤은 깊어 가는데 타작은 끝이 보이지 않고, 보릿단을 나르다가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다. 그 졸음, 그 잠이 얼마나 절박했던지 보릿단을 쌓다가 그대로 엎드려 잠들기도 하였다. 그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보리 까끄레기였다. 밀 까끄레기보다 보리 까끄레기가 훨씬 독했다. 한번 박힌 까끄레기는 옷을 벗어 탕탕 털어도 소용없었다. 보리 까끄레기가 옷 속을 파고들면, 아무리 털어도 빠지지 않았다. 살갗을 스칠 때마다 벌겋게 부어오르고 따가웠다. 스칠 때마다 불편하고 따가운 것은 말해 무엇하랴. 그 고단함과 불편감은 몸이 아닌 마음에까지 박혔다. 그 시절 비바람에 보리가 쓰러지면 가족 모두가 나섰다. 질척한 논에 들어가 서로 의지할 수 있게 보리를 묶어 세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 지은 보리에서 싹이 나고, 썩어버렸다.
어린 시절의 지긋지긋하던 노동의 대명사였던 보리의 그 위상이 격상되었다. 보릿고개를 넘던 구황작물이 아니라 이제는 관상용으로 재배되어 관광상품이 되었다. 5월이 되면 너도나도 청보리밭을 찾아 관광을 떠난다. 나도 여러 번 청보리밭 녹색 물결이 보고 싶어 청산도로 떠나기도 했었다. 청산도, 들녘 끝에서 서성이며 바람을 기다리기도 했다. 바람에 이리저리 쓰러지며 출렁이는 청보리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들판은 뜨거운 태양 아래 잔잔했고, 보리는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예전엔 바람 없는 날, 보리가 바르게 서 있기를 바랬는데, 이제는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그리워하다니. 삶이 바뀌니, 보리에 대한 기대도 달라진다. 격세지감이다.
조금은 뜨거운 태양 아래 익어가는 보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꾸만 어린 시절 고단했던 노동의 시간이 달려왔다. 지게에 단을 묶어 나르던 등판의 땀, 호롱불 아래서 타작하던 밤의 졸음, 까끄레기에 찔려 따가웠던 피부와 그 시절의 마음까지. 책가방 대신 낫을 들고 들로 나가던 어린 나에게 보리는 고단한 삶의 고갯길이었다. 그리고 그가 나를 키웠다.
장 자크 루소는 “에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씩씩하게 자란 아이는 불평도 적다. 그 아이는 스스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므로 타인의 손길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단했으나 씩씩하게 자라온 나도, 어느덧 환갑을 맞기까지 스스로의 삶을 감당하며 걸어왔다. 남의 도움을 크게 바라지 않았고, 삶이 흔들릴때에도 웬만한 일에는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보리가 내게 준 제법 든든한 이력서이다.
함께 스케치를 떠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간식 꾸러미를 건네고 돌아오는 길. 나는 대왕참나무 잎 하나를 따서 들어왔다.
연두 한 잎.
바람이, 봄이, 그리고 어린 날의 보리와 환갑의 내가 그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