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으로 돌아온 청령포, 그곳의 기록

황성구, 장항준의 <왕과 사는 남자 각본집>을 읽고

by 홍반장


세상이 온통 한 편의 영화 이야기로 들썩였다. 기록적인 흥행 신화를 써 내려간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그랬다. 모두가 영월 청령포의 소년 왕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극장으로 향하는 대신 일상의 속도를 지켰다. 딸아이가 영화를 보고 와서 권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OTT로 보면 된다는 생각에 미적거렸다. 영화를 관람할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다. 그러다 밀리의 서재를 열었고, 운명처럼 이 각본집을 만났다. 망설임 없이 클릭했고 오늘 단숨에 마지막 장까지 달렸다.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 제작진이 내렸을 수많은 판단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각본집 독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작품은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열일곱의 이홍위(박지훈 분)와 유배지를 자처한 광천골 엄흥도(유해진 분)가 만나 서로의 희망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배역을 알고 있었기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배우들의 얼굴이 지문 위에 겹쳐졌다. 그들의 표정을 눈으로 그리고, 마음이 맞닿는 지점에서는 어김없이 울컥함이 밀려왔다.


각본집은 친절했다. 황성구 작가와 장항준 감독의 서문은 물론, 엔딩 장면을 컷 단위로 구성한 스토리보드가 수록되어 배우들이 어떤 호흡으로 역할을 소화했을지 짐작하게 한다. 완성된 영화와는 다른 대사나 수정된 장면이 있겠지만, 영화를 보지 않은 나로서는 배우들이 이런 연기를 펼쳤으리라 짐작하는 즐거움이 컸다.


각본 위에서 흥도의 말은 한 페이지를 빽빽하게 채우고, 홍위의 대답은 단 한 줄에서 멈춘다. 그 여백을 메우는 것은 정교한 지문이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실제 구현된 영상과 비교하며 읽었겠지만, 영화를 보지 못한 나에게 이 각본집은 상상의 근육을 자극하는 입체적인 독서였다.


작품 속 홍위는 나약한 소년이다. 그러나 백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그들의 편에 선다. 진정한 군자의 모습이다. 그를 보며 흥도의 아들 태산이 글공부를 결심했듯, 나 또한 누군가에게 따르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다. 비록 그들과 같은 군자는 되지 못했을지라도, 가슴 속에는 여전히 그 뜨거운 열정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싶다.


기록하고 싶은 문장들


"부탁이오, 그대의 손으로 강을 건너게 해주오."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는 게 희망이듯 모든 걸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단종과 엄흥도가 한 번쯤은 서로를 향해 웃으며 희망을 꿈꾸는 시간이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황성구 작가의 서문 중


"기록된 역사의 문장들 사이, 그 빈틈에 끼워넣은 이 엔딩에 맞춰 우리는 상상해야 했다. 단 몇 줄의 기록이 미처 전하지 못한 것들, 차가운 활자가 전하지 못하는 인간의 온기와 형언할 수 없는 진심과 생생한 사람의 순간들을."— 장항준 감독의 서문 중


왕사남 엽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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