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인간에게 건넨 은밀한 유혹

이나가키 히데히로,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을 읽고

by 홍반장

산행은 내게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발바닥에 닿는 지면의 감촉을 느끼는 것, 그 걸음에 맞춰 '밀리의 서재' 오디오북을 듣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사실 옆지기는 나의 독서 습관을 반기지 않았다. 자연 속에서는 산과 바람에만 집중해야지, 왜 귀에 무언가를 꽂고 있느냐며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이번 산행은 달랐다. 재생한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묵묵히 걷던 남편이 먼저 말을 건넸다.


"그 책 제목이 뭐야? 내용 괜찮네."


결국 우리는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이나 함께 들으며 산을 올랐다.


인류 문명의 진정한 주역은 누구인가

흔히 역사의 주역을 왕이나 영웅, 거대한 전쟁과 제도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은 시선을 발밑의 '식물'로 돌리게 한다. 후추나 차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감자와 옥수수, 고추에 얽힌 비화는 생소하고 강렬했다. 인류의 역사가 인간의 의지만이 아니라, 식물의 매력과 인간의 욕망이 맞물려 흘러왔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충격적이었던 대목은 튤립 이야기였다. 알뿌리 하나가 집 한 채 값보다 비쌌던 네덜란드의 '튤립 광풍'. 사치와 사재기의 원조이자 경제 버블의 시초가 된 이 작은 꽃 때문에 황금시대를 누리던 강대국 네덜란드가 경제적 타격을 입고 세계 경제의 중심지를 영국에 넘겨주게 되었다는 대목에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또한, 감자 보급을 위해 직접 발 벗고 나섰던 엘리자베스 1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일화도 흥미로웠다. 척박한 땅에서 민중의 배고픔을 해결해 준 감자가 없었다면, 지금의 초강대국 미국이나 현대 유럽의 모습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식물을 보살피는 노예가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역설

책은 우리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인간이 식물을 개량한 것일까, 아니면 식물이 인간을 유혹하기 위해 스스로 변신해 온 것일까?"


식물을 가꾸고 보살피는 인간이 실은 식물의 번식을 돕는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문은 신선했다. 13가지 식물에 얽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식물과 인간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의 운명을 주고받으며 함께 진화해 온 동반자임을 깨닫게 된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발치에 핀 이름 모를 풀꽃 하나도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욕망을 자극해 세상을 바꾼 식물들의 생존 전략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진행형일지 모른다. 오랜만에 남편과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산을 내려왔다. 참으로 맛있게 읽은 한 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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