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린스카이 Mar 01. 2023

나의 Ex-스페인 시어머니 9

연애 시작 후 가장 서운했던 날?

그날은 결혼식을 마치고 며칠 뒤 집들이가 있던 날이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방긋방긋 웃으며 결혼식을 마친 저는 정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죠.  12명의 시댁 식구들을 모시고 다니며 밤낮으로 통역을 하던 저는 몸살감기에 딱 걸렸고 열이 38.5-39도를 웃도는 상태임에도 집들이를 취소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 열에 들떠서 뭐라 말을 했는지, 누구와 대화를 했는지도 기억을 못 하고 비몽사몽(非夢似夢) 하다가 먼저 방에 들어가서 뻗어버렸습니다.  열에 들떠서 자다가 목도 마르고 아직도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기에 일어나서 거실로 나와보니 몇몇 스페인 식구들이 와인을 마시며 얘길 하고 있더라고요.  그때 새벽 2시가 넘었었는데 ‘새신랑’의 모습이 안 보여서 어딜 갔냐고 물어보니 시누 셋을 데리고 이태원에 놀러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돌이켜보면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임신초기의 호르몬의 장난이었는지, 그동안 축적된 몸의 피로 탓이었는지, 아님 결혼 직전부터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던 남편 탓인지, 그냥 감기, 몸살로 열에 들떠있었던 거였는지….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객관식 문제의 답 중 마지막 답인 ’all of the above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이겠죠.  아무튼 전 그가 아픈 저를 두고 나가서 놀고 있다는 게 처음엔 믿기질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제 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차오르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전 방으로 다시 돌아가 잠을 청했지만 너무 화가 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네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는 새벽 4시쯤에 시누들과 시끄럽게 떠들며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딱 봐도 꽤 취해 보였죠.  저는 너무나 서운한 마음에 ‘사람이 열이 나고 아픈데 어떻게 나가서 놀다 올 수가 있냐고 따지 듯 물었습니다.  믈론, 저도 알죠… 술 취한 사람은 일단 재우고 다음 날에 얘기하는 게 정답이라는 걸.  하지만, 잔뜩 서운한 임신초기의 아프고 피곤한 새신부는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릴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답니다.  그랬더니 그가 절 보면서 삐딱하게 말하더군요…



 ’ 뭐 죽을병도 아니고 널 집에 혼자 두고 나간 것도 아닌데 왜?!! 나가서 동생들이랑 맥주 좀 마시고 놀다 온 게 잘못이야?’


네.  지금 생각해 봐도 별 말 아니죠.  저한테 욕을 한 것도 아니고… 저도 알아요.  하지만, ‘죽을병도 아닌데 무슨 오버냐?’라는 식의 빈정거리며 하던 말은 비수가 되어 제 맘에 꽂혔습니다.  제가 조금도 불편하지 않도록 입 안의 사탕처럼 굴던 사람이었어요.  연애 초기에 제가 헤어지자고 하니, 한겨울에 길바닥에서 무릎 꿇고 울면서

 ‘너 없인 못 산다’ 던 인간이 결혼하자마자 저를 길가의 쓰레기통 취급을 한다는 게 참… 뭐라 형용할 수가 없는 서글픈 감정이 몰려왔습니다.  ’이게 결혼이라는 건가…‘하는 암담한 느낌이 들었어요.  물론 제가 과장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걸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어요.  소위 ’ 사랑한다면 ‘ 서로 아껴주고 말도 함부로 하지 않는 거라고 ’ 순진하게(?)’ 생각했던 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어요.  새삼스레 생각했죠… ’ 이제까지 내가 사귀었던 남자 친구들이 참 착했구나 ‘라고.  ‘챙겨주는 맘 고마운 줄도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내가 결혼해서 이렇게 벌을 받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날 밤에 현관문 앞 계단에 처량하게 쭈그리고 앉아서 또 펑펑 울었습니다.  달달했던 연애시절과 달라도 너무 다른 결혼생활의 시작에 전 강한 바람에 방향을 잃은 연처럼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인생이 커피처럼 쓰던 어느 날…


작가의 이전글 나의 Ex-스페인 시어머니 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