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 새끼였던 아이의 조용한 연대기)
제 이름은 깜불이였습니다.
아버지께서 화가 나면 늘 외치셨죠.
“불아, 네 불이요!”
그 소리가 동네를 울릴 때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집안의 모든 운명을 내가 맡았구나…’
“전생에 내가 나라를 팔아먹었나”
우리 아버지는 동네에서 가장 큰 어른, 말 그대로 법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마을의 문제는 늘 우리 집 사랑방에서 해결됐고, 사람들은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저 역시 조용히 옆에서 고개를 숙였죠.
반면, 어머니는 한글조차 잘 읽지 못했지만, 남을 돕는 재능만큼은 천부적이었습니다.
거지든 손님이든, 집에는 항상 줄이 길게 서 있었고, 어머니는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도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가 딸을 여섯이나 줄줄이 낳았습니다.
우리 집 출산 소식은 동네 공개 행사처럼, 모든 시선이 우리 집으로 쏠렸습니다.
우리 집은 네 이웃의 담장이 모두 붙어 있는, 말 그대로 사방이 낮은 흙담으로만 열린 집이었거든요.
사람들은 담장 너머로 고개를 길게 빼고
“이번에도 아 가 나올까?”
하며 다음 출산을 기다렸습니다.
더 기가 막힌 건 옆집이었습니다.
거긴 아들만 계속 낳는 거예요.
우리집은
딸딸 딸… 꼭지, 깜불이, 상필이 …
*“이쯤에서 딸은 그만”*이라는 뜻이 다 담긴 이름들이었고,
옆집은
아들아들 아들… 이식이, 삼술이, 말술이, 끝술이 …
*“아들 좀 그만 낳아라”*는 소원이 이름이 된 집이었습니다.
세상 참,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나 싶었습니다.
동네 전체가 은근한 출산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죠.
그 한가운데서 저는 네 번째로 태어난 딸, 깜불이였습니다.
‘다음엔 꼭 아들을 낳게 해 달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이, 제 이름으로 내려앉았습니다.
남장을 하고, 머리를 바짝 하이카라로 깎고, 남자처럼 행동해야 했던 어린 시절.
겉모습만 보면, 누가 봐도 아들이었죠.
최소한 동네에서는 헤어스타일이 성별보다 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길거리에 앉아서 오줌을 누는 모습을 보시고, 아버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습니다.
“자는 와, 사내가 앉아서 오줌을 싸노…”
그 순간, 저는 알았습니다.
아, 아버지가 이제야 눈으로 확인하셨구나.
내가 아들이 아니라는 걸.
그 과정에서 쌓인 실망과 원망,
딸 다섯 없는 살림의 한숨과 체념은
고스란히 깜불이에게 돌아왔습니다.
미움을 받을수록 저는 더 빗나갔고,
어린 시절 내내 **‘가족 미움 전담’**이라는 직책으로 살았죠.
깜불이 덕분에 하나가 아니라 이번에는 딸이 둘이나 태어났다고요.
이름 ‘깜불이’는 결과적으로 완전 실패작이었습니다.
내 다음으로 태어난 딸 쌍둥이 한 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상필이는 아직 살아서 가족 대소사를 똑 부러지게 챙기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저는 정서적 학대 아동, 우울증 고위험군에 속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는 다들 그렇게 크는 줄 알았습니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본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요.
열 살까지 남장을 하고 자랐으니까요.
어린 나에게 선택권이 있었을까요.
50년이 지난 지금도, 고향에 가면 사람들은 제 본명 대신 여전히 저를 깜불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깜불이는 이름이 아니라 제가 버텨온 자리였습니다.
웃기지만, 웃지 않으면 안 됐던 자리.
그래도 이렇게 글로 꺼내 놓으니, 미움도 기억도 모두 가벼워집니다.
다행히도, 깜불이는 아직 잘 살아 있습니다.
이름값 치르기엔 꽤 오래 걸렸지만요.
Note:
오늘 아침 잭옵님의 글을 읽고, 오래 묵어 있던 마음이 살짝 움직였습니다.
‘난장이’가 아닌 ‘자기 자리’로 불리는 이야기 속에서
제 어린 시절 ‘깜 불이’의 기억이 떠올랐고,
미움도 체념도 이제는 이름처럼 받아들이며
조금씩 웃을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또 유호현 님의 글을 통해
브런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되는 공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어느새 한 달이 된 브런치에서
아직은 읽어주는 사람도 좋아요를 눌러주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천천히 써 내려갈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