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부르는 바람
영어에서 방귀가 바람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저는 영국에 온 지 칠 년 만에 알게 되었습니다.
교과서에도 사전에도 없는,
그야말로 ‘진짜 영어’를, 병실에서 배웠지요.
막내를 낳은 뒤 큰 출혈을 몇 차례 겪고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배가 고프기 시작했어요.
아, 살아 있구나.
회복기에 접어들 무렵,
의료진이 제게 던진 첫 질문은 뜻밖이었습니다.
“Have you passed your wind?”
… 바람?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에서
도대체 무슨 바람이란 말인가요.
미역국 한 숟가락도 못 먹고 있는데, 바람이라니요.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바람은 좋고, 미역국은 왜 없나.
바람으로 배라도 채울 수 있으면 좋겠네.
잠시 후 간호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Have you released your gas?”
가스라니요.
내 몸에 송수관이라도 연결돼 있나,
지금 장기가 자격증 시험이라도 치르는 건가.
남은 배고파 죽을 판인데 병실에는 가스와 바람만 공짜로 떠돌았다.
그리고 이어진 설명 한 마디.
“수술 후에는 장이 움직여야 음식을 드실 수 있어요.”
그제야 이해했습니다.
아, 방귀를 트면 밥을 먹을 수 있는 거구나.
평생 하찮게 여겼던 그 흔한 방귀가
그날은 ‘밥 먹는 자격증’이 되었습니다.
머릿속에는 하얀 쌀밥과 미역국이 둥둥 떠다녔고,
엉뚱하게도 ‘춘향이는 이도령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같은 생각까지 불쑥 스쳤습니다.
그 기다림은 새벽에 끝이 났습니다.
소리보다 먼저, 느낌으로.
몸속 어딘가에서 미세한 신호가 스르르 올라오자
저는 반사적으로 침대 옆 호출 버튼을 내리치듯 눌렀습니다.
“가스… 나왔어요.
이제 밥 먹어도 되죠? 저 밥 좀 주세요”
요란한 부저 소리에 놀라 달려온 간호사.
하지만 제 경상도 억양 속 ‘가스’는
그녀의 귀에는 ‘까스’로 들렸나 봅니다.
손짓과 발짓, 표정과 몸짓까지 총동원한
즉석 마임 설명 끝에야
겨우 식사 허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앞에 차려진 것은?
“한 잔의 티, 그리고 마른 토스트 두 조각.”
이게 밥인가,
시험 통과 기념품인가.
서러움을 삼키며
나는 꾸역꾸역 토스트를 씹었습니다
메마른 빵 조각이 목구멍을 넘어가면서
허기가 조금씩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 졌습니다
출산 후에는 미역국이 있어야 한다고,
몸을 돌보는 최소한의 예의라며 웃던
엄마의 얼굴이.
그날 병실에는 미역국도, 엄마도 없었습니다
다만 ‘방귀로 밥을 허락받는 나라’라는
새로운 규칙뿐이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남편이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나는 오늘 배운 생활 영어를 줄줄이 쏟아냈지요.
방귀가 wind이고,
그 wind가 gas라는 사실까지.
그리고 화가 나서 따졌습니다.
“아니, 내가, 방귀가 바람인 줄 어찌 알겠노!
당신이 말해준 적 있었나?”
그런 말 한 적 있느냐고!
남편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습니다.
“바람처럼 시원한 방귀 말이야.
에이, 이 사람…
우째 여태 그 맛을 몰랐을꼬?”
그러곤 장난스럽게 외치더군요.
“자, 잠깐만!
1, 2, 3… 발사!”
그 순간이었습니다.
정말로 바람처럼,
인생에서 가장 정직하고 시원한 한 방이
지나갔습니다.
아, 나는 다시 돌아왔구나.
내 뱃속 장기들이 폭죽처럼 나를 축하하고 있구나.
살았다고,
이제 다시 먹어도 된다고.
아주 소박하지만
분명한 생의 확인이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언어는 머리로만 배우는 게 아니라는 걸.
어떤 단어들은 사전에 없고,
어떤 문장들은 몸이 먼저 말해준다는 걸.
영어보다 먼저,
문법보다 정확하게
내 몸은 타국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우습고도 진지한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아, 방귀로도
세상을 정복할 수 있겠구나.
하찮다고 여겼던 작은 방귀 하나가
낯선 병실에서 밥을 불러내고,
외로움 속에서 웃음을 끌어내며,
타국에서의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신호가 되다니.
방귀 한 방이면
밥도 얻고, 웃음도 얻고,
살아갈 자격도 다시 얻는 나라라면
생각보다 영국, 꽤 괜찮은 곳 아닐까요?
그날 이후로 저는 압니다.
타국에서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건
완벽한 영어도, 대단한 용기도 아니라는 걸.
필요할 땐
제때,
당당하게
바람 한 번 내보낼 줄 아는 배짱.
그게 바로
제가 몸으로 먼저 배운
진짜 영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