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이 아니라 유예

(대학생활 시즌 1 완결 - 살아남은 자의 작은 안도)

by 류정uk


재시험 합격자 명단 앞에서 나는 숨을 참고 서 있었다. 종이 한 장이 사람을 이렇게 작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이름들은 알파벳 순으로 정렬되어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내 자리를 찾고 있었다.

기쁨을 기대했지만, 이름을 발견했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환희가 아니었다.


‘아… 일단 끝나지는 않았구나.’


합격은 축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예였다.

탈락이 아니라는 확인, 다음 학기에도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허가서.


무릎의 힘이 조금 풀렸고, 대신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잘 해냈다는 자부심보다, 아직 살아 있다는 안도감이 먼저였다.

물론 커피값은 여전히 비싸고, 합격해도 할인은 없었다.


여름을 지나 2학기 개강 날, 나는 다시 강의실 문을 열었다.

교수도, 칠판도, 자리 배치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오직 나 하나, 아니 정확히는 나의 마음이었다.


한 번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아주 작은 여유를 만들었다.

문제는 여전히 어려웠고, 일정은 여전히 빡빡했지만, 전처럼 쉽게 절망하지는 않았다.


‘아, 또 이 패턴이구나.’


아이의 시간표와 과제, 발표 준비, 끝없이 이어지는 일정은

여전히 정교하게 맞물려야만 굴러갔다.

조금만 삐끗해도 금세 무너질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알았다.

나는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완벽하지 않아도, 느려도,

나는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내 대신 커피 한 잔 올려주면 안 될까.”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와중에도 휴게실 커피가 그리웠다.

아니, 꼭 커피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손에 쥘 수 있는, 작고 달콤한 위로 하나면 충분했다.


그 상상만으로도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굽은 길,

핸들을 잡은 손은 예전보다 덜 떨렸다.

불안은 여전히 곁에 있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합격은 끝이 아니라 연장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연장선 위에 서 있다.


아직 가는 중이다.


기적처럼 누군가 커피를 올려주지 않아도,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내 몫을 해낼 것이다.


느려도, 흔들려도,

끝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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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께 드리는 감사의 글


‘대학 생활 시리즈 1’을 여기서 마칩니다.

1월 1일에 시작해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돌이켜보면, 한 시절을 다시 걸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을 함께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라이킷과 댓글 하나하나가 조용하지만 분명한 힘이 되었습니다.


다음 시리즈 2에서는

일본 유학부터 졸업까지의 과정을 정리하려 합니다.

낯선 환경에서 배우고 적응하며 방향을 찾았던 시간들입니다.


그 이후에는 조금 더 긴 흐름의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 마흔에 졸업한 뒤 런던 시티에서 보낸 10년,

금융의 현장에서 배운 투자와 영업, 그리고 사람에 대한 이해

• 20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 영국에서의 부동산 투자와 임대 사업 이야기

• 지구를 몇 바퀴 돌며 만난 사람들과, 길 위에서 배운 것들


특별한 성공담이라기보다,

선택과 책임, 시행착오와 지속의 기록에 가까울 것입니다.


당분간은 여행과 일상 이야기를 가볍게 올리며 숨을 고르겠습니다.

조금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이어가겠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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