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의 저주
얼굴을 가린 낡은 복면은 낡다 못해 거의 삭아 내렸고, 가장자리는 너덜너덜하게 해어져 있었다. 그러나 복면 아래에서도 몇 가지 특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말라붙은 잡초처럼 회색빛 갈기가 군데군데 삐져나와 있었으며, 턱 아래로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길게 뻗어 나 있었다. 긴 시간이 흘러 갈기는 숨이 죽고, 이빨은 누렇게 닳아버린 듯했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야수의 흔적을 강하게 남기고 있었다. 그 아래로, 무언가를 양손으로 소중히 감싸고 있었던 듯한 자세가 눈에 띄었다. 손가락마디는 한참 전에 굳어버린 듯 굽은 상태로 얼어붙어 있었고, 그 손 안쪽에는 형체를 잃어버린 채 남겨진 알 수 없는 편린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거대한 존재가 죽기 직전까지도 단단히 쥐고 놓지 않으려 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아로스와 시즈는 눈앞의 수수께끼의 수인이 단순한 유해로 남아 있는 것인지, 혹은 무언가에 사로잡혀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존재가 영겁의 세월 동안 이 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자는 대체... 누구죠?"
시즈가 혼잣말을 하는 순간, 라그나르가 목상이 있는 전당에 들어섰다. 그는 눈앞의 유해를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버렸다.
불타버린 흔적의 로브. 복면에 가려진 얼굴. 그 아래로 길게 자란 회색빛 갈기와 닳아버린 송곳니.
잊고 있던 오래전 기억이 진흙탕 속에서 끌려 나오듯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대지가 뒤흔들리고, 새빨간 불꽃이 온 세상을 집어삼키던 순간.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사지를 묶인 채 심판대에 오른 이들이 세상의 이면으로 추방하던 그 순간.
역사 속에서 이름조차 지워져 버린 죄인들. 그들 중 하나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루드레스.
생명의 거인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몰아넣었던 사자.
"누구인지... 아시나요?"
시즈의 물음에 라그나르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답하기를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긴 탄식을 토해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루드레스. 모르티아와 함께, 그날의 심판대에 오른 사자들 중 하나입니다."
라그나르는 복잡한 시선으로 유해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마주한 존재의 차갑게 식어버린 주검을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루드레스 앞에 놓인, 부러진 거대한 대검으로 향했다. 검신의 절반 이상이 부러져 나간 채 손잡이와 일부의 날만이 남아있던 대검의 깨진 단면은 거칠고 들쑥날쑥하게 갈라져 있었으며, 세월 속에서 녹이 스며들어 금이 간 틈새마다 어둡고 거친 청록빛이 얼룩져 있었다.
아로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칼자루에 그려진 문양들을 어루만졌다. 뿌리에 감싸인 듯한 기묘한 마름모의 형상이었다.
"...이 문양, 어디서 본 것 같습니다."
시즈도 대검에 가까이 다가가 함께 그 문양을 살피자, 라그나르가 문양을 확인하는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이미 이 문양을 알고 계시는 듯하군요."
"오미누스가 가지고 있던 칼날에도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지닌 칼날이 바로 이 검의 일부일지도 모르겠군요."
칼자루의 문양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확신하는 아로스의 말에 라그나르는 천천히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검붉은 하늘과 거센 장기가 뒤섞인 바람이 휘감아 도는 평원과 늪을 아무렇지 않게 횡단하던 존재. 생명이 기피하는 죽음의 땅을 태연히 가로지르는 모습으로 죽음을 거니는 자, 오미누스라는 이름이 붙은 인간. 그는 정말로 이 깊은 심연의 바닥까지 발을 들이기라도 했던 것일까. 만약 오미누스가 루드레스의 잃어버린 파편을 쥐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알 수 없는 운명이 불러온 필연일까. 죽음을 거니는 자와 죽어서까지 무언가를 지키고 있던 자.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시간의 간극이 무색할 만큼, 보이지 않는 인연의 실타래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서로를 향해 얽혀 있는 듯했다.
순간, 라그나르의 뇌리 속에서 조각난 편린들이 맞춰지듯 이곳을 지나쳐온 풍경들이 하나로 맞물렸다. 심연 깊숙이 내려온 세계수의 뿌리들, 그 뒤틀린 생명력을 빌려 세워진 교회와 자애로운 여인의 형상을 띈 목상. 그리고 그 발치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무릎 꿇고 있던 루드레스의 유해까지.
그제야 모든 기이한 정경들이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기 시작했다.
속죄.
심연의 어둠마저 집어삼키지 못한 채 오직 시간만이 겹겹이 덧씌워진 이곳에서 루드레스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참회를 홀로 쌓아 올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놓지 못했던 그 편린은 오미누스를 이곳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고리이자, 루드레스가 남긴 마지막 의지였을지도 몰랐다. 오미누스가 품은 수수께끼가 이 죽은 사자의 유해와 진정 맞닿아 있는 것이라면... 이곳은 단순한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의 시작점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이곳에 남겨진 것들을 보면... 루드레스는 단순히 죽음을 기다린 것이 아닌 끝없는 속죄를 이어온 듯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참회였을지는 확신을 할 수가 없군요."
세 사람은 그저 유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시즈의 목소리가 긴 정적을 깼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여기도 심연의 깊은 곳 중 하나일 텐데... 유독 이곳에는 심연의 생물들이 보이질 않아요."
그 말에 라그나르와 아로스가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래로 뻗은 길, 그들이 지나온 공간, 그리고 오래된 목재 벽면의 사이로 이어지는 균열들. 그러나 어디에도 심연의 생명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시즈의 말대로 이곳은 보이지 않는 힘이 모든 생명을 밀어내 버린 것처럼 너무나도 조용했다.
"심지어, 이곳의 입구 역시 숨겨져 있었죠. 엘리샤 님의 뒤로 이어진 막다른 벽을 경계로 오랜 세월 동안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말이에요."
"그것도 아니라면, 이곳에 있던 것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했던 것일 수도......"
"...혹시."
시즈는 다시 한번 루드레스의 유해를 바라보았다.
손바닥 위에 남아있는 알 수 없는 편린들. 어쩌면, 기사들이 루드레스가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가져가기 위해 억지로 손을 펼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우로라의 기사들이... 이곳을 다녀갔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법합니다."
아로스도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이 이곳을 발견하고, 루드레스가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가져간 뒤 아우로라로 돌아가는 길에 모르티아와 마주쳤다......"
"하지만, 저희가 본 그대로라면... 기사단은 저 위에서 전부 몰살당했습니다."
숨겨진 벽을 통해서 이곳으로 내려오기 전, 공터를 가득 메우고 있던 기사들의 시체들. 처참하게 꿰뚫리고, 찢기고, 잠식된 채 훼손된 마지막 순간들.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기사단이 루드레스가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가져가는 과정에서 전멸당한 것이라면......"
시즈는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흩어진 단서들을 짜 맞추었다. 만약 기사들이 이곳에 먼저 당도해 루드레스가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손에 넣은 것이라면 모든 비극의 인과가 선명해졌다. 그것을 회수해 돌아가려던 기사단과 결코 그것을 내어줄 리 없는 모르티아 사이에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 분명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의 의구심이 계속 맴돌았다.
"......만약, 정말 만약에... 그 과정 속에서 누군가가 살아남았다면요?"
시즈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라그나르와 아로스가 동시에 바라보았다.
"환시 속에서 엘리샤 님이 누군가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죠."
어서가! 빨리!!
그 목소리가 다시금 시즈의 귓가를 때렸다.
"저희가 봤던 시체들 중 누군가에게 외친 것이 아닌... 엘리샤 님이 필사적으로 모르티아에게 막아서면서 누군가를 보호하려 했던 것이라면......"
"진실을 알고 싶다면... 또 한 번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라그나르의 말에 아로스는 품속에서 환시의 등불을 꺼내 들었다. 세 사람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남은 것은, 과거를 바라보는 것뿐.
"...시작하겠습니다."
환시의 등불이 깜빡이면서, 작은 떨림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하지만 규칙적으로 타오르던 불빛은 이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마치, 순간적으로 빛이 꺼지려는 듯이 발작적으로 깜빡였다.
"...뭔가 이상합니다."
아로스는 당황한 듯이 중얼거렸다. 등불의 빛이 불안정해지는 것은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지만 지금처럼 심하게 요동친 적은 없었다. 불규칙하게 일렁일수록 주위의 공기까지 함께 떨리는 듯했다.
그리고—
피이잉———
거부의 파동이 터졌다. 강렬한 힘이 공간을 휘감으며 교회 내부를 한순간 뒤흔들었다. 발밑의 대지가 떨리고, 무너진 기둥 사이로 붉은빛이 서서히 스며 나오더니 거대한 불길이 폭발했다. 순식간에 터져 나온 진홍빛 화염의 거칠고도 강렬한 불길은 바닥에서부터 치솟으며 벽을 타고 번졌다.
"이건......!"
바트라의 불꽃. 분노한 신이 내린 심판의 불길.
불길은 한순간에 공간을 삼키듯 퍼져나갔고, 교회의 기둥과 천장이 속절없이 붕괴되었다. 라그나르는 손끝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오래전 자신을 집어삼킬 뻔했던, 세상을 불태운 재앙의 화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되살아날 만큼 강렬한 불꽃이 눈앞에서 다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길 속에서, 두 개의 빛이 동시에 빛을 발했다. 루드레스의 손안에 있던 편린과 환시의 등불이 다시금 불타오르듯 강렬한 빛을 머금으면서 서로를 향해 일렁였다.
마치 하나가 다른 하나를 깨우듯,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듯, 두 빛은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모르티아는 갑작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단순한 파동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비명을 지르며 찢어지는 듯한 불길한 공명이 세계수를 거칠게 훑고 지나갔다. 그녀의 발밑, 심연 전체가 거대한 짐승처럼 경련하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지?"
낯익은 기운이었다. 이곳 심연에서는 결코 느껴질 수 없는, 증오스러울 만큼 익숙하면서도 익숙해질 수 없는 화신(火神)의 기운. 주변의 어둠이 서서히 뒤틀리면서 보이지 않는 힘이 균열을 만들어내듯 공간을 흔들었고, 그 기운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모르티아의 발아래 심연이 갈라졌다. 순식간에 검은 바다가 요동치듯 뒤틀리며 깊은 균열이 만들어졌고, 그 속에서 그녀의 의지에 호응하듯 거대한 뿌리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촉수처럼 뒤엉킨 뿌리들이 허공을 휘감으며 움직이자 모르티아는 주저 없이 그 위로 뛰어올랐다. 마치 자아라도 가진 듯 뿌리는 모르티아를 태운 채 위로 솟구치며 거대한 뱀이 모래밭을 파고들 듯 무자비하게 주변을 헤집었다. 땅이 찢어지고, 심연의 생물들이 찢긴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광경은 이동이라기보다는, 심연을 무너뜨리며 나아가는 것에 가까웠다.
무섭게 심연의 대지를 헤집던 거대한 뿌리는 어느새 교회 근처까지 도착했고, 교회를 등진 벽을 뚫어버리며 거칠게 돌진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과 함께 엘라마의 형상을 본뜬 목상이 산산이 부서졌다. 거칠게 깨진 조각들은 붉게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떨어졌고, 동시에 모르티아가 그 중심에 착지했다.
뿌리를 타고 당도한 곳은 진홍빛 불꽃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공간 전체가 타들어 가는 듯한 맹렬한 열기 앞에 모르티아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바트라의 불꽃.
온몸이 떨렸다. 찰나의 순간, 무너져 내리는 공간이 과거의 기억과 겹쳐졌다. 불타오르는 하늘과 무너져가는 문명, 화마에 휩쓸려 잿더미로 변해가는 대지.
절망과 비명이 가득했던 그날의 잔영이 시야를 침범했다. 세상을 집어삼키며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것을 태워버린 심판의 불길. 그 불길 속에서, 모르티아는 산 채로 진홍빛 불꽃에 휩싸여 심연으로 추락했다.
"...망할."
모르티아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과거를 되새길 때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앞을 바라보자, 불길 속의 무너진 제단 앞에서 익숙한 형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딜 갔나 했더니."
그 모습에 모르티아는 독기 어린 비웃음을 흘렸다. 불길이 춤추듯 일렁이는 가운데, 천천히 아래로 걸음을 내디뎠다.
"꼴에 여기서 속죄라도 하고 있었던 건가?"
그녀의 시선이 사자의 유해를 가로질르는 순간, 무릎 꿇고 있던 몸이 움직였다.
"——!"
가면 아래의 모르티아의 하관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죽은 사자의 시체가, 재가 되어 부스러져야 했을 그 잔해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텅 빈 구멍 같은 시선이 모르티아를 바라보았다. 이미 죽어 먼지가 되어 사라져야 할 존재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잊지 못한 원한을 담은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는......"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그것은 마치 영겁의 세월을 묵은 석관이 열리는 듯, 깊은 곳에서 무너지는 울림이었다.
"...결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타오르던 불길이 한순간 숨을 죽인 듯 공간 전체가 절대적인 정적에 잠겼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이 다 된 듯 무너져 내린 루드레스의 형체는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저주만이 붉은 불꽃 속에서 메아리처럼 남아 바람에 쓸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