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서약 (1)

폐허 위의 도시

by 이샤라
...세상이 불길에 잠겨 비명을 지르던 날, 구원을 찾아 하늘을 우러르는 이들 사이에서 홀로 빛을 등지고 어둠을 마주한 눈동자가 있었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목소리에 홀려 닿아서는 안 될 금기를 엿들은 최초의 청자(聽者). 모두가 그를 미치광이라 손가락질하며 역사 밖으로 추방했으나, 그가 남긴 흉흉한 그림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어딘가에서 숨죽이고 있을 뿐이다...

고서(古書), '최초의 이단자' 편 中



찢겨진 서약



진홍빛 불길은 맹렬한 기세로 번지면서 교회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불꽃을 바라보던 모르티아는 깊은 불쾌함을 느꼈다. 불길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역겨운 기운으로 인해 입매가 서서히 굳어졌다. 불길 속에서 느껴지는 잔재는 주변의 불길로 인해 미약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숨통을 끊어 놓았던 자매가 애완동물 마냥 소중히 품고 다니던 짐승의 기운.


"...그 더러운 잡종이 아직도 살아있었을 줄이야."


혼잣말과 함께 가면 아래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카야와의 마지막 격돌 속에서 그 잡종은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지만, 오히려 모르티아는 그 본능적인 공격을 이용해 정신을 빼앗았다. 이성을 잃은 짐승은 제 주인을 물어뜯기 시작했고, 모르티아는 주저 없이 혼란에 빠진 자매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가 쓰러지자, 놈 역시 함께 무너졌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렇게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 잊혀져야 할 기억이 또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모르티아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카야가 죽은 이상, 그 버릇없는 짐승은 주인을 잃은 개처럼 함께 사라졌어야 했다. 그랬어야 할 놈이 이곳까지 기어들어왔다는 사실이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모르티아가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그때, 뒤에서 그리즈마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는 불꽃에 휩싸인 교회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광경이군. 네가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줄이야."


평소라면 비아냥으로 받아쳤을 모르티아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곳에서 내 자매의 잡종 냄새가 나."


그녀의 말을 끝으로, 불길 속 잔향을 맡던 그리즈마의 미소가 가면이 벗겨지듯 사라졌다. 온몸이 순간적으로 긴장하면서 몇 달 전 목숨을 잃을 뻔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타리안 성채 아래에서 있던 격렬한 싸움. 바르그를 몰아넣고 있던 그리즈마는 승리를 눈앞에 두었고, 다음 순간이면 놈을 끝장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온 늑대 인간의 맹렬한 난도질에 왼팔을 잘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허점이 생기자 거대한 늑대는 빈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목을 물어뜯었고, 그 순간 죽음이라는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그날의 상처를 기억하고 있던 그리즈마는 속으로 깊은 분노를 삼켰다.


"그 늑대 인간이... 이곳에 있었단 말이지."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그리즈마의 말에 모르티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을 안 들으면 사지를 전부 찢어버려도 좋으니... 목숨줄만 붙여서 데려와."


얼음장보다도 차가운 모르티아의 말에, 그리즈마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위로 길게 찢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아로스는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빛이 터져 나오기 직전까지 심연의 밑바닥에 있었는데, 어떻게 다시 무저갱의 입구로 돌아온 것인가?


"무녀님, 방금 전까지 분명......"


낮은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시즈와 라그나르도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다. 쓰러져 있는 거인들은 이전처럼 되살아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돌아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왔을 때와는 뭔가 다른—"


말을 끝맺기도 전에, 무언가가 무저갱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무저갱의 어둠이 한층 더 짙어진 형태로 그들을 따라온 듯 기어 나왔다. 기운은 이전과는 달랐다. 마치 살아있는 심연이 심장을 조여 오는 듯 더럽고 끈적하게 감돌았다.


"...저희가 떨어졌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하게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아로스가 무의식적으로 등불을 쥐자 불안정한 빛이 손가락 사이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등불이 편린과 공명한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자신들을 이곳으로 되돌려 놓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돌아온 자리는 익숙한 공간이 아니었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군요. 서둘러 빠져나가야겠습니다."


세 사람은 짧은 시선을 주고받으며 곧장 신전의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으나, 서둘러 빠져나온 바깥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어림잡아도 백 기수는 넘어갈듯한 사냥꾼들과 혼종들이 광기에 휩싸인 채 신전 주변을 날뛰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서는 이성이라고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뒤틀린 사지가 허공을 휘젓고 있었고, 비틀거리는 동작 사이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날이 선 살의와 미친 듯한 갈증이었다.


바람이 스치자, 코를 찌르는 짙은 부패의 냄새에 무언가 섞여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죽음과 핏방울이 엉긴 그 냄새에 라그나르는 코끝을 찌푸리며 날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오리엔 요새로부터 피 냄새가 진동하는군요."


그 순간, 울부짖음 하나가 허공을 찢었다.


혼종 중 하나가 그들을 포착한 것이다. 짐승의 울음이 전염처럼 번져나가더니 곧 모든 광기들이 고개를 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들이 일제히 신전을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라그나르가 다급하게 외치며 몸을 틀자, 아로스와 시즈가 빠르게 신전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으로 뛰어든 시즈는 곧장 몸을 돌려 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일어나면서 벼락과 함께 신전의 아치가 폭음과 함께 붕괴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무너진 입구의 틈 사이로 찢어진 가죽과 뼈가 뒤엉킨 발톱과 뒤틀린 주둥이들이 들이밀려오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혼종들의 숨소리가 으르렁이며 이어졌고, 그들은 발악하듯 잔해를 헤집고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신전의 바닥 틈 사이로 번져 들었다. 바람결에 실린 이질적인 기운은 일전보다 훨씬 더 짙고, 더욱 독해져 있었다. 마치 맹독처럼 퍼져가는 어둠의 기운에 스친 석조 기둥이 서서히 썩어 들어갔고, 그 기운은 시즈의 보호막 마저 침식하여 천천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동안 봐왔던 독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더 지체하면 위험합니다!"


아로스가 두 사람을 안쪽으로 밀어내며 외쳤다. 퇴로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신전의 입구는 이미 붕괴되었고, 뒤에서는 독한 기운이 한층 더 거세게 밀려오고 있었다.


"신전 안쪽으로 가면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지도 몰라요!"


시즈의 의견에 모두가 망설임 없이 신전의 내부로 방향을 틀었다. 폐허가 된 통로는 붕괴된 구조물과 어둠으로 가득했지만 그들은 마치 숨구멍을 찾듯 신전 안쪽 어딘가에 남겨진 길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어둠 속을 더듬으며 신전 내부 깊숙이 파고들자, 좁고 뒤틀린 통로는 마치 오랜 세월 속에서 지반과 함께 주저앉은 것처럼 기울어져 있었다. 부식과 균열로 허물어져 내린 벽면의 바닥에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시민들로 보이는 시체들이 문드러진 채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공기는 점점 더 축축하고 무거워졌고, 숨소리조차 벽에 닿아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무너진 신전의 지반이 깊은 어둠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감추었던 무언가에 다가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


아로스의 발끝이 허공을 스치더니, 그의 몸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쏠리면서 돌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몸이 쏟아지듯 기울어진 틈으로 미끄러지면서 비탈진 석벽을 따라 굴러내려 가다 아래로 떨어지듯 추락했다.


차가운 돌길 위로 몸이 내던져졌다. 뼈를 울리는 충격과 함께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귀공!"


"괜찮으십니까!?"


시즈와 라그나르가 다급히 몸을 숙이며 외쳤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위쪽에서 떨어진 균열 사이로 희미하게 울렸지만 아로스는 별 탈 없이 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저는 괜찮습니다!"


흙먼지가 갑옷과 옷깃을 덮었지만 상처는 없었다. 아로스는 숨을 고르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 어둠을 향해 손짓했지만 뒤이은 광경에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천장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깊고 광활한 공동은 단순한 동굴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시야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폐허 위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하 도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석재로 지어진 날카로운 첨탑들이 질서를 유지하며 우뚝 솟아 있었고, 음영 진 건물들은 그림자의 장막에 감싸인 채 흐릿하게 번져갔다. 공기 중에는 습기를 머금은 눅눅한 암내와 지하수의 비린내가 어렴풋이 감돌았으며, 연분홍빛과 연보랏빛이 뒤섞인 은은한 인광이 도시 곳곳을 유령처럼 보듬고 있었다. 그러나 아로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도시 그 자체가 아닌, 검은 도시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반 아래에 깔린 또 다른 폐허였다. 검은 석재로 이루어진 위쪽 도시와 달리, 바닥에 깔린 잔해들은 세월에 풍화되어 하얗게 바랜 고대 양식의 건축물들이었다. 마치, 오래전 지층 아래로 파묻혀 사라진 고대 문명의 시체 위로 새로운 문명이 기생하듯 태어나 숨 쉬고 있는 기이한 형상이었다.


잠시 후, 위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라그나르가 시즈를 안아 든 채 무너진 경사면을 타고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왔다. 먼지를 털며 일어선 두 사람도 시야에 들어온 전경을 마주한 순간 걸음을 멈췄다.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라그나르의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그의 시선 또한 검은 도시 카타디오를 넘어, 그 아래를 떠받치고 있는 하얀 폐허들에 고정되었다.


익숙했다. 아니,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곡선의 기둥, 자연과 어우러지던 백색의 의장들. 그것은 분명 자신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는 문명의 잔해였다.


아르보르.


불의 심판과 함께 사라졌던 수인들의 고대 도시. 지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그 찬란했던 유산 위로 이 끔찍한 지하 도시가 세워져 있을 줄은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다.


충격에 휩싸여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라그나르를 향해 시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곳이... 전에 말씀하셨던 그 도시인가요?"


라그나르는 도시에 시선을 둔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멸망한 도시 카노라스의 발밑에 이토록 거대한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그가 마주했던 기록 속 계획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기반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거대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봤던 것은... 그저 이 도시의 단편이었을 뿐이군요."


아로스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가까워 보이는 도시 외곽 근처에는 내부로 이어지는 듯한 굽이진 골목들이 겹겹이 얽혀있었다.


"일단은 내려가야겠습니다."


세 사람은 절벽의 경사진 바위턱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발밑의 바위는 오래된 균열의 마모와 이끼로 매끄러웠고, 잘못 디디면 바로 아래의 갈라진 깊은 틈으로 곧장 추락할 수도 있었다. 아로스가 앞장섰고, 시즈가 도움을 받으며 뒤를 따랐다. 라그나르는 마지막으로 위쪽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따라붙었다. 내려가는 길은 좁고 어두웠으며,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위 틈새로 먼지가 일었다.


잠시 후, 도시 외곽의 음영에 닿자 세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입구 쪽에 기척이 있습니다."


라그나르의 시선이 골목의 어귀를 꿰뚫었다. 기둥이 무너진 채 방치된 한 건물의 그림자 아래, 검은 후드를 눌러쓴 사람 두 명이 서로 다른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감시자들이었다. 도시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저들 사이를 지나야 만 했다.


"...정면은 어렵겠어요."


"네. 놈들에게 들키는 순간 바로 경보를 알릴 것입니다."


그때, 시즈가 앞으로 나섰다. 손끝을 모으던 그녀는 짧은 호흡을 뱉으며 속삭였다.


"은폐 주문을 써볼게요. 다만, 움직임이나 소리를 완전히 숨기진 못하니 조심해서 움직여야 해요."


시즈의 손바닥에서 푸른빛 입자가 부유하기 시작했다. 빛이 천천히 휘어지면서 세 사람의 몸이 어둠과 중첩되며 흐려졌다. 형체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그 외곽이 허물어진 풍경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라그나르가 먼저 발을 디뎠다. 바위 아래의 어둠 속으로 스며든 세 사람은 숨소리와 발소리를 최대한 낮추며 그림자의 틈을 타고 골목을 지나 입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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