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서약 (2)

그림자의 잠식

by 이샤라

입구를 지나 좁은 통로를 빠져나온 세 사람은 바닥에 깔린 이끼와 흙먼지를 밟으며 조심스레 몸을 낮췄다. 외곽보다 더 깊은 어둠으로 덮여 있던 골목의 안쪽 건물의 윤곽은 음영 속에서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생각보다 길이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군요."


아로스가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선 곳은 마치 도시의 등줄기를 따라 연결된 교차로였다. 왼편으로는 반쯤 무너진 아치형 회랑이, 오른편으로는 좁고 구불진 계단이, 앞쪽으로는 바닥이 기울어진 작은 광장이 어렴풋이 보였다.


"라그나르 경, 도시의 중심부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도시로 들어왔던 길은 어느 협곡에서 시작됐습니다."


"아까 절벽 위에서 도시를 봤을 때, 북서쪽으로 연결된 배수로 구조를 봤던 것 같습니다. 거리가 조금 있긴 했습니다만... 배수로를 따라가면 외곽으로 연결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쪽으로 가면 도시 중심은 피할 수 있겠네요."


시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배수로라면 인파도 다른 곳에 비해 적을 테고, 감시도 느슨할 가능성이 있어요."


라그나르는 각각의 교차로를 향해 감각을 곤두세웠다. 오른쪽의 계단 위쪽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아주 짧게 울렸다. 여러 명이 지나치는 그 걸음은 한 자리에서 오래 머물지는 않은 듯했지만 누군가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정면 광장 방향에서는 낮은 대화와 함께 일정한 리듬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적잖게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반면, 왼편 회랑 쪽은 조용했다. 기척도, 말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회랑을 이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쪽이 가장 인파가 적은 것 같군요."


라그나르가 짧게 답하며 앞장서자, 시즈가 마력의 흐름을 살펴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말없이 방향을 틀은 뒤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워진 왼쪽 회랑을 향해 발소리를 조심스레 감추며 이동했다.




카타디오에서 멀리 떨어진, 노크투르 요새 깊숙한 곳.


숨조차 들지 않는 정적 속, 금속 반사판 아래로는 그림자들이 멈춘 맥처럼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비디아의 조각 같은 손은 정제된 손놀림으로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붓끝은 낡은 양피지를 물들였고, 검붉은 잉크는 아직 마르지 않은 채 잔열을 품고 있었다. 그가 적은 단어는 반복적이었다.


'불응'.


'붕괴'.


'조직 열화'.


그리고 '거부 반응'.


비디아가 천천히 한숨을 뱉었다. 그 숨에는 피로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검증되지 않은 시간만이 담겨 있을 뿐.


"이 정도로는...... 여전히 어림도 없겠군요."


의식대 위에 반쯤 덮어둔 시신을 다시금 바라보던 비디아는 낮게 중얼거렸다. 검은 액체가 파고들었던 흔적은 흩어진 지 오래였지만, 그 흔적 하나하나를 더듬는 손길은 문제의 원인을 찾는 과학자처럼 조심스러웠다.


"너무도 나약해. 이 정도로는... 그분의 군대가 되지 못합니다."


비디아의 시선은 천천히 빛없는 등불로 향했다. 방 안을 감싸고 있던 무채색의 장막 아래, 무언가 굳건히 깃들어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당신이 하신 말씀... 서쪽 대륙의 아래, 의식을 위한 전당을 준비하란 그 뜻을... 저는 곧장 이해했습니다."


홀로 중얼거리던 비디아는 성배를 닮은 투명한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묘하게 일렁이는 검은 액체가 살아 있는 듯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었다. 형체 없는 열망이자 혼돈 그 자체였고,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뼈를 갖추고 살을 틔울 끔찍한 씨앗이었다.


비디아는 깊은 심연의 고동이 울리는 듯한 착각 속에서 잠시 정적에 귀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파도의 악마들은 붕괴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쥔 신념은 너무 엷었고, 대부분의 틈새의 존재들은 그분의 의지에 저항할 뿐이죠. 제멋대로인 데다... 굉장히 이기적이니까요. 그래서 필요합니다. 죽음을 거니는 자와 같이 심연과 지상을 잇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들. 그렇게 오로지 복종만으로 움직이는 군대가 완성된다면... 그분께선 더 이상 침묵하시지 않겠지요."


비디아는 손으로 병의 목을 감싸며 그 안의 미세한 진동을 느꼈다. 병 안에 가득 담긴 검은 액체는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서서히 굽이쳤다.


"지금까지의 모든 실패, 이곳에서 흘린 수많은 형체와 이름들... 그건 전부 시행착오였을 뿐입니다."


그 말과 함께, 비디아의 시선이 아주 짧게 멈췄다. 기억 속 한 장면. 가장 최근, 가장 강렬했던 무녀의 기척.


"하지만 이제 그녀가 있습니다. 그녀는 달라요. 누구보다도 강대한 무녀. 푸른 눈동자 아래 모든 가능성을 품은 마지막 계승자."


비디아는 문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무언가에게 기도하듯, 아니, 명확한 뜻을 증명하려는 신도처럼, 정갈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분의 전당은... 그녀의 마지막 숨결로서 완성될 것입니다."


정적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침묵은 아까 전과는 다른 밀도로 조금씩 뒤틀리고 있었다. 공간 깊은 곳, 결계의 층을 따라 퍼져 있는 그림자의 흐름. 그 안에서 아주 미세했으나 결코 익숙할 수 없는 결의 떨림이 감지되었다.


처음엔 실금처럼 작았다. 어딘가 어긋난 그 실루엣은 얼마 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제단을 스쳐갔던 침입자의 것과는 다른, 보다 선명한 이물감이었다. 그 감각을 느끼기 위해 비디아는 그대로 몸을 돌려 실험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노크투르 요새는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었지만, 적막은 이제 더 이상 완전하지 않았다.


비디아는 벽에 손을 댔다. 차갑고 검은 벽돌은 그의 감각을 따라 미세하게 진동했다. 손바닥 아래로 파문처럼 퍼져나가는 그림자의 맥락. 그것은 마치, 자신의 장막 안에 누군가의 '숨'이 들어온 것 같은 감촉이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생생하군요."


그림자들은 아직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흐름 속에서 '그들'의 성질만큼은 확실히 달랐다. 감히 자신의 세력 안에 발을 디딘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비디아는 천천히 가면 뒤에 감춰진 눈을 감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카타디오 전체에 뻗어 있는 자신의 감각을 정제해 냈다.


하나, 둘, 셋.


그림자가 움직였다.


도시 중심부, 관문, 주거 지구.


그림자들은 그의 명령을 받지도 않았건만, 본능처럼 방향을 틀어 하나의 지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비디아의 입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숨으려 했군요."


그 순간, 피부를 타고 스치듯 스며드는 감각이 하나 있었다. 청명하도록 맑고 강대한 푸른 기운. 너무도 조용하고, 조심스러웠으며, 심지어는 기억과 닮아 있는 무엇.


무녀.


마침내, 그의 고요한 의식 속으로 그림자들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비디아는 가면 아래로 아주 들뜬 듯한 미소를 지으며 카타디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리 달아나봐야 저의 손바닥 안일 터인데. 그래서... 어디까지 도망치실 겁니까."


비디아는 한 손으로 그림자를 감싸 쥔 채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그림자의 결이 완전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카타디오 곳곳으로 뻗어 있던 어둠은 이제 그의 의지를 따라 단 하나의 기척을 포착하기 위해 맹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는 품 속에 있는 검은 철제 상자 하나를 꺼내어 열었다. 상자 안에는 이미 준비된 인장이 들어 있었다. 붉은색 봉인끈이 감긴 그 문서에는 짧고 단호한 문장이 새겨졌다.


이번에는 보다 확실히, 틈을 허용하지 마십시오. 협조에 응해주신다면, 지난번에 드렸던 정제된 정수보다 더욱 순수한 것을 드리겠습니다.


비디아는 그것을 봉인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곁으로, 장막을 뚫고 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말없이 인장을 받아 들은 존재는 이름도, 표정도 없었다. 오로지 정보의 전달을 위해 움직이는 그림자 '전령'이었다.


"에리스 협곡의 용인들에게 전하십시오.”


전령은 고개를 숙인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발소리는 없었고, 기척 또한 그림자에 묻혀 흔적이 없었다. 비디아는 다시 시선을 카타디오를 향해 돌렸다. 그 바람이 이루어지려는 듯, 푸른 기운이 점차 도시 한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무녀만 확보하면 됩니다. 도시는 그저 징검다리일 뿐. 진짜 무대는... 그 너머입니다."




세 사람이 회랑의 끝자락에 이르렀을 무렵, 아로스는 순간적으로 무언가에 찔린 듯 멈춰 섰다. 자신을 감싸던 시즈의 마력의 결이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은폐가 약해지고 있어요."


시즈는 입술을 닫은 채 속삭이듯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낯선 불안이 서려 있었다. 손끝으로 이능의 궤를 다시 잡아당기듯 조정을 했음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은 이전과 다름없이 주문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거대한 손이 나타나 이능의 흐름을 강제로 끊어버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더 많은 힘을 끌어올려 은폐를 유지하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방해가 점점 더 강해지면서 애써 붙잡고 있는 이능의 흐름을 역류시켰다. 손바닥에서 미세하게 피가 맺힐 정도로 집중해도 이능은 마치 수면 위에 돌을 던진 듯 일그러졌다.


그 찰나에, 무언가 '뚝'하고 끊어졌다.


"......!"


세 사람의 형체가 일그러지면서 점차 윤곽을 드러냈다. 어둠에 녹아 있던 그림자와의 동화가 서서히 무너졌고, 라그나르는 그 미세한 기척의 이탈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뒤를 확인하던 라그나르의 시선이 단숨에 날카로워졌다. 멀리서, 감시자의 눈이 번쩍였다. 그가 곧바로 허리춤에서 피리를 꺼내 불자 차가운 음이 어둠을 뚫고 터졌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긴장된 도시의 구조물 틈을 타고 퍼져나갔다.


"들켰습니다!"


라그나르의 외침과 동시에, 세 사람은 즉각 회랑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시즈는 뛰면서도 자신의 은폐 주문이 깨진 여운을 떨치지 못했다. 등 뒤에서 누군가의 거대하고 불길한 시선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감각. 그것은 마치, 처음부터 상대가 거미줄을 쳐놓고 자신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섬뜩하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아로스는 뒤를 돌아보며 쫓아오는 그림자들을 확인했다.


"좌측 틈새에 추적자가 둘—아니, 네 명! 중심 쪽은 더 많습니다!"


"이쪽입니다!"


라그나르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소리쳤다. 그는 짐승의 시선으로 구조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곡선의 철제 배수관과 벽 틈의 이끼, 습기의 농도, 도시를 따라 흐르는 강물의 맥락이 북서쪽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슈욱——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그림자 속에서 한 줄기의 검은 화살이 날아왔다. 아로스가 재빨리 칼을 빼들어 화살을 쳐내자 화살촉이 박힌 바닥은 새까맣게 부식되기 시작했다.


"부식 화살입니다!"


바로 뒤이어서, 맞으면 녹아내릴 듯한 회색 덩어리 하나가 시즈의 옆을 스쳐 바닥에 튀었다. 끈적한 액체는 바닥의 석조를 태우듯 끓이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서 올라오는 증기에는 진한 침식의 기운이 섞여 있었다.


"부식괴(腐蝕塊)입니다. 저들 중에 주문을 사용하는 자가 있어요!"


배수로에 가까워지면서 계단과 통로는 좁아졌다. 점점 습해져 가는 석벽 아래로 발끝이 미끄러지기 시작하면서 숨이 가빠졌지만 그와 동시에 뒤를 쫓아오는 발소리 또한 점점 가까워졌다. 어둠 너머에서 수많은 추적자들과 감시자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무녀님, 조금이라도 놈들을 저지하실 수 있습니까?"


"해볼게요. 다만... 시간이 조금 필요해요."


시즈는 숨을 고르며 마력을 집중했지만 마력 또한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뚜렷한 봉인을 당한 느낌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틀어지고 있다는 것은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라그나르가 여유 따위는 없다는 듯이 지팡이 속에 숨겨진 검을 뽑을 준비를 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표정은 무던했지만, 검은 눈동자는 이미 깨진 흑요석처럼 날카로운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느덧 배수로 입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굽은 철창과 진흙이 말라붙은 바닥, 그리고 그 너머로 느껴지는 또 다른 기척.


"앞에도......!"


매복을 하고 있던 수십 명의 추적자들이 그 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은 세 사람이 이곳으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뚫고 나가야 합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습니다!"


아로스의 외침에 세 사람은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속도를 더욱 높였다. 망설이는 시간마저도 사치였다. 이미 사방에서 추적자들과 그림자들이 덮쳐 들고 있었다.


그 순간, 시즈의 왼쪽 눈에서 푸른빛이 일렁였다.


어깨를 떨며, 비틀린 마력을 억지로 부여잡은 손에 푸른 섬광이 모였다. 그리고 거대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파동이 터져 나가면서 주변 일대가 뒤틀렸다.


콰아아아아앙———


푸른 뇌격이 떨어지자, 석벽을 감싸고 있던 구조물들이 박살 나면서 추적자들은 휩쓸리듯 바깥으로 날아갔다. 돌무더기와 물안개가 공중으로 솟구치는 틈 사이로, 배수로를 빠져나갈 마지막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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