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서약 (3)

멸망의 꿈

by 이샤라

배수로의 열린 틈 사이로 지하 계곡의 숨결이 밀려들었다. 축축한 바람, 물에 젖어 눅눅한 식물의 향, 그리고 바깥세상의 희미한 공기가 뒤섞인 냄새였다.


"지... 지금이에요......!"


시즈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갈라져 있었다. 라그나르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시즈를 안아 들면서 앞으로 뛰어들었고, 아로스도 지체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라그나르의 품에 안긴 시즈는 짧게 숨을 삼켰다. 벼락을 떨어뜨린 직후부터 몸속의 마력 흐름은 엉망으로 꼬여 있었다. 몸속에 난입한 그림자의 잔재들이 제멋대로 요동치는 듯 억지로 기운을 틀어막았고, 어딘가에서는 억지로 뚫으려는 듯 역류하며 솟구쳤다.


'아까부터 대체... 뭔가 이상해. 이건 내 안의 흐름이 아니야......!'


그 순간, 붕괴한 입구 너머로 추적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벼락을 맞고 반쯤 타버린 몰골로도 잔뜩 녹이 슨 단검을 들고 달려들었으나 아로스의 일격으로 머리가 세로로 갈라져 버리며 쓰러져 버렸다. 까맣게 탄 몸뚱이가 힘없이 수로에 처박히더니 검은 오물과 함께 하수처리장으로 떠내려갔다.


"벼락 소리를 듣고 분명히 몰려올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 빠져나가야 합니다!"


배수로의 수면은 무릎까지 차올랐다. 좁고 미끄러운 물길의 바닥은 이끼로 덮여 있었고, 때때로 넘어진 돌무더기 위를 뛰어넘어야 했다. 뒤편에서 들려왔던 추적자들의 발소리가 이전보다는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무언가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무언가 벽을 스치는 듯한 소리와 기척을 눌러 삼키는 숨결. 그 불길한 기척은 끈질기게 등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까, 지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물살은 더 거세졌지만 천장은 높아졌다. 발아래 흐르던 수로가 넓어지면서 차가운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어디선가 거대한 낙수의 공명이 울렸고, 그 틈으로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야를 가리던 거대한 양치식물들을 걷어내자 지하 계곡의 희뿌연 안개와 암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좁은 틈으로 몸을 웅크려 지나갈 때마다 발끝엔 미끄러운 이끼가 밟혔고, 머리 위에선 석회수가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뒤이어 지하 폭포가 나타났다.


세 사람은 폭포가 흐르는 바위를 타고 올라간 뒤, 안쪽에 움푹 파인 공간을 찾아 몸을 숨기자 도시의 소음이 물소리에 묻혔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기척도 희미해졌지만 그렇다 해서 안도하기엔 일렀다. 라그나르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선 채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자 그의 품에 안겨있던 시즈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려주세요."


라그나르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그녀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시즈는 채 땅에 발이 닿기도 전에 휘청이며 쓰러질 뻔했고, 급하게 라그나르의 팔을 붙잡으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무녀님, 괜찮으십니까?"


아로스의 물음에 시즈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핏기가 사라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온몸이 통제 불능으로 경련하고 있었고, 그녀의 손이 답답하다는 듯 천천히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심장을 옥죄는 듯 하얗게 질린 손끝이 가슴팍을 쥐어뜯을 것처럼 파고들었다.


그 고통스러운 침묵에 아로스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곁으로 다가가 앉자, 시즈 또한 아로스를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거친 숨을 몰아쉬며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약속도,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한 줄기 따뜻한 체온이 서로에게 닿았고, 그 속에서 흔들리던 숨이 아주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제야 아로스는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곡은 조용했다. 물살은 더 이상 거세지 않았고, 어둠은 깊었다. 하지만 그 정적이 오히려 폭풍 전야처럼 낯설었다.


"잠시 여기서 쉬는 것이 좋겠군요."


라그나르가 낮게 말했다. 지금은 발소리를 내는 것조차 목숨을 건 도박일 수 있었다. 세 사람은 물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서로의 거친 호흡을 죽이며 어둠에 녹아들었다.


그러나 잠깐의 여유도 느낄 새 없이, 무언가의 기척을 느낀 라그나르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흑진주 같은 눈동자가 어둠의 한 지점을 쏘아보았다. 시선이 향한 곳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 무언가 있었다.


"라그나르 경, 뭔가 있습니까?"


라그나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확인하려던 찰나, 희미한 불씨와 함께 매캐한 타는 냄새가 갑작스레 공기 속에 섞여 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붉은 불씨가 엉겨 붙더니 피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거대한 화염구로 변모하여 세 사람을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화염구는 세 사람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터져버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검은 물체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불꽃이 산산조각 났고, 뜨거운 열기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기가 걷히자, 어둠을 등지고 한 남자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 시즈의 눈이 커졌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마르프록스 산에서 만났던 불꽃의 사제, 데미안이었다. 자신을 사정없이 몰아쳐 무력화시켰던 까마귀 형상의 가면을 쓴 남자. 가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안광은 여전히 맹렬한 불꽃처럼 타오르는 모습이었다. 그의 주변은 불꽃의 잔재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혀 불에 탄 듯한 흔적이 없었다.


그 순간, 계곡 너머 배수로의 끝에서 검은 아우라가 일렁였다. 짙은 남색 망토를 두른 물결이 계곡 윗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 명의 사도들의 발걸음은 마치 물 위를 긋듯 유려하게, 천천히 그림자 속에서 발을 내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선두에 선 사도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왔다.


나우레스. 후드 아래로 드러난 그의 일그러진 입꼬리와 날카로운 눈매에는 뱀 같은 교활함이 서려 있었고, 오른손에서는 검은 독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을 본 아로스는 조금 전 화염구가 자신들에게 향한 것이 아닌 저 사도의 공격을 막아 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딱 봐도 저급한 것들의 냄새가 진동하는군."


나우레스가 낮게 웃었다.


"저 셋 중에 움브라 신전의 서고를 어지럽힌 놈이 있겠지. 그리고... 하나는 기운이 아주 익숙한데."


아로스는 말없이 검을 고쳐 쥐었다. 라그나르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으며, 시즈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사도를 응시했다.


"눈깔을 보아하니 제대로 찾은 것 같구나. 주교님께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무녀."


나우레스가 시즈를 향해 턱을 들었다. 그 눈매에는 묘한 흥분과 혐오가 겹쳤다.


"무녀는 내가 데려가겠다. 주교님께 직접 바치게 된다면 꽤나 쏠쏠한 공로가 되겠지."


나우레스는 돌연 팔을 들어 올리더니 어딘가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의 손짓을 끝으로, 계곡 아래의 분지 안쪽에서 수많은 추적자들과 근위대들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데미안은 세 사람을 등진 채 나직이 말했다.


"이곳 뒤편으로 가다 보면 지상으로 향하는 길이 나올 겁니다."


데미안의 의도를 파악한 아로스는 망설이지 않고 즉시 반응했다.


"이쪽입니다. 서두르십시오!"


"도망가게 둘 것 같으냐!"


세 사람이 움직이려던 순간 아래쪽의 분지에서 나우레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짧은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암반 지대에서 대기하던 근위대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허리춤에서 기다란 갈고리를 꺼내 들더니 순식간에 낙수벽을 향해 박아 넣었다.


"침식시켜 무너뜨려라. 길을 열어 상부로 향하라!"


짧은 지시에 따라 갈고리가 닿은 바위들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독이 혈관을 타고 퍼지듯 부식의 기운이 이끼 낀 바위를 허물고 있었다.


그 아래의 병사들이 낙석을 디디며 상부로 기어오르려는 찰나, 불이 치솟아 올랐다. 데미안이 손을 들자 무너진 바위틈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자아를 가진 듯 바위의 이끼를 타고 불타오르면서 살아 움직이는 그 불꽃들이 낙수벽을 타고 올라오는 병사들을 밀어냈다. 불꽃은 계속 타오르면서 바위 자체를 감싸 작은 장벽을 만들어냈고, 근위대들은 낙수벽으로 향할 새도 없이 밀려나면서 상부로 향하는 길목은 붉은 화염에 의해 완전히 차단되었다.


"제법인데. 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릴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나우레스와 사도들이 팔을 들어 올리자 그들의 손끝에서 어두운 액체가 맴돌기 시작했다.


짙은 남청빛 아우라가 뒤섞인 검은 물결이 소용돌이치며 호(弧)를 그렸다. 그것은 부식괴와 같은 계열이지만 그보다도 수십 배는 독한 상위 독성체, 카타디오에서 정제된 맹독의 파편이었다. 호의 모양을 이룬 십수 개의 물결들이 데미안을 향해 날아들었다. 공기마저 녹여버릴 듯한 독기가 사선으로 적중하려는 순간, 데미안의 손등 위로 불꽃이 피어났다.


짧게 내뱉은 숨과 함께 단 한줄기의 불꽃이 그어지면서 검은 호를 정면에서 베어냈다. 잔열이 일어나는 동시에 독액은 허공에서 찢어지듯 두 동강 나며 폭포 아래로 쏟아졌고, 독액이 닿은 바위턱의 물줄기는 증기가 끓듯 맹렬하게 부글거리며 기화되었다.


"——!"


사도들이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망토 자락이 일제히 펄럭이더니 후드 아래 그림자들이 요동쳤다.


"전력으로 밀어붙여라!"


그들의 이능은 하나로 엉켜 거대한 파동을 만들어냈다. 검은 광륜이 계곡의 공기를 찌그러뜨리면서 침수된 물 표면이 진동하며 일그러졌지만 데미안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짧은 숨을 내쉰 뒤, 오른손을 그대로 들어 계곡의 천장을 향해 뻗었다.


쿠르르르릉——


격렬한 굉음과 함께 한 줄기 불꽃이 화살처럼 뻗어 천장의 암반을 꿰뚫었다. 불꽃이 박힌 지점에서 용암처럼 새빨간 불의 지맥이 터져 나와 천장을 휘감으며 암반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파괴적인 위력에 나우레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위쪽이 무너진다! 당장 여기서 벗어나라!"


순식간에 계곡 상부의 지반이 붕괴되며 잔해와 돌무더기가 사도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자, 데미안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시즈와 아로스, 라그나르가 빠져나간 틈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편에서는 사도들의 병력 대부분이 붕괴된 돌 더미에 매몰되고 있었다. 나우레스와 사도들은 휘몰아치는 불길과 먼지를 헤치며 급히 배수로의 암벽 안쪽으로 몸을 숨겨야만 했다.




노아는 조용히 제단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맹렬히 타오르는 진홍빛 불꽃. 그 불꽃 속에서 도시가 불타오르는 꿈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붉은 파편이 허공을 찢었다.


거대한 제단이 폭주하며 불이 터져 나오면서 도시의 중심은 불바다가 되었다. 광장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였다. 불의 신의 이름을 새긴 제단은 더 이상 신을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신이 도시를 저주하듯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그니카는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천천히 번지는 따스한 불길이 아니었다. 지하를 뚫고 솟아오른 불의 분화가 사방으로 분열되어 도시의 숨통을 끊고 폐부까지 파고드는 폭렬이었다. 칼데라니아 화산의 뿌리에 깃들었던 용광로 또한 마찬가지였다. 깊은 곳에서 끓던 용암이 방향을 잃고 역류하듯 치솟았고, 그에 응답하듯 철기장들의 대장간이 하나둘 붉게 녹아내렸다. 기둥이 맥없이 휘었고, 벽은 문드러졌으며, 하늘을 가르던 불의 문양이 그려진 깃발마저 불에 휩싸였다. 이그니카의 심장은 더 이상 쇳소리를 내지 않았다. 과열된 채로 산산이 부서져 폭발하는 비명만을 지르고 있었다.


노아는 도시 경계 너머, 한 걸음 벗어난 곳에 서 있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매캐하게 타는 냄새와 무너져 내리는 성벽, 그리고... 불이 온 도시를 뒤덮어 버리는 장면. 자신의 손끝에서 다시 일어났던 도시의 불꽃은 온기가 아닌 증오처럼 그를 향해 일어섰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붉은 망토 자락이 어둠을 헤치고 다가왔다. 불길을 거슬러 걸어온 그의 형, 데미안이 아무 말 없이 노아를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날카로웠고, 입꼬리는 기묘하게 일그러진 채 비틀려 있었다.


"...실망스럽구나."


그 말 한마디가 망치처럼 가슴에 떨어졌고, 데미안의 손끝에서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주저 없이, 마치 신의 심판처럼.


"——끄아아아아아악!! 그만둬!! 형, 안 돼애——!!"


노아는 비명을 지른 채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고, 손끝은 검게 그을린 환영을 여전히 더듬고 있었다. 무너져가는 이그니카, 미쳐버린 듯 타오르는 제단, 그리고... 자신을 향한 형의 차가운 눈빛.


그것은 단순한 꿈도, 악몽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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