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서약 (4)

서약

by 이샤라

노아는 여전히 제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40일간의 의식을 마치고 불의 사제가 되었지만 그에게는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오히려 제단에 오를 때마다 사람들의 기대와 경외가 담긴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숨이 막혔다. 그저 형을 찾기 위해, 무너진 고향을 외면할 수 없다는 책임감 하나로 버텼을 뿐, 이 자리는 애초에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과연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형이었다면 달랐을까? 형이라면 분명... 이 불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텐데.'


노아는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방금 전 꿈처럼 불꽃이 또다시 폭주할까 겁이 났다. 그 불안은 아직 식지 않은 잔열처럼 눈동자에 눌어붙어 밤마다 꿈속에서 도시를 집어삼키던 붉은 악몽을 되살려내곤 했다. 입술이 바싹 말라붙고, 식은땀이 이마를 지나 턱 끝을 타고 떨어졌으며, 손끝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온몸을 짓눌렀던 뜨겁고 끔찍한 열기가 또렷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형의 눈동자와 목소리.


'...실망스럽구나.'


그 말이 뼛속 깊이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단지 꿈일 뿐이었지만 어쩌면 미래를 보여주는 예고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홀로 깊은 고뇌에 빠져 있는 와중에 등 뒤로 익숙한 저음이 들려왔다.


"우리 사제님, 또 무슨 고민을 하고 계신가."


노아가 고개를 돌리자, 아마룬이 특유의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갑주는 불에 그을린 듯한 까만 자국이 남아 있었으며, 한 손엔 어디서 났는지 묘하게 찌그러진 커다란 철제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혹시 저 불꽃이 자기 마음대로 꺼지진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


노아는 억지로 미소를 흘리듯 지었다.


"글쎄요...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마룬은 곁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늘 아래서 쉬는 듯한 느긋한 표정이었지만 감정을 읽은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 노아의 옆모습을 스치고 지나갔다.


"형이라면 어땠을까요."


노아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저보다 훨씬 강하고, 똑똑하고, 어떤 어려움에도 포기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형이 여기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이그니카는 훨씬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 형이 여기에 없으니 너라도 있어야지."


아마룬이 짧게 대답했다. 위로도, 비판도 담겨 있지 않았던 그 말에는 그저 당연한 현실을 말하듯 담백했다. 노아는 고개를 떨군 채,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작고 조용한 목소리에 담긴 떨림은 누구보다 컸다. 아마룬은 아무 말 없이 노아를 바라보다가 잠시 시선을 멀리 불꽃으로 향한 뒤, 아주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스스로를 믿어야지."


노아는 눈을 떴다. 짧은 말이었음에도 무게는 꽤나 무거웠다. 아마룬은 입꼬리를 아주 약간 올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전선에서 내게 뭐라 했는지 기억해 봐라."


노아는 눈을 깜빡이며 아마룬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나약함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지."


그 말에 노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작게 웃었다.


"또 뭐라고 했더라... 그 두려움은 책임감에서 비롯돼야 한다고 했었나?"


아마룬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놀리듯이 웃었다.


"그때 넌 꽤나 거창하게 말했거든. '이게 내가 믿었던 거인의 모습입니까?'라면서 말이지."


노아는 창피한 표정을 지으며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알긴 아는구만? 그래도 나는 그 말을 믿는다. 그러니,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네가 했던 말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지."


아마룬은 장난치듯 손가락으로 노아를 아주 살짝 밀어낸 뒤 천천히 일어나면서 다시 용광로로 향했다. 그 모습을 뒤로 노아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제단 위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 불꽃이, 꿈속에서 도시를 집어삼키던 그것처럼 느껴졌다.


노아는 품속에서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시스테나 전선에서 헤어지기 전, 시즈가 건네주었던 것이었다. 마음이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줄 거라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치자, 그 안에는 단정한 필체로 적힌 기도문이 새겨져 있었다.


가장 무거운 책임은 가장 어두운 길을 홀로 걷는 자에게 주어진다. 네 안의 불꽃이 꺼질 듯 희미해지거든, 그것이 너를 태우는 절망이 아닌 길을 밝히는 온기임을 기억하라. 그 온기만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다시 일어설 한 걸음의 용기를 줄 것이니.


노아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속으로 기도문을 되뇌었다. 가슴 한켠 어딘가에 남은 형의 시선은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심장을 눌렀지만, 손끝으로 느껴지는 양피지의 감촉이 싸늘하게 흔들리던 마음에 작은 온기를 더해주었다.


'......형,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불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아는 그 자리에 한동안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지상으로 통하는 바위틈은 좁고 험했다. 낙석과 흙먼지가 어깨를 스쳤고, 부식된 돌기둥이 걸음을 더디게 만들었지만 세 사람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어둠을 뚫고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하늘은 먹구름에 덮여 있었고,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숨 막히는 정적의 평야였다. 동쪽에서 본 광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썩어 문드러진 대지와 폐부를 찌르는 지독한 독기는 그들이 카노르 평원으로 돌아왔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무너져 내린 카노라스의 북쪽 관문 중 하나였던 트리온 요새의 잔영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즈는 본능적으로 정화의 결계를 펼치려 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질 않았다. 애써 이능을 발현하려 했지만 손끝에서 마력이 모래처럼 흩어질 뿐, 오히려 깊은숨을 내쉴수록 심장을 옥죄는 감각이 선명해지면서 손끝마저 저려오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이능이... 흐르질 않아요......"


시즈의 떨리는 목소리는 점점 더 가늘어졌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눈빛도 점점 흐려지는 동시에 가면의 기운마저 약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병이 몸속을 타고 흐르듯 그녀의 생기를 빼앗고 있었다.


"무녀님,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로스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부축하려 했으나 시즈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걷는 것 정도는... 문제 없... 어......"


말끝을 흐린 시즈의 발끝이 휘청거렸다. 라그나르가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미 무릎이 풀리고 있었다. 간신히 아로스가 넘어질 뻔한 시즈를 붙잡았지만 시즈는 그의 품 안에서 기운 없이 축 늘어졌다.


"무녀님?"


아로스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무녀님! 무녀님!!"


시즈의 머리가 힘없이 그의 가슴께에 기울어졌다. 대답은 없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체온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혈색이 좋지 않습니다."


라그나르가 시즈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트리온 요새의 무너진 성벽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은 멈추면 안 됩니다. 저 요새까진 어떻게든 가야—"


아로스는 라그나르의 말이 끝날 새도 없이 시즈를 품에 안은 채 곧장 요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급한 움직임에 갑옷의 이음새가 삐걱거리며 울렸고, 무거운 금속이 들썩였지만 시즈의 체온은 금속의 차가움보다 더 미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리온 요새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그나르는 먼저 앞서서 요새 내부를 지나 반쯤 무너진 성벽 안쪽으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천장 하나 남지 않은 채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신들의 성물이 남긴 희미한 흔적 덕분에 부패의 독기는 이곳까지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로스는 가장 안전한 구석을 찾아 시즈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축 처져 있었고, 숨결도 미약했다.


"무녀님......!"


시즈의 이마에 손을 대어보았지만 온도는 여전히 낮았다.


"귀공."


라그나르가 조용히 아로스를 불렀다.


"괜찮을 겁니다. 기운은 아주 미약하지만, 이곳 또한 성물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으니 부패의 독기가 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녀님은 너무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능의 결은 뒤틀렸고, 정화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대로라면—"


"귀공께서 곁에 있었잖습니까."


라그나르는 안절부절못하는 아로스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 덕분에 버틴 겁니다. 지금처럼 가까이서 숨을 고르게 하면, 이곳의 기운과 합쳐져 곧 안정을 되찾을 겁니다."


그 말을 마친 라그나르는 주변 경계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폐허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아로스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시즈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떨리는 숨을 조심스럽게 누그러뜨렸다. 다행히 걱정과는 달리 시즈의 호흡은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가느다랗던 숨결이 부드러운 침묵 속에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그녀는 힘겹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속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로스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눈에는 깊은 고통과 걱정 외에도, 그토록 감추려 했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즈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들어 아로스의 뺨을 향해 뻗으려다 이내 힘없이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속삭였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약해서......"


"아닙니다."


아로스는 짧게 부정했지만 그뿐이었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침묵에 시즈는 용기를 내어 다시 물었다.


"그럼, 왜... 그동안 왜 저를 멀리하셨나요? 제가... 귀공의 여정에 짐이 되는 것인가요?"


시즈의 질문에 아로스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결국 시즈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오해와 서러움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차라리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그럼... 그럼 저도......"


"짐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그 눈물을 본 순간, 아로스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시즈의 힘없는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 반대입니다. 저와 같은 자들은... 소중한 이를 곁에 가까이할수록... 그 대상을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아로스의 목소리에 담긴 체념과 슬픔에 시즈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타인의 온기에 기댈수록, 그 영혼의 불꽃이 위태로워지는 법이다.


라사리아가 말한 가혹한 굴레를 떠올린 그녀는 마침내 모든 것을 깨달았다.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마음을 닫아걸어야만 했던 그 모순된 침묵. 그것은 외면이 아닌, 차마 닿을 수 없는 온기를 향한 가장 서툴고도 처절한 비명이었으리라.


허나 그 가혹한 굴레는 결코 그만의 것이 아니었으니. 서로를 구원하려 애쓸수록 도리어 상대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마는 이 잔혹한 모순...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당신과 나를 하나로 묶어두고 있는 서글픈 운명의 진짜 이름일지도.


시즈는 아로스가 마주 잡은 손에 희미하게 힘을 주며 눈물 젖은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 길이 설령 파멸로 향한다 해도... 저는 기꺼이 귀공과 함께 걷겠어요."


아로스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으려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무녀님은... 저 때문에 위험해져서는 안 됩니다! 저와는 다른 길을—"


하지만 시즈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히 붙잡으며 아로스의 말을 끊었다.


"귀공 없는 안녕은... 더는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 대답에 아로스는 더 이상 그녀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그것은 희망을 향한 맹세가 아닌, 서로가 서로의 마지막이 될 것임을 예감하면서도 기꺼이 파멸을 함께 맞이하겠다는 가장 슬픈 서약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폐허의 정적이 두 사람을 감쌌다. 더 이상 오해도, 거리도 없는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오직 서로의 체온으로 약속의 무게를 확인할 뿐이었다.


그때, 기척도 없이 무너진 성벽 바깥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안광을 머금은 까마귀 가면. 발밑에 새어 나오는 불꽃의 잔재. 먼지에 뒤덮인 바닥 위로 데미안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아로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시즈의 앞을 가로막았다. 데미안과 마주한 순간 눈빛은 날카롭게 변하는 동시에 검집에 얹힌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며 검의 무게를 가늠했다. 그의 머릿속은 계곡 낙수벽 아래, 낙하하는 병력들을 밀어냈던 불꽃의 위력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지."


아로스가 차갑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데미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시즈의 곁을 천천히 바라보며 한 발짝, 그리고 또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무녀와 볼일이 있습니다."


"무슨 볼일이냐."


검집에서 날이 조금 빠져나왔다. 아로스의 눈빛은 칼날보다 먼저 상대의 심장을 겨눴다.


"당신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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