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서약 (7)

끝없는 위기

by 이샤라

샤비트의 시선이 라그나르를 천천히 훑었다. 감정을 절제한 목소리에는 진득한 피로감과 비아냥이 겹쳐 있었다.


"덤으로 움브라 서고까지 뒤진 침입자까지 함께라니... 일석이조로군."


샤비트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날 선 웃음과 함께 작게 웃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진형이 완성된 근위병들의 포위망이 더욱 촘촘해졌다.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 쓸데없는 발버둥은 집어치워라. 전부 잡아라!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외침과 동시에 근위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령을 따라 일제히 전진하는 근위병들의 기세가 폐허를 뒤덮었고, 사슬갑옷이 뒤엉키는 소리와 함께 진형이 숨통을 조이듯 좁혀왔다.


세 사람은 등을 맞대듯 모였다. 짧은 숨과 날카로운 눈빛 속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희를 에워쌌어요."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돌파해야 합니다."


아로스가 낮게 말하며 주변을 훑었지만 어느 쪽도 쉬운 길은 아니었다.


"...길을 열어볼게요."


시즈가 침착하게 입을 열자, 라그나르는 그 의도를 파악했는지 시즈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 등에 매달리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가능해요."


시즈의 대답을 끝으로, 라그나르의 손이 짧게 신호를 그렸다. 한 박자 뒤, 아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외쳤다.


하나. 둘. 셋.


"무녀님, 지금입니다!!!"


벼락이 떨어졌다. 대지를 내리치는 섬광과 함께 폐허 위로 파열음이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시즈의 왼쪽 눈을 시작으로 손끝에서 뻗어 나간 푸른빛의 뇌격이 순식간에 진형을 가르며 휘몰아쳤다.


콰르르르릉————


검은 연기와 함께 진형의 일각이 무너졌다. 벼락을 맞은 근위병들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숯덩이처럼 타올랐다.


"타십시오!"


라그나르의 외침에 시즈가 먼저 그의 등에 가뿐히 올라탔다. 그 뒤를 따르던 아로스 역시 지면을 박차고 도약해 라그나르의 넓은 등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이 모두 올라타자마자 그의 팔다리가 한순간 번개처럼 튕겨 나갔다.


그러나 그 앞을 자줏빛 갑옷을 입은 근위대 하나가 가로막았다.


"그분의 의지를 거스르는 자—"


라그나르의 등 위에서 아로스의 검이 번뜩였다. 근위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순식간에 휘둘러진 칼날에 근위대의 목이 기묘한 각도로 꺾이며 허공을 빙글 돌았고, 머리가 땅에 닿기도 전 이미 생명은 끊겨 있었다. 피가 바닥에 흩뿌려지기 전에 라그나르는 이미 그 자리를 지나쳐 평원의 북쪽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늑대처럼 허리를 낮춘 채, 괴물의 발톱처럼 깎인 대지를 박차면서 돌과 재를 가르며 질풍처럼 달렸다.


한편, 그보다 조금 떨어진 북쪽 경계선.


바람을 따라 수많은 용인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비늘과 날개, 발톱이 번뜩이는 그들은 마치 하늘을 압박하는 전운처럼 서쪽에서부터 평원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선두에서 오베디안이 날카롭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로 지면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때, 옆을 나란히 날던 용인 스로누스가 오베디안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주교가 직접 오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오베디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직접 움직이고 있다. 이번만큼은 그 무녀를 놓칠 생각이 없다는 뜻이겠지."


말 그대로였다. 비디아는 지금, 앞으로 다가올 계획을 위해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오베디안은 잠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얼마 전의 실책 때문인지 사브라트에게서 전해 들은 지시가 머릿속을 스쳤다. 독단적인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지 말라는 냉정하고도 명확한 한마디. 그는 날개를 펄럭이며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두 번의 실수는 없다. 정해진 위치를 넘기기 전에 놈들의 퇴로를 막을 것이다."


그의 말에 따라, 뒤를 따르던 용인들이 일제히 하늘을 가르며 남쪽으로 날아들었다.


세 사람의 필사적인 도주는 계속되었다. 파괴된 도시의 경계가 점점 멀어지면서 갈라진 땅 위로 흐르던 검은 연기도 더는 따라오지 않았지만 안도할 틈은 없었다.


그때, 먼 지평선 너머로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로막는 붉은 윤곽이 시야를 타고 밀려들었다. 서서히 번지는 열기와 거대한 벽처럼 솟아오른 불꽃의 기운이 마침내 눈앞에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시즈는 짧게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이 거리에서도... 저 정도로 선명하다니......!"


낯설지는 않았다. 타리안의 성채에서 희미하게 본 적도 있었고, 그 이름과 형상에 대한 이야기도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이토록 분명하게 선을 긋듯 드러난 것은 처음이었다.


불의 장벽.


아로스도 강렬한 광경에 시선을 들었다. 그의 눈에도 장벽은 더 이상 추상적인 풍경이 아니었다. 멀기만 했던 것이 이제 진짜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장벽 아래로는 불꽃의 고원으로 향하는 절벽길이 등줄기를 타고 이어진 실처럼 구불거렸다. 아직 몇백 킬로는 남아 있었지만 라그나르는 마치 이미 예정된 이동 경로인 듯 말없이 방향을 조정했다. 점점 가팔라지는 경사로를 따라 발밑에서는 흙과 잿더미가 부서지듯 쏟아져 내렸다

.

그 순간, 세 사람의 앞을 가로막듯 하늘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내리 꽂혔다. 음영이 드리워진 하늘 너머로 수십의 그림자들이 차례로 강하했다.


"어째서 지금......!"


시즈의 절망 어린 목소리가 터졌다. 대지를 울리며 착지한 것은 검붉은 비늘과 거대한 날개를 가진 용인들이었다. 바위처럼 단단한 비늘,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찢어버릴 듯이 날카롭게 노려보는 황금빛 눈동자.


그 선두에는 오베디안이 있었다. 오베디안의 시선이 시즈를 포착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시즈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황금빛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짧고 날카로운 숨을 내쉰 오베디안은 발을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역겹기 짝이 없군."


그 말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낮고 거친 동시에 질린 기색마저 묻어 있었다. 마치 오래된 상흔을 다시 찌르듯 피로와 혐오가 교차하는 목소리였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히 인간 하나라 여겼다. 주교가 그렇게까지 집착할 만한 이유가 있는지 조차 몰랐지. 하지만......"


오베디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잊지 못할 기억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 벼락의 맛을 보고 나서는 생각이 조금 바뀌더군. 고룡의 피를 이은 이 몸을 마비시킬 수 있는 인간은 오직 너뿐일 거다.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몸은 생생하게 기억하니까."


조소를 머금은 시선이 다시 시즈를 향해 꽂혔다.


"그래서 질렸어. 네년의 그 힘도, 그리고 너 하나에 매달려 온갖 기만질을 일삼는 그 자의 집착도 말이야!"


마지막 말은 거의 던지듯이 내뱉었고, 그는 이를 악물 듯 턱을 단단히 굳혔다. 땅 위로 드리워진 용인들의 그림자가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고원으로 향하기 위한 도주의 길목을 완전히 막히자 대지 위로 긴장이 칼날처럼 맺혔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완벽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라그나르는 네 다리를 딛고 몸을 낮췄다. 눈빛이 사냥꾼처럼 가늘어졌고, 등에 앉아 있는 시즈가 조용히 자세를 다듬었다. 앞을 가로막은 용인들의 진형은 무너질 기색이 없었다. 그들은 낮은 호흡을 가다듬더니 일제히 지면을 박차고 돌진해 왔다.


"온다!"


아로스가 외침과 동시에 등에서 뛰어내리며 전방으로 튀어나갔다. 내딛는 한 걸음은 거의 번뜩이는 궤적에 가까웠다. 그는 순식간에 바닥을 박차고 나가며 가장 앞선 용인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었다.


검이 적의 가슴팍을 베었지만 예상과는 다른 감각이 따라왔다. 피도, 비명도 없었다. 칼끝이 깊숙이 들어간 용인은 뒤로 밀려나기는커녕 가소롭다는 듯이 웃더니 그대로 팔을 들어 목덜미를 잡으려 덤벼들었다. 그 모습에 아로스는 눈썹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다음 순간, 시즈가 외쳤다.


"왼쪽에서도 달려들고 있어요!"


그 소리에 라그나르가 반응했다. 발톱이 땅을 박차며 방향을 틀었고, 시즈는 용인들이 몰려있는 정확한 각도에 벼락을 꽂아 넣었다. 푸른 섬광이 터지듯 뻗어 나가며 그 자리에 꽂혔다.


콰아아아아아앙————


적어도 셋은 그대로 쓰러졌다. 그럼에도 한 놈이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분명히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일어나는 용인의 모습에 시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도 안 돼! 분명 직격 당했는데 어떻게......!"


흔들린 것은 시즈뿐만이 아니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라그나르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것은 단순한 강한 적이 아닌 무언가 완전히 다른 존재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때, 용인 하나가 고개를 치켜들더니 입을 벌려 마치 숨을 들이마시듯 크게 폐부를 부풀렸다.


"조심하세요!"


시즈의 외침과 동시에 용인의 목구멍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치밀었다. 목을 타고 오르는 그 붉은 기운은 곧바로 불꽃이 되어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휘몰아치는 화염이 마치 맹렬한 덩굴처럼 허공을 갈라내며 세 사람을 향해 뻗자 라그나르는 지면을 깊게 파고들며 우측으로 뛰었고, 시즈는 단숨에 그 의도를 알아차리면서 손을 펼쳤다.


"——받아라!"


뇌격이 날아드는 불꽃과 교차했다. 푸른 섬광과 붉은 화염이 충돌하면서 공기 중에서 폭발하듯 격렬한 충격음이 터졌다.


퍼어어어엉——


뇌격의 위력으로 불꽃은 사방으로 갈라졌지만 그 사이로 또 다른 용인 두 마리가 파고들었다. 한 놈은 팔을 도끼처럼 뻗어 라그나르를 후려치려 했고, 다른 하나는 몸을 접었다 피며 거의 네 발 짐승이 된 것 마냥 시즈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을 향해 아로스의 발이 바닥을 스쳤다. 그의 검이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먼저 파고들었고, 라그나르는 역동적으로 몸을 비틀며 목덜미를 노린 도끼 같은 팔을 재빠르게 피했다. 터무니없는 힘에 대지에 금이 갔지만 동시에 땅을 내리친 팔뚝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온 비늘이 우수수 쏟아졌다. 거인에 필적하는 용인의 힘은 단순히 강한 게 아니었다. 놈들은 정말 '고통을 모른다'는 전제로 움직이는 짐승들이었다.


찰나의 빈틈, 아로스의 눈이 한순간 오베디안과 스쳐 지나갔다. 포효도, 맹렬한 돌진도 없었다. 단지, 조용히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전장의 공기가 이상하리만치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검붉은 비늘과 날개, 그리고 황금빛 눈동자. 땅 위를 짓이기듯 내딛는 발걸음이 거대한 짐승의 것처럼 울렸다. 아로스는 눈앞의 용인이 다른 놈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칼을 움켜쥔 그의 손에 긴장감이 일었다. 서로의 눈이 정확히 맞닿는 동시에 오베디안이 몸을 낮추며 맹렬한 속도로 돌진해 왔다. 날개는 접힌 채였지만 뒤로 뻗은 근육과 발톱이 대지를 밀어냈다. 그의 발끝에서 터진 힘이 폭발처럼 전방으로 튀면서 발리스타가 쏜 작살처럼 아로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로스도 움직였다. 그 또한 주저 없이 오베디안을 향해 정면 돌파했다. 검과 발톱이 맞부딪친 순간 울려 퍼진 것은 지면 전체를 흔드는 금속성의 진동이었다. 공기가 찢어지고, 땅이 움푹 꺼졌다. 충격의 중심에서 밀려나간 둘은 동시에 뒷걸음쳤지만 서로의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눈빛만이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오베디안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폐부가 부풀면서 가슴 일대가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다음 순간, 주둥이가 열리면서 화염의 숨결이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아로스는 칼을 비스듬히 세우며 몸을 틀었다. 그는 불꽃의 직격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하려는 듯 불길의 선두를 밀어내며 검을 휘둘렀다. 청록빛 칼날이 화염 속을 가르며 치솟았고, 그 궤적은 불꽃과 충돌해 폭발을 일으키면서 둘 사이에 연기와 파편이 흩날렸다. 그러나 오베디안은 멈추지 않았다. 비늘이 타들어 간 흔적 따위는 무시하듯 강철 같은 팔로 아로스의 머리를 강하게 휘갈겼지만 아로스는 칼로 그 일격을 튕겨냈다. 반격은 짧고 정확했다. 한 발 뒤로 빠지면서 무릎 아래로 검을 찔러 넣었지만 오베디안 또한 반응했다. 발을 튕겨내면서 맞받아치는 또 다른 반격에 검과 발톱이 다시 공중에서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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