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못한 손
검과 발톱이 부딪치는 굉음이 계속되었다. 점점 더 맹렬해지는 충돌에 땅이 부서지고 공기가 비틀렸다. 그 사이, 라그나르는 시즈는 용인들의 진형 속에서 빈 틈을 만들려 안간힘을 썼다. 검붉은 비늘 위로 푸른 섬광이 내리 꽂히면서 불꽃과 연기를 일으켰고, 공기에는 비늘이 불타는 냄새가 섞였다. 그럼에도 용인들은 좀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벼락에 직격 당해도, 검에 몸이 갈라져도 놈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지면 아래에서 수많은 발걸음으로 인해 울리는 거대한 진동이 전해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울림의 방향은 남쪽이었다.
"......기어코 쫓아왔군."
라그나르가 짐승처럼 이빨을 드러내는 동시에 지평선 너머로 검은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발소리와 함께 몰려오는 검은 아우라, 그리고 군세가 뿜어내는 위압적인 결속감. 샤비트와 그 휘하의 근위병들이었다.
"언제까지 도망치려 할 테냐. 네놈들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으니,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여라!"
샤비트의 말끝에 묻어난 기운은 명령도, 설득도 아닌 통보였다.
그 순간, 라그나르와 시즈를 향해 용인이 눈 깜짝할 사이에 측면에서 날아들었다. 기습적인 몸통 박치기에 등에 매달려 있던 시즈가 중심을 잃고 떨어져 나가며 땅 위로 구르기 직전, 라그나르가 몸을 틀어 한 팔을 뻗어 시즈를 감싸며 같이 넘어졌다. 이어서 거친 흙먼지로 뒤덮인 시야를 틈타 또 하나의 용인이 굶주린 짐승처럼 뛰어들었다. 덮쳐오는 육중한 몸을 라그나르가 간신히 막아내자 그의 등 뒤에서 푸른 뇌격이 터져 나왔다. 시즈가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힘을 짜낸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전장에 깊은 정적이 깃들었다. 이번엔 단순한 군세의 기운이 아니었다. 소음과 비명,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까지,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에 증발해 버렸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척은 너무도 섬뜩한 정적이어서 오히려 더 뚜렷했다.
공기 자체가 움직이기를 멈춘 듯, 땅 위의 그림자들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용인들도, 샤비트의 병사들도 마치 어떤 '권위'에 짓눌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치열하게 맞부딪히고 있던 아로스와 오베디안도 서로를 향해 팔을 들어 올린 채 멈춰 섰다.
오베디안의 시선은 어느새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놀라진 않았지만 지금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은 분명히 전에 알던 느낌과는 달랐다. 단지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을 뿐임에도 그 이질적인 정적으로 공기의 결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전장을 지배하던 살기와 포효보다도 더 무겁고 더 조용했다.
단단한 턱 근육이 악물렸다. 등줄기와 날개를 따라 싸늘한 감각이 흘렀다. 익숙한 기척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도 낯설었다.
신을 빙자한 듯한 얼굴을 가린 기묘한 가면. 검보랏빛 예복. 서릿발처럼 정제된 발걸음.
비디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이지, 저열한 연극은 지루하군요."
시즈의 눈동자가 비디아를 향해 고정되었다. 그를 쳐다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감각과 함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것처럼 시야가 끌려들어 갔다. 카타디오에서 자신을 옥죄던 형체 없는 공포의 근원이 바로 눈앞에서 걸어오는 자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만큼이나 떨어진 대지에서도 여전히 발악을 하시는군요. 그렇게나 소중한 분을 지키고 싶으셨던 겁니까? 애틋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겠지요. 하지만 역시... 목숨을 부여잡은 채로 바닥을 질질 끌려다니는 꼴은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비디아의 시선이 시즈를 향했다. 그 시선은 해부하듯, 분석하듯, 이미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는 듯 오만했다.
"오랜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을 이 대지에서 마주할 날을 말이죠. 정말... 정말로 훌륭한 그릇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조차 버티고 계신 걸 보면, 지금껏 제가 만나 뵀던 그 어떤 제물보다도 완벽하시군요. 하물며... 신월이 다시 떠오르기 전까지는 굳이 다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러니 무의미한 희생은 삼가시죠. 억지는, 늘 좋은 결말을 맺지 않으니까요."
아로스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시즈 앞으로 나섰다. 라그나르 또한 그 옆에 나란히 함께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비디아가 단 한 걸음 더 다가오는 걸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물론, 누군가 죽어야 끝난다면... 그 또한 저희 쪽에선 얼마든지 고려해 드릴 수 있습니다."
비디아는 잠시 시선을 시즈의 뒤편, 전장의 중심에서 아로스와 격렬히 싸웠던 오베디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비늘에는 수많은 흠집과 피가 얼룩져 있었고, 숨결은 거칠었다. 하지만 혐오를 가득 품은 채 자신을 꿰뚫고 있는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이번에는 용케도 실수하지 않으셨군요. 아주 잘하셨습니다."
분명한 의도가 담긴 칭찬이었지만 조롱은 아니었다. 오베디안은 비디아를 짧게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 눈빛엔 냉소도, 분노도 없었다. 감정의 무게 대신 일종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내가 사리분별조차 못 할 줄 알았나?"
그 한마디는 더 이상의 논박이 필요 없는 선언이었다. 대답에 반응하지 않은 비디아의 시선은 다시 시즈에게로 가 아닌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기사에게 머물렀다.
환시를 품은 자. 그분께 지목된 유일한 존재.
위대한 분의 시선을 훔쳐 간 장난감이 고작 저 기사였던 말인가. 수천 년을 헌신해 온 자신조차 받아보지 못한 주인의 순수한 흥미가, 저토록 나약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필멸자에게 향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그렇다면 증명하면 그만이다. 저것은 장기말조차 되지 못하는 부스러기임을. 철저히 짓밟고 부숴 그분의 관심이 무가치했음을 확인시켜 드리는 것이야말로 참된 도구의 도리이자 자비일 터.
비디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명령은 곧장, 샤비트를 향해 떨어졌다.
"무녀는 상처 하나 없이 데려오십시오. 나머지는 죽여도 좋습니다."
짧은 명령은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각본처럼 차갑게 군세 속으로 스며들었다. 샤비트는 말없이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손짓과 동시에 공허의 군세가 일제히 전장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진형이 일렁이면서 검은 아우라가 다시 한번 협곡을 가득 채웠다. 용인들도 그 흐름에 가세했다. 잠깐의 정적 속에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던 그들의 육체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발톱이 대지를 긁었고, 바위틈을 찢어내며 검붉은 비늘들이 다시금 세 사람을 향해 덮쳐왔다.
그 순간—
"——엎드리세요!"
시즈가 팔을 높이 치켜들자, 왼쪽 가면의 문양이 번뜩였다. 그 중심에서 터져 나오는 푸른 안광은 어느 때보다도 강렬했다. 연기와 독기로 가득한 하늘이 갈라지더니, 대지 위로 펼쳐진 그림자들 사이로 푸른 섬광이 번쩍이며 전장이 뒤집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벼락은 파괴적인 창이 되어 대지를 찢었다. 세 사람을 향해 돌진하던 용인들과 추적자들은 그 자리에서 푸른 섬광 속으로 삼켜졌다. 굴러가던 바위는 조각나 파편이 되었고, 온 지면이 폭격을 맞은 듯 꺼져 들어갔다. 그 주변을 감싸던 어둠조차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비디아는 그 장면을 보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연기의 틈 사이로, 가면을 타고 흐르는 맹렬한 푸른빛. 갈라진 지면의 중심에 홀로 서 있는 시즈의 모습은 마치 무너진 신전 위에서 깨어난 사념체 같았다.
"이토록 선명한 형상이었군요......!"
그 말과 동시에 비디아의 손끝이 들리자, 시즈의 눈동자가 다시금 흔들렸다. 벼락의 여운으로 인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몸 안에서 흐르는 기운이 또다시 비틀리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공중으로 흩어지던 섬광이 갑작스럽게 뒤틀리더니 몸속을 흐르는 결들은 마디마디가 끊어지듯 부스러지면서 사그라들었다.
"끄읍...! 아... 아윽......!"
시즈의 눈이 커졌다. 숨이 막혔고, 팔다리에서 기운이 빠져나갔다. 카타디오에서와 같은 그 감각은 힘의 흐름을 강제로 끊어버리는, 뿌리부터 붙잡아 뒤틀어버리는 압박이었다.
비디아는 시즈를 바라보며 한 발자국 다가왔다.
"지금 이 순간조차 버티고 계신 걸 보면... 지금껏 제가 봐왔던 그 어떤 제물보다도 완벽하군요. 조금만 더 분발해 보십시오. 그 힘이 남아 있는 한, 몸 안을 헤집는 기운은 진정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또 한 번 비디아의 손끝이 허공을 스쳤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시즈의 목덜미를 따라 흐르듯 감돌았고, 벼락의 결이 완전히 꺼졌다. 손끝까지 내려온 불길한 감각이 온몸을 한 바퀴 휘감는 순간 시즈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무녀님!"
아로스가 시즈를 부축하려는 달려오는 순간, 용인들이 그림자처럼 몰려들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겹겹이 쌓이는 용인들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라그나르 또한 그들을 뚫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몰려드는 힘에 밀려 시즈에게서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비디아는 미동조차 없이 가면 아래로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비디아는 고통에 젖은 시즈를 바라보며 샤비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녀를 잡아라!"
"안돼! 무녀님!!"
샤비트의 명령과 동시에 근위병들이 떼를 지어 시즈를 향해 밀려들었다. 아로스가 앞을 막아선 용인의 팔을 거칠게 베어 넘기며 비명을 지르듯 돌진했지만, 자줏빛 갑주의 손들은 이미 시즈의 팔을 낚아채 군세의 중심부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아로스의 검이 전방의 근위병 머리를 가르며 번쩍였다. 보랏빛 갑옷이 하나 둘 부서지고 파편처럼 흩날리는 핏빛 틈 사이로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오직 그녀에게 닿기 위한 일념 하나뿐이었다. 시즈 또한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면서도 필사적으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면서 거대한 군세의 그림자가 그녀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귀공!!"
절박한 외침이 혼란스러운 전장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둘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로스는 몰려오는 군세의 틈을 헤집으며 한 발짝, 또 한 발짝 시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에게 닿았다.
시즈의 손끝이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마치...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퍼어억————
"——크악......!"
옆에서 튀어나온 근위병 하나의 철퇴가 아로스의 머리를 정통으로 강타했다. 시야가 순간 암전 되더니, 균형이 무너지면서 손의 힘이 빠져나갔다. 시즈는 반사적으로 반대 손을 뻗어 다시 멀어지는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 손끝은 허공을 붙잡고 말았다. 아로스가 마지막으로 붙잡은 것은 시즈의 손이 아닌, 그녀의 검은 옷자락이었다.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천 조각만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시즈는 태풍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며,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다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로스——!"
"——무녀님!!"
아로스의 외침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멀어지는 시즈의 실루엣을 향해 다시 달려들려는 찰나, 샤비트의 근위대들이 연거푸 앞을 가로막았다. 앞에서는 그들의 방패가 벽처럼 드리워졌고, 뒤에서는 용인들의 기척이 땅을 뒤흔들며 밀려오고 있었다. 포위망이 점점 좁혀 들어왔다.
그러나 아로스의 눈은 이미 뒤집지 오래였다.
"아아아아아아아———!!"
울부짖듯 터져 나온 것은 더 이상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무자비하게 궤도를 튼 검이 눈앞을 막아선 근위병 하나의 목을 동강 내버리면서 붉은 선혈이 허공을 그었다. 그의 검은 더 이상 기술을 논하지 않았다. 오로지 무자비한 살육의 궤적만을 그리고 있었다. 이어진 두 번째, 세 번째 검격은 순식간에 방패를 깨뜨렸고, 뒤에서 달려드는 용인의 턱뼈는 팔꿈치의 휘둘림만으로도 단번에 깨졌다. 빛이 사라져 버린 청록빛 눈동자는 오직 눈앞의 적을 죽여버리겠다는 살의만이 검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로스는 미쳐버린 짐승처럼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도륙 내면서 시즈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돌진했다.
숨이 가빠질 틈도 없이 검을 다시 치켜들어 돌진하려는 순간, 라그나르가 튀어나와 아로스의 어깨를 물었다. 갑작스러운 고통에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아로스는 그저 자신을 방해하는 존재를 떨쳐내려는 듯, 라그나르의 안면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발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