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의 유혹 (1)

궤변

by 이샤라
이곳에 갇힌 지 닷새째. 아니, 그날 이후로는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밤과 낮의 경계도, 안과 밖의 구분도 희미해졌다. 처음엔 돌이 울었다. 곡괭이마다 메아리가 번졌고, 광맥은 우리에게 순순히 열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돌은 울지 않고 떨기 시작했다. 쩌렁쩌렁하던 바위는 마치 무언가를 토해내듯 진동했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누구도 그게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고, 말하려 하지도 않았다. 신조차 쓰러지면서 모든 것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지금 나는 요새 꼭대기의 다락방에 있다. 더는 올라갈 곳도, 내려갈 길도 없다. 아래에서 무너지는 소리는 사라졌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익숙하지 않은 울림만이 가끔 올라온다. 살아 있는 건 나뿐인 것 같지만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긴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내 숨소리조차 낯설다. 벽 너머에서 무언가 기어오르는 소리만이 아주 가끔, 잊힌 숨결처럼 스친다. 지금은—(내용 끊김)

누군가의 일기장
엘나력 4202년



나락의 유혹



어디까지 떨어진 것일까.


의식은 끝없는 추락의 감각 속에서 희미하게 깜빡였다. 붙잡으려 했던 손의 감촉, 마지막으로 들었던 절박한 외침, 그리고 손아귀에 남은 찢어진 천 조각의 감각만이 현실과 꿈의 경계를 붙잡고 있었다. 소중한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각 하나가 비수처럼 온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정신이 들었을 때 맞이한 것은 오직 짙은 안개뿐이었다. 여전히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검은 천은 시즈의 옷자락이었다. 바람에 찢긴 듯 너덜너덜해진 그것은 더 이상 온기를 품고 있진 않았지만, 희미한 숨결처럼 잔류해 있는 그녀의 이능의 기척만큼은 또렷했다.


아로스는 그 옷자락을 조심스레 벨트 한켠에 묶었다.


"...무녀님."


짧은 호명이 안갯속으로 삼켜졌다. 바닥이라 부를 수 있는 지면 위에 서있음에도 숨은 내쉴 때마다 무게가 걸리지 않는 듯한 부유감이 전신을 감쌌다.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발밑의 대지는 마치 싸늘한 시체처럼 온기가 없었다.


그 순간, 이질적인 감각이 아로스의 내면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차가운 열기, 혹은 뜨거운 냉기,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감각의 뒤섞임이었다. 심장은 계속 뛰었지만 그 박동이 어딘가 낯설었다.


불쑥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알 수 없는 갈증. 흐트러진 내면으로 다른 무언가가 억지로 비집고 들어와 그 자리를 채우려는 듯했다. 그 감정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른 채 아로스는 스스로에게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이 감정... 내 안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이 지독한 안개가 심어놓은 환상인가.'


불신으로 뒤섞인 마음속으로 낯선 파문이 번지는 찰나, 안개 너머 어딘가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르프록스 산의 동굴과 웰리드 강에서 스쳤던 영혼의 잔광. 그 빛이 어렴풋이 피어오르며 짙은 안개를 헤집고 아로스를 이끌었다. 광휘를 따라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자 동굴의 입구처럼 움푹 꺼진 공간을 발견했다. 빛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 입구는 어쩌면 함정일지도 몰랐으나, 아로스는 망설임 없이 안쪽으로 들어섰다.


공기의 흐름도, 소리도, 시간조차 멈춘 듯한 정적. 발걸음이 떨어질 때마다 공간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차원에 균열이 이는 듯한 이질감속에서 그는 동굴 따라 이동하며 다시금 영혼들을 보았다. 형체도, 목소리도 없는 그들은 주변을 맴돌며 미세한 기척으로 아로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아로스의 발밑을 스치던 안개들이 점차 진득하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의식의 테두리가 조용히 갉아먹히더니, 마치 단단히 잠겨 있어야 할 문이 안에서부터 삐걱거리며 열리는 듯했다. 불길한 기운이 아로스의 몸을 뒤덮자 공간 전체가 감정이 담긴 듯이 흐느끼기 시작하며 살아 있는 존재처럼 몸을 떨었다.


빛들은 하나둘 아로스를 중심으로 맴돌더니 다급하게 그의 몸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 행동은 마치 정화하려는 듯한 몸부림이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밀어내기 위함이었는지, 영혼들은 아로스의 몸에 닿는 순간 찬란하게 산화하며 사그라졌다. 영혼들이 그의 몸에 부딪히면서 사라질수록 통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죽을힘을 다해 달린 아로스는 빛 너머의 열린 틈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차원의 틈을 빠져나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자, 시야가 확 열렸다.


산허리를 붉게 감싼 듯한 거대한 도시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붉게 타오르는 불의 도시, 이그니카. 그 광경은, 도시라기보다는 대지를 녹일 듯한 거대한 용광로의 입구 같았다. 붉은 석재로 이뤄진 구조물들은 높게 치솟되, 첨탑의 뾰족함은 없었다. 굵고 둔중하면서 금속을 두드려 만든 듯한 굽이진 형상의 건축물들은 마치 불꽃의 파동에 맞춰 자라난 결정체들처럼, 안쪽으로 움푹 꺼져 있었다.


불의 숨결은 도시 전역에서 뿜어져 나왔다. 우측 멀리 우뚝 솟은 칼데라니아 화산의 실루엣이 흐릿한 열기 속에서 도드라졌다. 도시에서 한참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기는 열기와 매캐함으로 가득했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금속의 숨결과 잿빛 연기가 폐부를 찔렀다. 이어서 뒤를 돌아보자 빠져나온 균열 너머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규모의 벽이 하늘 끝까지 솟아 있었다.


불의 장벽.


마치 세계를 가르는 진홍빛의 강처럼 이그니카와 그 밖의 세계를 갈라놓고 있었다. 장벽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하늘 위에 무언가 떠 있었다. 무너진 섬 같기도, 혹은 흩어진 도시의 뼈 같기도 한 형체들이 공중에 매달린 채 붉은 폭포를 쏟아냈다. 하늘이 오래된 무언가를 피 흘리듯 잃어가는 광경이었다.


불은 온 세상을 무겁게 눌러 내렸다. 아로스가 숨을 들이쉬는 순간, 어딘가에서 그의 존재를 감지한 무언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땅 밑에서 울리는 둔탁한 떨림과 함께 다섯의 거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불길을 품은 암석이 얽힌 듯한 위압적인 육체, 몸의 이음새마다 용암빛 금속 문양이 새겨진 이들. 그들은 전선에서 만났던 거인 아마룬과 같은 존재들이었으나 불길 깊숙한 곳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흔적이 외형마다 각인되어 있었다.


망치와 쇠사슬이 부딪히면서 마찰하는 소리가 사방을 감돌며 메마른 땅바닥이 느리게 갈라졌다. 그들의 압도적인 체구는 말을 걸기도 전에 대답을 강요했고, 붉게 타오른 눈동자는 일말의 환영도 허락하지 않았다. 주변을 에워싼 거인들의 눈빛은 한결같았다.


'너는 이 땅에 들어설 자격이 없다.'


말은 없었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경고였고, 침묵은 선언 같았다.


그중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머리보다 커다란 주먹을 무릎께까지 드리우며 굵은 목소리를 바닥에서 긁어 올렸다.


"네놈은 어디서 온 누구냐?"


순간, 아로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그니카의 열기 속에서 피어오른 감정은 처음부터 분노도, 공포도 아니었다. 그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불길한 감각이었다.


"묻지 마라. 대답할 이유가 없다."


설명하는 것도, 입을 여는 것도, 모든 것이 거슬렸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에 깃든 감정은 날이 서 있었다. 상대를 깔아뭉개려는 말이 아닌, 오히려 자신의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필사적인 절제였다. 그 대답에 거인들의 눈썹이 일제히 꿈틀거렸다. 일부는 허리에 매단 망치를 집어 들었다. 공기가 철음처럼 떨리며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 불결한 숨결 속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지는군."


"응답 없는 자에게 관용 따위는 필요 없다."


거인들의 기운은 감정 없는 합창처럼 파고들었다. 아로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깨 위의 힘줄은 서서히 굳어가던 그때, 커다란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거인들을 밀어내며 나타났다.


암녹빛 갑주와 탑의 문양이 새겨진 망치를 허리에 찬 낯익은 존재는 아마룬이었다.


"멈춰라!"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과 동시에 다섯의 거인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아마룬은 아로스와 마주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익숙함과 당황이 섞인, 그러나 오래전부터 다시 만날 것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로스를 살피던 아마룬은 이내 결심한 듯 몸을 돌려 다른 거인들과 마주 섰다. 그러자 앞선 거인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발아래의 작은 돌들이 깨지면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걸음걸이마다 들려오는 울림은 마치 분노를 억누른 채 드러내는 경고음 같았다.


"형제여."


낮고 무감한 거인의 목소리에 찰나의 긴장이 번졌다.


"그대가 저 자와 면식이 있는 것은 알 바 아니다. 우리는 저 불길한 기운이 대지의 숨결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저런 불온한 존재를 가만히 둘 이유가 없다."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거인의 말에는 단죄에 가까운 냉정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망치를 허리춤에서 풀어내며 집어 들기 시작했다. 다른 거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돌이 금속과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붉은 눈동자들이 다시금 아로스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부탁한다, 형제들이여. 잠시 망치를 거두어줄 수 없나?"


아마룬의 목소리는 간절했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그는 다섯 거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 또한 저 자에게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을 알고 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우려가 무엇인지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하지만 저 자는—"


가장 앞에 있던 거인은 아마룬의 말을 자르고 다시금 되물었다.


"우린 이그니카의 위기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 위기를 앞둔 이 시점에, 왜 불길한 자 하나를 살려 두어야 하는 거지?"


"그는 환시를 품은 존재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일부 거인들이 미묘하게 움찔했다. 눈빛이 흔들린 건 아니었으나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던 무게감 속에 아주 미세한 파장이 번졌다.


"내가 책임지고 지켜보겠다. 저 자가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겠다."


잠깐동안 이어진 침묵을 끝으로, 망치의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들이 조금씩 느슨해지면서 거인들의 위협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아마룬은 그제야 다시 아로스를 바라보았다. 파도의 악마들을 막기 위해 전선에서 함께 섰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지금 눈앞에 서있는 그의 모습은 그날과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를 품은 듯했다. 숨겨진 힘 때문만이 아니었다. 불길한 기운 너머로, 아로스의 내면 어딘가에 뜯겨나간 감정의 공백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것이냐.'


아마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전우의 눈빛을 피하지 않은 채,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어둠이었다. 심연과 버금갈 정도로 깊고, 낮은 숨결조차 삼켜버리는 침묵. 시즈는 자신의 몸이 완전히 마비되었음을 깨달았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지하 깊이 내려갈수록 공기 속엔 가늘고 미세한 변화가 있었지만 이전에 겪었던 그림자들과는 결이 달랐다. 주교라 불리는 자의 술수 때문인지는 무언가 더 깊고 끈적하게 피부에 스며드는 기척을 느껴졌다.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안에서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 같은 감각. 그리고, 뒤이어 눈에 들어온 광경을 본 시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카타디오.'


멀게만 느껴졌던 도시의 기억이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되살아났다. 그 검은 도시의 기척에서 도망친 지 겨우 한나절뿐이 지나지 않았지만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결국...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던 걸까.'


기억을 되짚을 새도 없이 시야 한가운데에서 무언가가 미동했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그림자는 검보랏빛 로브를 걸친 채 천천히 시즈의 시야 안으로 들어섰다.


"눈을 뜨셨군요."


비디아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이상하리만치 공기 속에서 울려 퍼졌고, 그 울림 뒤에 숨겨진 결론이 먼저 마음을 짓눌렀다.


"제 예상보다도 훨씬 이른 회복입니다. 참으로 놀랍군요. 정말, 정말로 지금껏 봐왔던 제물들 중 가장 완벽합니다."


감탄으로 가득한 탄성에도 비디아는 웃지 않았다. 그저 기대했던 무언가를 확인한 학자처럼, 혹은 실험 대상에게서 자신이 원하던 수치를 얻은 듯한 묘한 만족을 입가에 머금을 뿐이었다.


"그 몸의 저항은 당신의 의지가 아닙니다. 그저 제게 허락받지 못했을 뿐이지요.”


시즈는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림자는 그녀를 조용히 감아 쥔 채 안으로 깊이 침잠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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