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의 유혹 (2)

대면

by 이샤라

도시 내부로 들어선 시즈는 한참을 더 지나서야 가장자리의 어느 외진 구역에 도착했다. 인적이 드문 그곳은 마치 폐허처럼 방치된 감시소와도 같았다. 통로의 갈라진 벽 또한 손보지 않은 지 오래된 듯 등불마저도 거의 없었다. 오직 그림자들의 기척과 희미한 석등 하나만이 공간을 밝혔을 뿐이었다. 시즈는 감각 너머로 스며드는 차가운 억압의 기운을 느꼈다. 숨겨진 장소와도 같은 그곳의 무거운 공기와 눅눅하고 오래된 돌 냄새 속에는 오래도록 억눌려왔던 누군가의 마지막 흔적이 희미한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이곳에 누군가 있었어.'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철창이 열리면서 시즈는 그림자들에 의해 조용히 내려졌다. 감옥과도 같은 내부는 차가운 돌로 이루어진 텅 빈 공간이었다. 움푹 패인 벽면과 바닥에는 누군가를 묶어두었을 철제 고리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녹슨 쇠비린내와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있었지만 그보다 더 짙게 깔린 것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 '남겨진 이들의 체념'이었다. 그들의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시즈는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자신과 같은 길을 걸었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스러져간 무덤이자, 이제 본인 또한 그들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잠시 후, 시즈가 감옥 안에 온전히 뉘어진 모습을 확인한 비디아가 떠나면서 샤비트에게 당부하였다.


"보름 내외로 돌아올 것이니 그 시간 동안 철저히 관리해 주십시오. 다만... 지나치게 반항한다면 상해 없이 기절시켜도 좋습니다."


비디아가 등을 돌려 도시로 돌아가는 길목에 이르렀을 때, 마지막으로 시즈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부디, 이곳에서 당신의 운명을 차분히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분의 위대한 전당에 입성하기 전에 무너지시면 곤란하니까요."


비디아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주변은 무거운 정적만이 맴돌았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다른 발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와는 다른, 그러나 등줄기를 찌르는 불쾌한 기척.


샤비트는 말없이 철창 앞으로 다가와 천천히 허공에 손을 뻗었다. 시즈의 얼굴을 향해 아주 가까이, 마치 그녀의 눈꺼풀이 떨리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하지만 이미 그림자에게 모든 감각을 차단당하고 있었던 시즈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샤비트의 얼굴에는 오랜 추격 끝에 마침내 사냥감을 손에 넣은 자의 지독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어둠은 깊었고 숨은 끊기지 않았다. 시즈는 자신을 짓누르는 절망과 이곳에 스며든 이름 모를 누군가의 체념 속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봉쇄실은 모든 것이 단조로운 공간이었다. 석재와 금속, 불의 문양으로만 이루어진 벽 위의 천장은 낮았고, 단상 위로는 정교하게 돌을 조각해서 만든 거대한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곳이 누구의 말이 중심이 되는지는 공간 자체가 보여주는 듯했다.


방 안의 정중앙에 앉아 있는 아로스의 주변은 불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로스는 그 불꽃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열기 없는 불꽃들은 무언가를 태우지도, 뜨거운 숨결을 내뿜지도 않았지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불편한 감각을 일깨웠다. 그 정적 속에서 천천히 쌓인 긴장감 위로, 봉쇄실의 두꺼운 벽 너머 어딘가로부터 천둥이 울렸다. 먹구름도, 비도 없이 터지는 음울한 굉음. 단 한 번뿐이었지만 무언가가 도시 위를 긁으며 스쳐 간 듯한 울림이었다.


아로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도시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예감에 호응하듯, 멀리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그 무게감만으로 주인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발소리였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 보폭은 조금 전 느꼈던 기묘한 접근과 겹쳐지며 아로스의 감각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봉쇄실이 열리는 순간, 주변의 불꽃들이 잠시 입구를 향해 시선을 돌려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다시 조용히 가라앉으며 아로스에게로 돌아갔다. 아마룬은 일렁이는 불길은 안중에도 없는 듯 묵직한 걸음을 옮겨 단상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무거운 침묵을 두른 채, 아로스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독방은 지낼 만 한가?"


그 말은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어내려 한 작은 농담이었다. 반응하나 보여주지 않는 아로스의 모습에 아마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변을 밝히는 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불은 정화를 위해 붙여둔 불이다. 물리적으로 태우는 불이 아니란 말이지. 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도시가 가만히 놔두질 않는 것 같더군."


아마룬의 말에 불빛이 살짝 떨렸다. 아로스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을 향한 불의 움직임도 피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아마룬 또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봉쇄실 안을 눌렀지만 이내 아마룬은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혼자 왔나."


대답 없는 침묵만이 돌아왔다. 아로스의 곁에는 부재한 것들의 잔영이 나타난 것처럼 불꽃의 그림자만이 길게 드리워졌다.


순간, 바깥 복도를 따라 또 다른 기척이 천천히 다가왔다. 기척이 가까워질 때마다 방안의 불꽃이 움츠러들더니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에 튀겨지는 듯이 노란 잔류가 일기 시작했다. 열려있는 문밖으로 거인만큼이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동시에 공기 속의 노란 잔류들이 구름 속에서 번지는 작은 천둥처럼 번져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오르드가 들어섰다. 공기 중에 튀고 있는 전격의 원인은 그의 손에 들려있는 커다란 망치에서 흘러나온 듯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망치에는 예사롭지 않은 벼락이 둘러져 있었다. 오르드가 방 안에 완전히 들어오는 동시에 봉쇄실의 문은 저절로 닫혔다. 그는 말없이 정면을 향해 걸어 나아가 단상 위에 놓인 돌 의자에 앉았다. 누가 안내하지 않아도 그 자리는 원래부터 그의 것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아마룬은 오르드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인 뒤, 조용히 아로스를 향해 말했다.


"현재 이그니카를 다스리는 신, 오르드 님이시다."


거인만큼이나 거대한 오르드의 체구는 상당한 크기의 돌 의자를 가득 채웠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아로스를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더니, 마침내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환시를 품은 존재라 들어 뭔가 다를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평범하군."


오르드의 말은 돌을 던지는 것보다 조용했지만 마치 기대가 무너진 자의 냉정한 단언처럼 차가웠다.


"필멸자 하나에게 기대해야 하냐는 철기장들의 우려가 이것 때문이었나."


그 말에, 아로스 또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날카롭게 노려보며 받아쳤다.


"그런 당신에게도 제가 기대할 만한 뭔가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말을 조심 해라!"


아마룬은 아로스의 태도에 격앙하여 꾸짖듯이 외쳤다. 그 모습에 오르드는 아마룬에게 시선을 돌려 재밌다는 듯 가면 아래로 미소를 지었다.


"요즘 필멸자들은 하나같이 전부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보군. 그대와 함께 왔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소년이 처음 날 보자마자 따지듯이 묻는 것도 그렇고 말이야. 아, 지금은 어엿한 도시의 사제가 되었지."


오르드의 말에 아로스는 전선에서 아마룬과 함께 이곳 이그니카로 떠났던 노아를 떠올렸다. 내심 안도했으나 노아가 도시의 중심을 잡는 사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는 표정에 약간의 놀라움이 묻어났다. 그 모습에 오르드는 아로스의 모습을 좀 더 면밀히 살피면서 말을 이어갔다.


"역시, 내면에 뭔가 비집고 들어간 게 확실하군. 무엇이 네놈의 감정을 쥐락펴락 하는 거지?"


"모릅니다."


아로스는 차갑게 대꾸했으나 속으로는 오르드의 지적을 인정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상대가 아무리 거칠게 굴어도 몇 번이고 인내한 뒤에야 날을 세웠을 터였다. 조금 전의 반응은 평소의 자신답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란 말이군. 하지만 지금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너를 질책도, 심판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니 말이다."


오르드는 거대한 양손을 깍지 낀 채 아로스를 향해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너에게는 이곳의 상황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이미 밖에서 수없이 많은 것들을 봐왔을 테니 말이다. 그동안 겪어왔던 것들에 대해 말해 보아라."


잠시동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아로스는 그간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몇 달 전 안식교회 인근의 무덤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길고 조용한 고백이 이어졌다. 언령의 속삭임을 따라 시작된 여정, 아우로라의 무녀 시즈와의 만남, 그리고 심연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마주했던 참혹한 진실까지. 그는 자신이 겪어 온 모든 것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끝나자, 단상 위에 앉아있던 오르드는 깊은 고뇌에 빠진 듯이 가면을 부여잡으며 아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티아... 그 밑바닥으로 추락하고도 여전히 욕망에 좀 먹혀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군."


탄식처럼 터져 나오는 말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와 피곤함이 찌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아로스는 신들 또한 필멸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너의 말대로라면... 결국 모르티아가 카노라스를 잠식했다는 것이로군."


오르드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단순한 탄식이 아니었다. 신의 입을 통해 나온, 거의 믿고 싶지 않은 결론이었다.


"카노라스에 있는 나의 동료들을 휘감아 신계에 남아있던 바트라를 노리게끔 만들고, 대지의 붕괴를 막기 위해 우리가 희생하여 만든 아나릴과 결합된 엘나는... 여지껏 감정을 잃은 상태였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봉쇄실 안은 다시금 깊은 정적에 잠겼다. 오르드는 천천히 손을 들어 가면의 이마 부분을 짚었다. 금이 간 세계의 경계선을 어루만지듯 신중하고 느린 그 움직임은, 마치 신조차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그 모든 희생은 무엇을 위함이었나.'


마음속으로 수천 번을 되뇌었을 의문이었다. 엘나가 자아를 가졌다는 사실조차 납득하기 힘든 마당에, 설령 그녀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한들 망가진 세계의 원형을 회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오르드는 자신이 이곳에 남은 이유를 다시 떠올렸다. 먼 옛날, 불의 심판이 끝난 이후 북부의 땅에서 최초로 바트라를 섬겼던 필멸자들. 바트라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자신의 권능을 기꺼이 받아들인 그들에게 유일한 축복을 내렸고, 오르드는 친우와의 약속을 위해 이 땅을 지키겠노라 맹세했다. 그러나 세계는 다시금 무너졌고, 지금은 겨우 필멸자 한 명에게 그 모든 실마리가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오르드는 몸을 뒤로 기대며 아로스의 품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응시했다.


"네가 지닌 환시의 등불... 지금은 어떤 상태지?"


아로스는 품속에서 조심스럽게 등불을 꺼내 들었다.


"평소에는 작은 불씨만이 머물러 있습니다. 다만, 언령이 내려온 곳을 가리키거나 엘나의 흔적에 가까워지면 평소보다 불씨가 더 크게 타오릅니다."


오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유독 강렬하게 빛나던 순간은 없었나? 혹은 특정한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말이다."


“언령을 향하는 순간마다 강한 빛이 방향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강하게, 불길처럼 타올랐던 순간이 두 번 있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였지?"


"심연으로 추락하던 순간, 그리고... 심연 깊은 곳에서 루드레스라는 사자를 마주한 순간입니다."


루드레스. 그 이름이 공중에 흩어지는 순간, 가면 너머에서 아주 오랜 기억의 실이 끌려 나오는 듯했다.


"그 사자... 제가 본 순간에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상태였습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속죄하는 듯이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르드는 숨을 내쉬며 과거의 기억을 감은 실타래를 풀어나갔다. 그 실타래 너머로, 또 다른 이름이 떠올랐다.


루드비히.


유폐된 사자의 신전에 홀로 남겨진 존재. 바트라가 불의 심판으로부터 끝까지 지켜낸 마지막 사자이자, 심연으로 추락한 루드레스의 쌍둥이 형제. 다른 죄인들과 달리 유일하게 심판을 면했지만 그가 있는 신전으로 향하는 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열쇠는 바트라가 쥐고 있었으나 그는 신계에 고립되었고, 신계로 통하는 네 개의 관문은 15년 전의 전란으로 이미 붕괴된 지 오래였다. 관문을 재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운철 각인'마저 이그니카의 내분 당시 하카르가 훔쳐서 달아나 버렸다.


오르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아로스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겪은 고난은 앞으로 마주할 미래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지도 몰랐다. 봉쇄실의 불꽃이 고뇌하는 신의 심정을 대변하듯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무겁게 입을 뗐다.


"아무래도 회합을 다시 열어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원탁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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