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의 유혹 (3)

부정

by 이샤라

이그니카의 문양이 그려진 바닥 앞에 멈춰 선 오르드는 전격이 흐르는 망치를 들어 올려 한치의 주저도 없이 문양을 내리쳤다. 금속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진동하면서 붉은 선들이 문양을 따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 열기들이 바닥 틈 사이를 타고 깊은 곳으로 흘러들자 이그니카의 바닥 어딘가에서부터 묵직하고 낮은 울림이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공간의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소리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맞물리며, 정교하게 이어져 나가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 거대한 울림이 끝나는 순간 오르드는 고개를 돌려 아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이번 회합의 중심이 될 것이다. 따라와라."


아로스는 말없이 그를 따랐다. 망치가 찍힌 자리에 남은 열기가 발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아마룬이 천천히 뒤따랐고, 각기 다른 세 그림자가 원탁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전과 화산을 연결하는 대교를 건너 화산 아래에 지어진 대장간 앞에 도착하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대장간 입구가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면서 뜨거운 열기를 뿜는 용광로와 공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돔 아래의 중심에는 이그니카의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원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원탁 주위를 둘러싼 무겁고 거대한 바위 의자에는 이미 도착해 있던 거인들이 자리마다 앉아 있었고, 아로스는 그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이그니카를 지탱하는 철기장 들이었다. 도시 앞에서 만났던 다섯 명의 거인들의 위세도 어마어마했지만 원탁에 앉아 있는 스무 명에 달하는 거인들의 모습은 굉장히 위압적이었다. 아마룬과 같은 강대한 거인들이 한 장소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 옆으로, 원탁 바깥의 작은 불빛 아래에 홀로 앉아 있던 한 누군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의사의 옷이 아닌 붉은 문양이 그려진 사제복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로스를 발견한 노아의 얼굴에는 몇 달 전 함께했던 시절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환하게 피어났다. 어쩌면 입을 열어 재회의 인사를 외칠 뻔했는지도 모른다. 반가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오른손이 가볍게 들리려는 찰나, 노아는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고 서둘러 들뜬 마음을 달랬다. 환한 미소는 잦아들며 들려던 손은 조심스럽게 내려갔지만, 눈동자 속에서는 여전히 반가움과 안도, 그리움이 뒤섞여 번졌다.


노아는 말없이 아로스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모든 감정을 접어두고 지금 이 자리에 어울리는 인사의 틀 안에 감정을 억눌러 넣은 조용한 몸짓이었다. 아로스도 그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 또한 작게 인사를 건넸겠지만, 노아의 모습을 보니 시즈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라 그녀에 대한 걱정이 심장을 짓눌렀다.


잠시 후, 원탁 앞에 도착한 오르드와 아마룬이 빈자리를 채우고 아로스가 그 사이에 자리하자 몇몇 거인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로스를 노려보며 오르드에게 말했다.


"오르드시여. 저 자의 몸에서 느껴진 기운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절대 이 땅 위에 존재하는 힘이 아닙니다. 불의 문양을 품은 자라면 더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거칠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끝에는 감출 수 없는 불신과 격앙이 스며 있었다. 이어서 또 다른 거인이 덧붙였다.


"불의 도시는 오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도시뿐만이 아니라, 대지는 이미 부패에 침식되어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물며 더럽혀진 자가 이곳에 서있는 것은... 저희로선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말은 곧 다른 거인들의 조용한 고개 끄덕임으로 이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아마룬과 노아의 표정은 삽시간으로 굳어져 갔다.


"그대들의 불신은 이해한다. 허나, 이제는 들어야 할 때다. 이 자가 걸어온 길과 그간 짊어진 진실의 무게를 말이지."


오르드의 말이 끝나자, 모두의 시선이 아로스에게로 향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믿는 것은 당신들의 몫이니 알아서 판단하길 바란다."


아로스는 봉쇄실에서 오르드에게 했던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숨김없이 원탁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전했다. 그의 말이 끝났을 때, 회합장에는 잠시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감돌았다.


잠시 후, 마침내 잠잠했던 침묵이 깨지면서 원탁 사이로 마주한 거인들로부터 작은 떨림이 퍼져나갔다.


"대지의 어머니께서... 감정을 잃으셨다니요."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이는 적갈색 피부의 거인 세르논이었다. 그는 유독 다른 거인들과 달리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모습이었다. 중후한 목소리는 분명 떨리고 있었고, 본인조차 그 떨림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흙과 숨결로 빚어진 종족입니다. 그런데 감정을 잃었다고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다른 거인이 원탁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는 거친 숨결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르드시여, 묻겠습니다. 저 필멸자가 말한 '엘나의 변질'이 사실입니까? 만약 저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방금 전에 한 말은 우리를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시선들이 일제히 아로스에게 꽂혔다. 하지만 아로스는 어느 하나 반박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본 것들을 말했을 뿐이다."


또 다른 거인 하나가 이를 악물고 오르드에게 물었다.


"어째서 우리가 그 진실을 모르는 겁니까? 우리의 시작이 이 땅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분의 마음이 망가졌다는 말을 왜 저런 외지인의 입을 통해 처음 듣는 겁니까?"


아로스는 차갑게 거인들을 응시하며 대신 답했다.


"당신들이 말하고 있는 '어머니'라는 존재는 이미 오래전에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그건 더 이상 이 땅에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아."


쾅———


순간, 원탁 한 면이 흔들리면서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울렸다. 화를 참지 못한 한 거인의 단단한 주먹이 원탁을 내리치면서 주변에 화강암 파편이 나뒹굴었다.


"그 입 닥쳐라!"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돔 아래로 쩌렁쩌렁 울렸다. 억누르지 못한 감정의 무게는 더 혼란스러운 파동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로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감정이 격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망치를 손에 든 오르드가 벌떡 일어섰다.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저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르드가 경고하듯이 원탁을 망치로 내려치자, 원탁을 부순 거인의 앞으로 벼락이 떨어졌다. 박살 난 원탁의 균열로 떨어진 벼락은 그 아래에 놓여 있던 망치와 집게를 단번에 박살 내버렸고, 산산조각 난 도구 조각들은 거인을 향해 폭약의 파편처럼 튀어 날아갔다.


"그는 이 자리에서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쓸모없이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 아닌 미래를 위한 결단이다!”


불같은 호통이 떨어지자 회합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지금의 침묵은 의심을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이들의 침묵이었다.


거인들의 감정이 누그러진 것을 확인한 오르드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이 땅에서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파도의 악마들과 울루니아들, 왜곡된 불을 휘두르는 광신도들도 모자라서 우리를 저버린 이들과의 전쟁까지 치르고 있으니 아무리 거인이라 하더라도 쉽지 않겠지."


오르드 말에 일부 거인들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불꽃과 망치가 새긴 영광스러운 흔적으로만 가득한 줄 알았던 그들의 상흔들 사이에는 무언가 다른 결의 흉터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강력한 충격에 바위가 깨진 듯한 움푹 팬 자국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미세하게 금이 간 위태로운 균열들이었다. 영광의 흔적이 아닌 이질적인 힘이 남긴 치유되지 않는 상처였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 자는 얼마 전에 현 불꽃의 사제와 아마룬이 증언한 대로 환시를 품고 사선을 넘어 돌아온 인간이다. 엘나의 선택을 받아 언령의 뜻을 쫓고 있지. 무너지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해답은, 적어도 그가 향하는 길 어귀에 놓여 있다."


오르드는 아로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환시를 품은 이여. 네 말대로 언령이 인도하는 바가 틀리지 않다면 이 땅에서 마지막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유폐된 사자의 신전뿐이다.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기 위한 열쇠는 바트라의 손에 있지. 그는 현재 신계에 갇혀있다. 또한, 그 신계로 향한 네 개의 관문은 모조리 파괴된 상태라는 것은 이 세상 모두가 알고 있을 터."


회합실 곳곳에서 거인들의 시선이 교차했다.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은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운철 각인을 되찾기 위해 아트마로 가야 한다. 그 물건은 내가 안개의 땅으로 오면서 가져온 특별한 물건이지. 주먹만 한 크기의 검은 정육면체로, 바닥면엔 나를 비롯한 신들이 쓰고 있는 가면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 세계의 물건이 아니기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이용하면 신계와 관문을 다시 한번 연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됩니다!"


어딘가에서 거친 반박이 튀어나왔다.


"관문과 신계를 연결하는 힘은 대지의 어머니의 힘으로 지탱되는 것이었습니다. 각인 하나로 그 복원을 시도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도박입니다!"


"듣자 듣자 하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군."


오르드는 노골적인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더 좋은 방안을 내놓아라!"


화를 참지 못한 오르드의 고함이 떨어지자, 순간적으로 대장간 전체가 천둥에 휩싸인 듯이 굉음과 함께 진동했다. 바닥의 바위와 벽면에 매달린 석등이 흔들렸고, 천장의 돔으로부터 먼지가 흩뿌려졌다.


"거인은 엘나로부터 비롯된 존재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존재가 아니었나? 그렇다면 그 자부심을 위해서라도, 대지를 살리기 위한 방법을 하나라도 더 모색해야 될 순간이 아니더냐!"


오르드는 거인 하나하나를 훑으며 쏘아붙였다. 그 말끝은 뼛속을 찌르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이 땅은 지금도 썩어가고 있다. 세계의 맥을 지탱하던 근원은 사라졌고, 심연은 대지의 숨줄을 끊고 있다. 헌데 그대들은, 겨우 '근본을 부정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필멸자 하나를 몰아붙이고 있단 말이냐? 그러고도 진정 엘나의 자손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격노한 신의 일갈에 더는 반박할 수 없던 거인들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자리에서 몸을 가라앉혔다. 한참 동안 그들을 바라보던 오르드는 흥분을 가라앉힌 뒤 말끝을 누그러뜨렸다.


"더 이상 대지는 전과 같지 않았다는 것을 그대들 스스로가 훨씬 더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과거의 잔재 하나에 목을 매고 눈을 가리려는 것인가?"


아로스는 침울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거인들을 바라보았다. 오만한 태도는 자신들이 엘나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거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내면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감정은 생명의 숲에서 엘라마를 만난 순간에 느꼈던, 스스로도 알지 못한 '비어 있는 여백'을 채운 감정이었다. 그가 품에서 천천히 환시의 등불을 꺼내 들자, 작은 불빛은 평소의 청록빛이 아닌 밝은 초록빛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안개처럼 피어오른 빛은 거인들을 감싸 안기 시작했고, 그 형상은 마치 자식을 감싸 안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생명의 숨결을 내쉬는 듯한 그 빛은 상처 입은 거인들의 몸에 새겨진 균열 위를 따라 흘렀다. 그 안에는 틀림없이 오래전 대지의 기억이 깃들어 있었다. 거인들은 당황한 듯했지만, 누구도 그 빛을 거부하지 않았다.


"...엘라마?"


오르드가 낮게 중얼이자, 환시를 품은 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육신은 남쪽에 뿌리내려 새로운 생명들을 위한 삶의 터전이 되었지만... 영혼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오르드는 봉쇄실에서 들은 라사리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엘나의 자애로움을 간직한 채 사라졌던 엘라마와 조금 전 보았던 환시의 등불에서 흘러나온 빛. 그리고,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아로스에게서는 봉쇄실에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태고적의 엘나가 남긴 감정의 잔향. 그 기운은 너무도 익숙했고, 다시는 느낄 수 없으리라 여겼던 것이었다.


"...환시를 품은 이여. 너에게 모든 짐을 지우고 싶지 않지만... 모든 것은 정말로 네 손안에 달린 듯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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