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관문
...'검은 늑대'라 불리는 우리에 대해선, 타리안의 칠흑빛 갑주를 두른 전사들이 늑대의 형상을 띠고 싸운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전해진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진정한 본질은 따로 있다. 우리는 사자의 길을 거절했던 늑대의 왕, 바르그의 힘을 계승한 자들이다. 불의 심판 이후, 전쟁의 여신 카야의 은총 아래 우리는 그분의 권속으로 거듭났으며, 그중에서도 바르그의 선택을 받은 전사들은 짐승의 본성을 넘어서 여신의 곁을 지키는 자로 일어섰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를 멸시한다. 신을 배신한 피를 이어받고도 여전히 그 곁에 서 있는 우리의 존재를 모순이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선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신념은 여신을 향해 있고, 우리의 발걸음은 오직 그분의 곁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만약 이것이 태초의 늑대가 내린 마지막 선택이라면, 우리는 그 운명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검은 늑대의 수장 라그나르의 선언문 中
죽음이 깃든 카노르 평원의 남부.
달빛은 칠흑처럼 어둡고 메마른 대지 위로 서글픈 그림자를 드리웠다. 달빛에 스치며 번진 검보랏빛 안개만이 죽지 못한 원혼처럼 부패한 기운이 대지를 유영하는 듯 이따금씩 아지랑이처럼 느리게 흘렀다. 뿌리조차 거부한 균열진 틈새에서는 어둡고 끈적한 장기가 대지의 상처 밖으로 기어오르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썩은 대지가 깊은숨을 토해내는 듯했다.
그 황량함의 심장부, 요새 타리안은 외롭게 서 있었다. 불타고 썩어 검게 굳은 성벽엔 부패자국만이 얼룩져 있었다. 한때 '최후의 방패'라 불렸던 영광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며, 남은 것은 오직 생존을 향한 처절한 저항의 흔적뿐이었다.
죽음의 바람을 가르며 터져 나온 구슬픈 울음이 대지를 흔들었다. 깊은 상처를 입은 거대한 늑대가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든 채 끝 모를 슬픔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늑대의 품에는 칠흑빛 창에 관통당한 채 쓰러진 누군가 있었다. 창에 꿰뚫린 존재의 형체는 생기를 잃고, 바람에 흩날리는 재처럼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고의 존재였다. 타리안의 마지막 등불이자 자신의 권속을 지키려 했던 여신. 그녀의 무너짐은 곧 이 요새가 버티던 마지막 이유의 소멸이기도 했다.
그들과 요새 사이의 광활한 벌판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칠흑빛 대검이 땅에 박혀 있었다. 칼날은 빛을 잃고 흙과 먼지로 흐려졌지만, 중심에 박힌 붉은 보석만은 여전히 희미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마치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 그 고동은 희미하고도 미약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늑대의 신음이 깊어질수록 보석의 고동 또한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마치 타리안에 남은 마지막 희망이 꺼져가는 것처럼.
그 모든 광경을 누군가 요새 성벽 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과 어둠 사이로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내면의 고통과 비통함이 서린 시선은 말없이 늑대와 쓰러진 존재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어깨는 무거운 상실감에 짓눌린 듯 보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옷자락은 이 황량한 밤 속에서 고독을 감싼 휘장처럼 가만히 흔들리고 있었다.
시즈와 아로스는 쉬지 않고 3일 밤낮을 달리고 있었다. 들리는 것은 오직 거친 숨소리와 말발굽 소리뿐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기척은 끈질기게 등 뒤를 따라붙었다.
처음에는 조용했다. 전선을 떠나 나흘째 되던 날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괴이한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 무렵이었다. 북쪽을 향해 움직이던 무리들이 어느 순간 방향을 바꿨고, 그날부터 길은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몸 전체가 칠흑처럼 어두웠고, 길게 구부러진 뿔이 뒤틀린 머리 위로 솟아 있었다. 윤곽은 짐승에 가까웠으나 그 존재는 명백히 이질적이었다. 꿈속에서 걸어 나온 악몽의 생명체처럼 어딘가 현실의 규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로스는 놈들을 볼 때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들이 뿜는 기운은 단순한 적의가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위협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은 감각의 깊은 층을 자극하는 본능적인 경계였다.
그렇게 긴장감이 극에 달하려는 순간, 시야 앞에 거대한 기둥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폐허의 중심에 선 잔해는 고요히 땅 위에 누워 있었다. 기둥은 엄청난 힘에 의해 산산조각 난 듯 갈라져 있었고, 단면은 날카롭게 찢겨진 채 깊은 생채기와 균열로 가득했다. 그 흔적은 세월의 풍화가 아닌 15년 전의 파괴가 남긴 상처였다. 본래의 높이는 무너져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멀리서 봐도 엄청난 크기를 가진 잔해의 직경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했다.
신계 '데오르 니아'와 지상을 잇던 네 개의 관문 중 하나인, 신계의 남쪽 관문이었다.
"아... 저곳은..."
시즈는 다리아의 속도를 늦추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은 잿빛 돌무더기에 불과했지만 무너진 구조물은 그녀의 기억 속에서 다르게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 고위 무녀들이 신계로 향하기 위해 서쪽의 관문으로 향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관문 너머로 번져오던 숨결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외였고, 그 순간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처럼 느껴졌었다.
평소 같았다면 망설임 없이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더군다나 신계로 향하는 길이 이토록 참혹하게 무너졌는데... 나의 기도가 대체 어디에 닿을 수 있단 말인가.
시즈가 애달픈 표정으로 폐허에서 시선을 거두자, 아로스가 조용히 물었다.
"무녀님, 괜찮으십니까?"
"네. 아직은 견딜 만해요."
시즈는 담담히 대답했지만, 창백한 얼굴과 메마른 입술은 한계가 가까워졌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추격 속에서 잠도,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사흘 동안의 강행군은 그녀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아로스는 시야를 옮겼다. 무언가 방법이 없을지 주위를 둘러보던 중, 시야 끝에 부패로 반쯤 썩은 나무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모습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 선택지 외에는 없었다.
"서둘러 저 다리 너머로 가십시오."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로스는 기름 먹인 천과 부싯돌을 꺼내며 대답했다.
"저희가 다리를 건넌 뒤에 불을 붙여서 무너뜨릴 겁니다."
시즈는 주저하지 않고 다리로 향했고, 아로스도 그녀의 뒤를 빠르게 따랐다. 두 사람이 다리를 건넌 직후, 아로스는 준비해 둔 천 조각을 썩은 기둥 틈에 밀어 넣고 불을 붙였다. 기름에 적셔진 썩은 나무는 금세 불길에 휩싸였다.
화르륵——
불꽃은 삽시간에 다리 전체로 번졌고, 이내 다리는 균열을 내며 비명을 지르듯 흔들리다가 산산조각 나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뒤를 쫓아오던 뿔 달린 검은 짐승들이 무너진 잔해 앞에 멈춰 섰다. 놈들은 더 이상 건너오지 못하고, 절벽 너머에서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 순간, 선두에 서 있던 한 마리가 멈춰 섰다. 몸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전신이 안에서부터 격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근육은 뒤엉키듯 비틀렸고, 뼈마디는 기형적으로 돌출되며 흐느적거렸다. 그리고 놈은 두 발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마침내 드러난 얼굴은 인간의 형상을 흉내 내려다 실패한 듯 일그러져 있었고, 기이하게 찢어진 구강 안에서는 가래 섞인 숨이 들끓고 있었다.
"그르르륵... 켁, 흐... 흐르아아아악...!"
그 소리는 짐승의 울음이라기보다는 찢긴 몸에서 튀어나온 원초의 신음에 가까웠다. 울음인지 고통인지 구분도 안 되는 그 비명은 공기마저 일그러뜨릴 듯 불규칙하게 퍼져갔다.
아로스는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놈들이 단순히 쫓아오는 짐승이 아닐 것이라는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다행히 지금은 다리 너머로 그들이 건너오지 못한다는 사실이 작은 안도감을 주었다. 절벽 아래로 무너져 내린 다리는 그들을 막을 유일한 장벽이었고, 이제는 잠시나마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로스는 폐허를 바라보며 말했다.
"관문 주변이 저토록 깨끗한 걸 보니, 아직 저곳의 기운은 부패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오늘은 저곳에서 하룻밤 쉬어야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루라도 더 빨리 타리안으로 가는 게ㅡ"
"안됩니다."
아로스의 목소리가 시즈의 말을 단호히 끊었다.
"무녀님도 쉬셔야 합니다. 말들도 지쳤습니다. 사흘을 밤낮없이 달린 상황에서 강행군은 모두에게 무리입니다."
"...알겠습니다."
시즈의 눈빛에는 여전히 망설임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 너머로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피로가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관문 아래에 도착하자, 그 참담함이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바람이 조각난 폐허 사이를 통과할 때마다 멎은 전장의 메아리 같은 스산한 소리를 흘렸고, 그것은 마치 신들의 분노와 상실이 아직도 얼어붙은 채 남아 있는 듯했다. 부패조차 그 경계 너머에서 맴돌기만 할 뿐, 끝내 완전히 들이닥치지 못하고 있었다.
아로스는 빠르게 움직였다. 낡은 천막을 펼치고, 바닥을 정리했으며, 간단한 침구 자리를 깔은 뒤 조용히 시즈를 눕혔다. 시즈는 한 마디 저항도 없이 몸을 맡겼고, 눈을 감은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고단함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짧고도 귀한 휴식이 찾아왔다.
아로스는 한동안 그 곁에 머물렀다. 시즈의 얼굴 위에 깃든 평온이 너무도 낯설어, 그 평온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조심스럽게 등을 돌려 천막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밤하늘은 무심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별빛은 조용히 떨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고, 그 고요함 속에서 정적은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아로스의 내면 깊숙이 스며들었다.
40일에 가까운 여정 동안 그는 시즈의 말에 기대어 움직였다.
'언령을 향한 그 여정 속에서, 귀공의 잃어버린 기억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시즈는 그렇게 말했고, 아로스는 아무런 반론도 없이 따랐다. 기억이 없는 그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밤, 문득 생각이 달라졌다. 정말 그것으로 충분했던가. 그저 사명을 향해 걷다 보면, 내가 누구였는지 알게 될까. 그 모든 걸 잊고도 이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피로를 느끼지 않는 육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반응 속도. 검을 쥔 팔은 흔들림 없이 강인했지만 그 안에 남아 있는 '자신'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은 있었지만 스스로가 누구를 사랑했고, 무엇을 잃었는지, 그 모든 것은 공허한 바람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로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의지처럼 쥐어져 있는 이 힘이 도리어 자신을 인간 아닌 것으로 규정짓는 굴레처럼 느껴졌다. 이 힘은 누굴 위한 것일까. 내가 원한 적이 있었던가. 그저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단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만으로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머릿속이 서서히 무너졌다. 생각은 하나의 목소리로 응집되지 못한 채 흩어졌고, 그 조각들이 칼날처럼 그의 내면을 찢고 있었다. 다시 눈을 뜨면서 바라본 하늘은 잿빛과 자수정빛이 섞인 채 펼쳐져 있었지만, 그 아래를 걷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도 낯설었다. 이 모습으로 여전히 이 땅에 남아 있을 진실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조차도 누군가로 인해 만들어진 운명이었을까.
기억이 없는 그는, 결국 자기 의지조차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한참을 앉아 있었다. 밤은 점점 더 깊어졌고, 별빛은 사라지지 않은 채 그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아로스는 눈을 감은 채 사라진 기억들이 아닌 지금 자신의 가슴속에 남은 질문 하나를 오래도록 붙들고 있었다.
'나는 정말, 이 세계에 속한 존재인가.'
그러나 고뇌는 오래가지 못했다.
피유우웅——
밤공기를 찢고 날아든 금속성의 파열음이 생각의 결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아로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며 화살을 피했고, 화살이 날아든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추적자들이었다. 놈들은 또다시 두 사람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지긋지긋하다'는 감정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왔다. 여기까지 쫓아온 놈들의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번개처럼 스쳤지만, 지금은 그런 분노에 휘둘릴 순간이 아니었기에 이를 악물며 억눌렀다. 아로스는 재빨리 천막으로 돌아가 시즈를 흔들어 깨웠다.
"무녀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추적자들이 쫓아왔습니다."
시즈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비몽사몽 한 눈빛, 그리고 눌러도 지워지지 않는 피로가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침묵 속에는 이 끝없는 추격전이 주는 스트레스가 그대로 배어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시즈는 한숨을 내쉬며 재갈을 쥐었고, 두 사람은 다시 말을 몰아 타리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오래 버텨주지 않았다. 달려 나간 비탈길 아래 양옆으로 늪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밤의 습기 속에서 피어오르는 그 늪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강한 독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며, 광경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시즈가 다급하게 외쳤다.
"귀공, 저길 보세요!"
늪 주변에는 불과 몇 시간 전 두 사람이 보았던 뿔 달린 짐승들이 모여있었다.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오듯 모여든 수십 마리의 짐승들은 아로스와 시즈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시작에 불과했다. 더 멀리, 두 사람 앞에서도 또 다른 추적자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