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과 늑대 (2)

무너진 성역

by 이샤라

긴박감이 한순간에 온몸을 옥죄었다. 앞 뒤로는 추적자들이, 양옆은 독기로 가득 찬 늪과 광포한 짐승들. 쇳소리를 내며 땅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조차 이제는 심장을 짓누르는 압박처럼 다가왔다.


아로스의 머릿속에서 갈등이 휘감았다. 정면 돌파? 아니면 우회? 하지만 늪은 이미 넘을 수 없는 벽처럼 그들을 감싸고 있었고, 선택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정면을 가로막던 추적자들 뒤편에서, 바람을 가르는 거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의 형상을 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예리한 송곳니를 드러낸 채 망설임 없이 추적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짧고 처절한 비명이 터졌고, 놈들은 비탈 아래로 내던져져 뿔 달린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다. 모든 것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이해할 틈도 없이 벌어진 상황으로 아로스의 눈빛이 흔들리는 순간, 뒤에서 시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수인들입니다! 타리안이 가까워졌어요!"


두 사람의 옆으로, 검은 털로 뒤덮인 늑대의 형상이 스쳐갔다. 짙은 갑주를 걸친 그 수인은 네 발로 달리며 근육질의 몸을 낮게 밀어붙이고 있었고, 그 움직임은 칼날처럼 날카롭고도 정밀했다. 그중 한 수인이 가까이 붙어 나란히 달렸다. 짐승의 형상이 남은 얼굴 속에서 번뜩이는 회색빛 눈동자는 한밤의 어둠마저 꿰뚫을 만큼 깊고도 날카로웠다. 그는 아로스에게 다가와 코를 들이댄 뒤 짧고 깊은숨을 들이쉬었고, 이어서 굵고도 거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흘러나왔다.


"시스테나에서 온 이들인가?"


"그렇습니다. 혹시... 타리안의 전사들이신가요?"


시즈가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선두에 선 수인이 입꼬리를 비틀며 대답했다.


"그냥 전사가 아니지. 우리는 '검은 늑대'다."


그의 말이 끝나자, 검은 늑대들이 삼각형의 대형을 그리며 일제히 지면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곧 결계에 닿을 것이다. 너무 놀라지 말도록."


선두에서 달리던 수인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시야 저편에 붉은빛과 푸른빛이 교차하는 거대한 아우라가 물결처럼 일렁이며 드러났다. 숨을 쉬는 것처럼 맥동하는 그 빛은 공간의 틈을 직조하듯 반원을 그려내고 있었고, 그 자체로 하나의 벽이었다.


결계를 통과하자, 두 사람의 피부를 타고 흐르던 무겁고 탁한 공기가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마치 어둠에 잠긴 긴 꿈에서 깨어나는 듯 혼탁한 기운이 사라지자 시즈는 반사적으로 입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맨 얼굴로 깊이 숨을 들이마신 그녀의 눈이 크게 열리며, 놀람과 탄성이 섞인 숨결이 흘러나왔다.


"공기가... 달라요."


시즈의 목소리는 놀라움보다는 경외에 가까운 떨림이 묻어 있었다. 독과 죽음의 안개가 깔려 있던 외부와는 달리, 차갑고 투명한 공기로 가득한 안쪽은 마치 시간이 멈춘 정원의 중심 같았다. 부패의 독기조차 결계 너머로 스며들지 못하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맑아진 시야의 지평선 너머에서 타리안 요새가 압도적인 실체를 드러냈다. 칠흑빛으로 둘러싸인 그 요새는 마치 강철의 심장을 품은 생명체처럼 스스로 숨을 쉬는 듯 위압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우측으로 뻗은 성벽은 산맥과 맞닿아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성벽을 감싼 암흑빛 강철은 태고의 전쟁을 견딘 껍질처럼 음울한 빛을 띠고 있었다. 단순한 방어 구조물이라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위협과 맞서 싸우기 위해 깨어난 '의지' 그 자체 같았다.


요새의 웅장함에 말을 잃은 채 나아가던 찰나, 어두운 대지 위에 웅크린 형상이 시야 끝에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늑대였다. 아마룬조차 작게 보일 거대한 덩치의 늑대가 아무런 기척 없이 누워 있었다. 몸에는 칠흑빛으로 뒤틀린 창들이 무자비하게 박혀 있었고, 검은 고름처럼 응고된 피가 대지 위에 말라붙어 있었다.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 침묵은 오히려 살아있는 존재보다 더 큰 위화감을 뿜어냈다.


"쳐다보면 안 된다. 그냥 앞만 보고 달려라."


수인의 경고가 칼날처럼 꽂히자 시즈와 아로스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보이지 않음에도 느껴졌다. 거대한 형체에서 흐르는 죽음보다 깊은 무게. 그와 동시에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다는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스며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시선이 아니었다. 침묵의 틈 사이로 웅크린 맹수의 숨결처럼,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는 확신할 수 없는 불안감. 그 늑대가 진정 죽은 것인지, 혹은 기묘하게 숨을 죽인 채 다음 무언가를 꾸고 있는 것인지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침내, 요새의 입구에 가까워지자 해자 위로 무거운 쇳소리가 퍼졌다. 고요한 공기를 갈라내며 성문이 천천히 열렸고, 견고한 다리가 큰 소리와 함께 내려왔다.


"타리안에 온 것을 환영한다."


검은 늑대들 중 하나가 성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부심으로 단단히 눌러 담긴 말투 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시간과 전쟁의 흔적이 묻어 있었으며, 두 사람은 무언의 압박 속에서 걸음을 내디뎠다.


타리안은 오직 수인들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그들은 타 종족에 대해 본능적인 경계심을 품고 있었지만, 시즈가 발을 디뎠을 때 누구 하나 눈을 흘기거나 입을 굳히지 않았다. 아우로라의 무녀라는 존재가 지닌 오래된 약속과 신뢰가 이곳에서도 유효하다는 듯, 수인들의 시선은 조용히 그녀를 지나쳤다.


반면, 아로스에게는 조금 달랐다. 대놓고 적대하거나 경계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수인들이 그를 스쳐갈 때마다 은연중에 그 기척을 살피는 듯 짧게 눈을 맞추거나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마치, 냄새 너머의 '무언가'를 감지한 듯 이름 모를 불안을 삼키는 방식 같았다.


강철로 이루어진 요새의 대로 위로 주민들과 검은 늑대들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교차하는 발걸음 속에서, 시즈는 타리안으로 오는 길에 품었던 의문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여러분은... 부패에 닿아도 괜찮으신가요?"


그 질문에 검은 늑대 한 명이 고개를 돌리며 시즈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대답은 담백했다.


"우리 검은 늑대들은 안개의 땅에서 가장 위대한 늑대, '바르그'의 힘을 받은 전사들이다. 그분의 힘은 부패조차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며 자연스럽게 독기를 몸 밖으로 밀어내는 힘도 지니고 있지."


검은 늑대의 말은 사실이기도 하고, 믿음이기도 했다. 시즈는 그의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은 검은 늑대들의 팔과 다리를 조심스럽게 훑었다. 부패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달리는 동안 묻었던 먼지조차 요새의 기운에 닿자 서서히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불필요한 것들이 자연스레 벗겨지듯 그들의 몸은 단단한 갑옷처럼 견고했고, 짙은 갈기는 은은한 윤기를 띠었다.


그리고 잠시 뒤, 타리안의 내부로 들어선 아로스와 시즈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 바깥에서 마주한 요새의 위용은 내부 도시에 들어서자 더욱 뚜렷하게 실감 났다. 정면으로 이어진 대로는 마치 거대한 대장간에서 한 덩어리의 강철을 두드려 뻗어낸 듯 반듯하고 단단했다. 표면에는 오래된 흔적들이 조용히 새겨져 있었고, 그것은 흡사 오랜 세월을 살아남은 대지의 무늬처럼 느껴졌다.


대로의 중심부에는 한 쌍의 석상이 도시의 심장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전쟁의 여신 카야와 그녀의 곁을 지키는 거대한 늑대 바르그. 카야는 무언의 고함처럼 웅장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갑옷은 그녀의 신체를 감싸는 동시에 의식을 품은 칼날처럼 보였고, 어깨너머로 흐르는 망토는 전쟁의 여신이 지녔던 위엄과 은총을 모두 품고 있는 듯했다.


얼굴은 입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삼중으로 뻗은 형상의 가면으로 덮여 있었다. 그 구조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형태를 한눈에 정의 내릴 수 없게 만들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이질적이고, 신성하면서도 위협적인 형상을 지닌 여신은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늑대 바르그가 자리하고 있었다. 거대한 몸은 여신의 몸을 감싼 채 근엄한 자세로 서 있었고, 돌로 빚어진 눈은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웠다.


서쪽에는 하늘을 위로 솟아오른 장대한 장벽 아래로 콜로세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의 벽면에는 단순한 석조 구조가 아닌 하나하나의 표면마다 수인 형상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바람에 깎인 조각조차도 아직 그 위엄을 잃지 않은 듯했다.


시즈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바람이 대로를 따라 불어와, 무쇠 같은 차가운 냄새를 실어 나르며 그녀의 뺨을 스쳤다. 쇳내는 오래된 상처처럼 도시의 벽과 돌 위에 배어 있었고, 칼날을 문지른 듯한 공기의 떨림이 피부로 전해졌다.


'이곳이 바로 타리안... 평원의 최후의 방패...'


그러나 발걸음이 깊어질수록, 눈앞의 장엄한 모습에 차오른 감정은 이내 무거운 침묵으로 뒤덮였다.


대로를 따라 안쪽으로 나아가자 처음에는 위용처럼 보였던 풍경이 조금씩 균열을 드러냈다. 무너진 강철벽들이 도로 옆으로 주저앉아 있었고, 건물의 잔해들은 이곳이 오랫동안 재난과 침식에 노출되어 왔음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았을 땐 완연했던 콜로세움도 가까이 다가서자 실상이 드러났다. 가려져 있던 반대편 외벽은 절반이 무너져 내부의 구조물과 계단들이 갈라져 있었고, 잔해 속에는 녹슨 창끝과 부러진 투구들이 흩어져 있었다. 특히 동쪽 방향의 외곽 성벽은 마치 대지를 삼킨 격랑이 휩쓸고 간 듯, 흔적조차 남지 않은 채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뿐이었다. 암석은 깊게 파여 있었고, 절벽 아래로 이어진 협곡은 어둠에 잠긴 채, 그 깊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장 비극적인 것은 도시 중심에 서 있는 여신과 늑대의 석상이었다. 여신의 형상은 마치 무너진 기도처럼 보였다. 대검을 바닥에 세운 양손은 검자루를 감싸고 있었으나, 왼팔은 어깨부터 부러져 있었다. 그 부서진 팔이 놓였어야 할 자리는 공허하게 비어 있었고, 어깨에서 가슴으로 번진 균열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꺼낸 고통처럼 표면을 갈라놓고 있었다.


늑대 또한 그 위용을 거의 잃어버린 채였다. 등에는 깊은 금이 가로로 파여 있었고, 균열은 여러 갈래로 퍼지며 몸통을 감싸 안듯 이어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 마치 거대한 발톱이나 창에 찍힌 상처처럼 보이는 그 틈새로는 바람이 스치며 먼지를 몰고 흩날리고 있었다. 한때는 이 도시의 중심이자 신화의 핵심이었을 그들이 이제는 무너진 채 침묵 속에 남아 있었다.


시즈는 입술을 꽉 깨물며 석상을 바라보았다. 슬픔과 경외가 뒤섞인 눈동자는 어딘가 떨리고 있었고, 가슴속에서부터 일어나는 말 없는 탄식이 그녀를 잠식했다. 아로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돌의 균열을 따라 흐르는 빛과 그림자를 눈으로 좇으며, 오래된 전쟁의 흔적을 되새기듯 석상을 바라봤다. 말은 없었지만, 눈동자 속에는 수많은 상념이 얽혀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침식이 아닌, 신을 부러뜨릴 정도의 거대한 전쟁의 상흔이었다. 대체 무엇이 이 성역을 이토록 무자비하게 파괴해 버린 것인가.


그때, 느릿하고도 무게감 있는 발걸음 소리가 회랑의 돌바닥을 타고 번졌다. 마치 절벽 아래서 불어오는 오래된 바람처럼 낮고 깊은 울림이 귀를 간질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발소리의 주인은 오래된 나무 지팡이를 짚은 늑대 인간이었다.


그의 검은 로브는 해묵은 침묵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주름지고 흉터가 깊게 패인 얼굴은 여느 수인들과 달리 완전한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목 주변을 덮은 갈기는 밤의 그림자를 머금은 듯 짙었고, 그 어둠 사이사이로 세월의 흔적인 듯 하얗게 센 털이 흐릿하게 섞여 있었다. 단단하게 여문 노목 같았다. 꺾이지 않고, 구부러지지도 않은 채 깊게 뿌리내린 형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 전체를 가로지른 뒤에도 끝내 시선이 멈춰 선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눈이었다. 빛바랜 검은 갈기 아래에서 조용히 반짝이는 눈동자. 흑진주처럼 은은한 광택을 품은 그 눈은, 색보다 깊이가 먼저 다가왔다. 그 안엔 번뜩임도, 분노도 없었다. 대신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을 통과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차분한 통찰과, 조용히 가라앉은 지혜의 결이 깃들어 있었다.


아로스는 순간적으로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그것은 적의를 품은 기운도, 압도적인 기세도 아니었다. 그 시선은 어딘가 차갑고도 따뜻했다. 깊은 우물처럼 맑으면서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그런 모순된 평온이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늑대 인간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깊은 동굴에서 울려 퍼지듯 공간을 가득 메웠다.


"사선의 강에서 돌아온 이와... 서쪽 땅의 무녀께서 이곳을 찾아오셨군요."


그 음성은 선언이었고, 동시에 환영이었다.


"저희에 대해... 알고 있으셨나요?"


"알다마다요. 특히 사선의 강에서 돌아온 전사, 환시를 품은 이여."


늑대 인간의 눈빛이 조용히 아로스에게 옮겨졌다.


"직접 마주하니, 이제야 언령의 의미가 또렷해지는군요."


그 말에 아로스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문득, 전선에서 헤어진 아마룬의 말이 떠올랐다.


타리안에는 아주 나이가 많은 전사가 한 명 있다. 보자마자 바로 느낌이 올 거다.


낯선 요새의 중심에 서있는 신비로운 늑대 인간. 그는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고르면서 늑대 인간의 눈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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