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과 늑대 (3)

노병 라그나르

by 이샤라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라그나르입니다."


노년의 늑대 인간은 부드럽고도 품격을 머금은 손짓과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목소리는 낮고도 온화했으며 단단한 연륜이 어조 곳곳에 스며 있었다. 그는 전사라기보다는 시간을 건너온 현자에 가까워 보였다.


그 순간, 검은 늑대들 중 한 명이 앞에 나섰다. 그의 모습은 약간 위압적이었다.


"라그나르 경이라 존대해라."


명령은 아니었지만 이곳의 질서와 태도를 조용히 짚는 듯한 말투였다. 아로스가 말없이 먼저 인사를 하자, 시즈도 잠시 눈을 깜빡이다 빠르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그나르 경."


라그나르는 검은 늑대들을 나무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제 일선에서 물러난 노병일뿐일세. 강요는 그리 좋은 것이 못 되지. 무례는 사과드리겠습니다."


겉으로는 겸손했지만 이곳에서 그의 위치가 어떠한지는 굳이 말로 확인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검은 늑대들의 태도, 회랑을 채운 공기, 그리고 침묵 속에 머무른 경외감. 분명 이 노인은 타리안의 맥을 잇는 존재였다.


라그나르는 곧 시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은 고단함은 숨길 수 없을 만큼 뚜렷했다.


"그전에... 무녀님께서는 우선 휴식을 취하셔야 할 듯싶군요."


평소 같았다면 시즈는 예의를 차리며 사양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의 몸과 마음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고, 그 무게를 더는 감추려 하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시즈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가슴께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야기는... 적어도 반나절쯤 뒤에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그나르는 자신의 뒤편에 서 있던 수인을 향해 손짓했다.


"자이론, 손님들을 정중히 안내해 드리게."


"예, 알겠습니다."


자이론이라 불린 수인은 라그나르에게 고개를 숙인 뒤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시즈의 몸이 휘청이며 무너지자 아로스는 곧바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망설임 없이 등에 업었다.


"오늘은 그냥 푹 쉬시죠. 노아를 만났던 마을 이후로는 단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셨습니다."


"네......"


시즈는 간신히 대답한 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의식이 가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조용히 잠에 들었고, 그 숨결은 아로스의 어깨를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잠시 뒤, 세 사람은 타리안의 객실에 도착했다.


자이론이 안내한 객실은 따뜻한 공기가 감도는 공간이었다. 벽은 오래된 나무 패널로 덮여 있었고, 바닥에는 두툼한 털가죽이 깔려 있었다. 침대는 짐승의 털로 덮인 방석과 담요로 채워져 있었으며, 낮게 깔린 조명은 황혼빛처럼 공간을 은은히 물들였다. 공기 속에는 타리안 특유의 수지 향이 스며 있었고, 그것은 오래된 숲의 냄새처럼 낯설면서도 편안한 기운을 풍겼다.


아로스는 시즈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혔다. 흩어진 머리칼이 베개 위로 내려앉았고, 그녀의 숨결은 점점 느려졌다. 얼굴엔 평온함이 어려 있었지만 지난 여정의 피로가 그림자처럼 남아 있었다. 말없이 침대 옆 의자에 앉은 아로스는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시즈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자이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둘이 제법 가까운 관계로 보이는군."


...가까운 관계라. 아로스는 그 말이 낯설게 울리는 것을 느꼈지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그저 호위기사일 뿐이다."


"흠, 그런가. 내가 오해한 모양이지."


자이론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흥미를 거두자, 아로스는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하나 묻지. 타리안 밖에 있는 거대한 늪과 그 안을 돌아다니던 짐승들... 그것들은 대체 뭐지?"


잠시 입을 다문 자이론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조금 전 질문은 단지 설명을 구하는 게 아니었다. 그 기묘한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어딘가 감정이 섞인 물음이었다.


"그 괴물들을... 타리안에서는 '나스툴룬'이라 부른다. 짐승처럼 보여도 본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지. 놈들은 울루니아들이 이 땅의 동물과 강제로 몸을 섞거나 유린해서 만든 결과물이야."


"울루니아...?"


"카노라스에서 파도의 악마들과 함께 쏟아져나온 괴물들이다. 말 그대로 자연에서 비롯되지 않은 흉물이니, 살아 있는 오염이라고 보면 된다."


"일단... 단순한 야생 짐승은 아니라는 말이군."


"그렇지."


아로스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기형적인 모습에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자이론의 말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몸이 녹아내리는 파도의 악마들과 다르게 그놈들의 육체는 무너지지 않아. 시간이 흘러도 형태를 유지하지더군. 타리안에 들어오기 전에 지나쳤던 거대한 늪지대를 기억하나?”


"평원 위로 펼쳐져 있던 늪을 말하는건가."


"과거에는 '알루인 늪'이라 불렸지. 한때는 투명하고 맑은 호수였지만 지금은 생명이라면 누구도 버틸 수 없는 곳이 됐어. 땅도, 물도, 공기도 전부 오염되어 있어 우리조차 발을 들이기 꺼리는 곳이야. 하지만 놈들은 그 안을 제 집처럼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닌다."


자이론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짧게 고개를 젖혔다.


"그런 늪을 거침없이 가로지른 자는 지금까지 단 한 명뿐—"


그 순간, 침대 위에서 시즈가 작게 신음을 흘리자 아로스는 즉시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보였지만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고, 이마에는 엷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군."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자이론의 말과 함께, 아로스는 짧게 숨을 들이쉬며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노아가 건네준 작은 병이 낡은 양피지로 조심스럽게 감싸여 있었다. 그는 병마개를 풀어 수건의 중심에 약초물을 적셨고, 두어번 접은 뒤 시즈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약초의 서늘한 기운이 퍼지자 시즈의 미간이 조금씩 풀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모습은 그간의 여정 속에서 겪은 두 사람의 신뢰를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다. 자이론은 그 광경을 놓치지 않았고,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띤 채 조용히 일어섰다. 문턱에 다다른 그는 한 손을 걸쳐 문을 열면서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오늘은 이곳에서 푹 쉬어라. 놈들도 타리안 근처까지는 접근하지 못하니 안심해도 된다. 그럼 이만."


"잠깐—"


아로스가 반사적으로 그를 불렀지만, 자이론은 이미 방문을 닫고 사라진 뒤였다. 그의 마지막 말은 방 안에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어느새 방 안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아로스는 문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금 떠오른 의문 하나를 되뇌었다.


'늪을 거침없이 가로지른 단 한 사람이라...'


그게 누구였는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로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은 여전히 깊었고, 멀리서는 부패에 오염된 짐승들의 기괴한 울음만이 희미하게 메아리쳤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한기처럼 방 안으로 스며들자 다시 시선을 침대 쪽을 돌렸다. 깊은 잠에 빠져 든 시즈의 고른 숨소리가 조용히 방 안을 채웠고, 그 울림은 오히려 아로스의 마음을 조용히 정리해 주는 듯했다. 아로스는 천천히 의자에 몸을 기대 굳어 있던 어깨를 풀며 자신도 모르게 의자를 조금 당겨 시즈 가까이 앉았다.


'이 여정이 끝날 때까지... 과연 내가 이 온기를 무사히 지킬 수 있을까.'


손을 뻗었다가 이내 멈춘 그의 움직임은 이유 없이 조심스러웠고,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기도 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자 짙은 어둠 속에 희미한 새벽의 빛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빛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오며 어둠의 잔해를 밀어냈으나, 아로스의 마음속 어둠은 여전히 가라앉은 채였다.




빛 한 점 없이 잠긴 심연의 세계.


그곳은 영원히 잠들지 않는 어둠 속 어둠의 심부 같았다. 축축한 공기아래에 드리운 땅은 마치 죽은 것 같으면서도 발을 내딛을 때마다 살아 있는 듯 울컥이며 꿈틀거렸으며, 밟고 있는 것이 흙인지, 살인지, 무너진 시간의 층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이따금씩 그 어둠을 가르듯 검보랏빛 섬광이 터졌다. 빛은 심연의 장막을 찢어내듯 세계를 드러냈다가 곧바로 다시 그 어둠에 삼켜졌다. 그 섬광 속에서, 하나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즈마.


그 존재는 형상이라기보다는 불완전하게 뒤엉킨 생명체의 잔해에 가까웠다. 비틀리고 날카로운 뼈의 구조 위로는 뱀의 비늘, 가재의 갑각, 앵무조개의 껍질이 뒤섞인 듯한 외피가 감싸고 있었다. 등에는 날개라 부르기에는 길게 찢어진 채 구불거리는 듯한 검은 막이 퍼져 있었고, 팔은 말도 안 될 정도로 길게 뻗어 있었으며, 손끝에는 피도 살도 닿기 힘든 날이 자라 있었다. 그리즈마는 끊임없이 일렁거리는 듯한 형체 그 자체처럼 심연의 일부처럼 경계 없는 어둠 속을 거닐고 있었다.


마는 자신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도,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심연 그 자체처럼 그는 단지 존재했고, 본능을 쫓아 일렁이며 떠돌 뿐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단 하나였다. 자신보다 약하고, 망가뜨릴 수 있는 존재. 이곳 심연에서는 그조차 흔치 않았다. 어둠에 잠긴 것들은 모두 조용했고, 대부분은 그와 같거나 가끔은 그보다도 더 위험했다.


그러나 15년 전, 지상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을 때, 처음으로 심연을 벗어나 마주한 지상의 풍경은 그리즈마에게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매혹적인 낯섦이었다. 모든 것이 약했고, 쉽게 부서졌다. 하지만 그 연약함이 그리즈마의 관심을 더욱 깊이 끌어당겼다. 자신을 보고 도망치는 작은 생명체들, 두려움에 찬 몸짓, 지면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 같은 존재들. 그 모든 것들이 그리즈마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즐거움이자 참을 수 없는 유희의 대상이었다.


함께 올라왔던 틈새의 존재들 대부분은 강렬한 힘의 파동을 쫓아 북쪽으로 향했지만, 그리즈마의 시선은 다른 곳에 머물렀다. 차갑고 억압된 심연과는 달리 지상은 무한히 자유로웠고, 그리즈마는 그 자유를 만끽했다. 그의 손길에 유린당한 카노라스와 평원의 생명체들은 하나둘 형태를 잃어가면서 이형의 괴물로 뒤틀려갔다. 짐승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산산이 부서지며, 생명을 삼키는 광경을 연출했다.


그리즈마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몸을 떨었다. 기쁨 때문이었고, 파괴 그 자체를 지켜보는 완벽한 쾌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놓친 것이 하나 있었다.


카노라스의 깊은 곳.


지상으로 올라온 뒤, 처음으로 마주한 거인이 있었다. 크고 단단했지만, 살기 어린 눈빛을 마주하자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려버린 존재. 처음에는 단순한 사냥감이었다. 심연에서 갓 올라온 자신에게 도전하지 않고 도망친 첫 생명체. 그것만으로도 그리즈마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함께 있던 다른 거인들은 그를 가로막는 불필요한 장애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놈은 동료의 도움을 빌어 끝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고, 흥미는 금세 식었다.


그 후 그리즈마는 지상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생명을 유린하는 즐거움을 이어갔지만 끝은 결국 같았다. 부수고, 뒤틀고, 무자비하게 망가뜨렸지만 만족감은 점점 짧아졌고, 남겨진 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뒤틀린 괴물들뿐이었다. 그렇게 반복된 일상으로 인한 지루함은 다시 그를 심연으로 이끌었다.


그리즈마는 심연의 중심부를 향해 느릿하게 날아갔다. 정적은 시간마저 잠식한 듯 깊었고, 공기는 무겁고도 눅진했다. 그렇게 심연의 뿌리 한가운데에 도달하자 시야에 낡고 찢어진 예복을—한때는 위엄, 혹은 찬란했을지 모를— 입은 존재 하나가 들어왔다. 하관을 제외한 얼굴은 부식된 가면 아래 가려져 있었으며, 그을린 자국이 가득한 옷자락은 땅을 감은 기괴한 덩굴 사이를 스치며 희미한 빛을 반사했다. 가면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메마른 숨소리만이 공간 전체를 아주 낮게 울렸다.


추락한 신, 모르티아.


그녀는 깊은 어둠으로 물든 뿌리 틈마다 오랜 시간 동안 무언가를 반복해서 눌러 심고 있었다. 움직임은 느렸지만 반복적이었고 치밀했다. 그것들은 뿌리 속에서 부풀다 가라앉았고, 가라앉은 채로 뿌리 깊숙이 스며들어 갔다.


"어김없이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군. 대체 이게 뭐길래 그리 붙잡고 있는 거지?"


그리즈마는 모르티아를 향해 다가가며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무심했지만, 움직임과 말투에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과 얕은 조롱이 스며 있었다. 흉측하게 찢어진 입가에 맺힌 그 일그러진 웃음은 감정을 감추기엔 너무 노골적이었다.


"저능한 네놈에게 이해하길 바란 적은 없어. 이번에는 또 뭘 하러 온 거지? 심심하다는 이유로 날 귀찮게 하려고?"


일말의 흥미와 관심조차 묻어나지 않는 말투에 그리즈마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늘 지루하지. 이젠 바닷가의 유흥도 질려버렸다고. 그래서 늪이나 다시 다녀올까 하던 참이었는데, 문득 옛날 생각이 나더군. 커다란 늑대가 있던 곳을 기억하나?"


"...뭐라고? 늑대?"


"그래. 누워서 숨만 붙어 있는 늑대. 뭐, 문제 있나?"


모르티아는 움직임을 멈췄다. 기가 찬 표정과 함께 가면 아래의 눈빛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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