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얼룩진 기억
그러나 하늘을 가르던 빛줄기 사이로, 갑작스레 균열이 일었다.
대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탑 꼭대기에서 엘나의 빛이 사라지는 순간, 여신의 칼날이 흔들렸다. 그 틈을 비집고 검은 형체 하나가 천천히 몸을 틀며 부풀어 올랐다. 그 존재는 카야와 유사한 가면을 쓴 채 육체를 기형적으로 비틀어내며 거대한 형상으로 치솟았다. 마치 신의 형상을 닮았음에도 어딘가 부식되고 틀어진 낯선 권능이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은 여신을 향해 조용히, 그러나 압도적으로 밀려들었다.
라그나르는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 존재는 손을 뻗어 라그나르의 얼굴을 감싸 쥐었고, 손끝에서 실핏줄처럼 퍼져나간 암녹빛 섬광이 그의 관자와 후두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물리적인 접촉은 없었지만 두개골을 뚫고 정신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고, 라그나르의 의식은 마치 균열이 일어난 얼음처럼 산산이 조각났다. 이성과 감정, 기억과 자각이 속절없이 무너져버리면서 자아의 비명은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환시의 풍경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공간이 휘청였고, 모든 장면들이 녹아내리듯 일그러졌으며, 깨어진 거울조각처럼 환상의 층위가 부서졌다. 그리고 이내, 붉은 광휘가 거칠게 잦아들면서 충격적인 광경이 나타났다.
카야는 무너진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왼팔은 어깨 아래로 절단되어 있었고, 가슴과 옆구리에는 저주처럼 일그러진 형태의 검은 창이 비틀린 각도로 박혀 있었다.
그 앞에는 바르그가 서 있었다. 무수한 창에 온몸이 꿰뚫려 있었고, 살점은 찢겨 나가 뼈마디까지 드러났음에도 짙푸른 눈동자만큼은 꺼지지 않은 채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눈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여신에게 손댈 수 없다고. 거대한 늑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음에도 끝내 서슬 퍼런 송곳니를 드러낸 채 으르렁거렸다.
순간, 카야는 남은 힘을 짜내어 손을 들었다.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빛이 손끝에서 번뜩이며 거대한 대검이 하늘을 가르며 요새를 향해 날아갔으며, 대지에 꽂히는 동시에 결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분노를 참지 못한 이질적인 존재는 자신을 막아서는 바르그를 집어 들어 냉동댕이 친 뒤 다시 한번 검은 창을 뽑아 들었다. 마지막 일격이 여신을 향해 날아드는 순간, 그 존재는 갑작스레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고통의 울부짖음을 내지르던 그 형체는 어깨에서 불길처럼 일그러진 검은 날개를 펼치더니 카노라스를 향해 혼란스럽게 날아올랐다. 그 뒤를 따르던 파도의 악마들 또한 온몸이 뒤틀리며 형체를 유지하지 못했고, 오래 못 가 끈적한 점액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야는 점점 흐려졌다. 환시의 등불은 마치 눈꺼풀이 감기듯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꺼졌다. 너무 많은 것을 한 번에 마주한 탓일까. 아로스와 시즈는 말없이 눈을 마주한 채 짧은 숨만 내쉬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는 명확해졌다. 타리안을 휘감은 지금의 상처는... 바로 이 기억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편이 낫지요. 그래서 제 과거를 보여드렸습니다."
라그나르는 고개를 떨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눈동자에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겹겹이 서려 있었지만, 이내 감정을 추스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는 카노라스의 신들이 보내온 구원 요청을 받아 그곳으로 향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함정이었습니다. 카노라스의 생존자들은 분명히 증언했습니다. 그곳이 멸망하던 날, 어떠한 신도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이죠."
그의 시선이 멀리 검은 구름으로 가득 찬 북쪽을 향했다.
"진실의 이면을 찾아보려 했지만, 현실은 저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파도의 악마들이 밀려오는 것을 막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었습니다. 오랜 옛날, 이 땅이 역사 속 거대한 전쟁 당시 최후의 방패의 역할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엘나가 사라지면서 일어난 균열은 타리안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요새 동쪽의 협곡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라그나르는 시즈의 질문에 답을 한 뒤, 마저 이어갔다.
"타리안의 동쪽을 지탱하던 대지가 붕괴하면서 거대한 협곡이 형성됐습니다. 그 틈을 타 파도의 악마들이 남쪽으로 흘러나갔고... 우리는 그들의 진격로를 막지 못했습니다. 결국 남쪽 평원의 방어선은 무너졌고, 타리안은 더 이상 '평원의 방패'로 불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끝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일그러졌다. 한참을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던 라그나르는 깊은숨을 토해낸 뒤 천천히 고백을 시작했다.
"...보셨다시피 환시의 마지막 순간이 핏빛으로 물들었지요. 그때 저는 스스로를 잃었습니다. 환시의 등불은 두 분에겐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저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성을 잃은 짐승이 되어... 주군과 바르그께 발톱을 들이밀었습니다. 이미 한계에 달했던 그분께서는 저의 어리석은 폭주로 인해 더욱 큰 희생을 치르셔야 했습니다. 왼팔을 잃고, 흉측한 검은 창에 가슴을 꿰뚫린 그 순간에도... 주군께서는 마지막 남은 힘까지 짜내 타리안과 저를 지키기 위해 결계를 펼치셨습니다."
라그나르의 이야기가 이어질 때마다 시즈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목소리에 스며든 깊은 고통과 후회는 듣는 이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고, 말하는 순간마다 그가 겪었던 절망과 상실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마음 한 켠이 무너지는 듯한 먹먹함이 단어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었다. 지나간 사건의 설명이 아닌 아직도 그의 영혼을 갉아먹는 상처였으며, 치유되지 못한 채 지금도 생살처럼 아려오는 고백이었다. 시즈는 더는 상상 할 수 없었다. 그가 감당한 고통과, 버텨야 했던 심정이 얼마나 비참했을지를.
잠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라그나르는 목울대를 타고 올라오는 감정을 삼키면서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짐승의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면의 짐승을 깨우려 할 때마다 폭주가 시작되려 했지요. 그래서 저는 검은 늑대의 수장직을 내려놓고 이곳을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만... 타리안이 아직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고문으로서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그의 목소리에는 더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오래도록 눌러 삼킨 자의 체념만이 남아 있었다.
"조금 전에 사용하신 환시의 힘...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 요새 앞에 쓰러져 있는 여신님께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신님의 기억 속에 중요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즈는 조심스럽게 물음을 건넸다. 라그나르가 보여준 환시의 충격은 여전히 그녀의 뇌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닙니다만, 바르그께서 절대로 자리를 비키지 않으실 겁니다. 특히... 저에 대한 경계심은 하늘을 찌릅니다."
"......그렇다면 숨통을 끊어서라도 길을 열어야겠죠."
"숨통을 끊겠다니, 네놈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듯한 아로스의 대답에, 검은 늑대들이 노골적으로 반발하며 몸을 낮췄다. 그 눈빛은 경계가 아닌 분명한 살의였다. 라그나르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검은 늑대들은 진작에 아로스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타리안의 정예 전사라 불리는 이들의 힘은 바르그에게서 비롯되었을 뿐 아니라, 정신의 중심이자 신화적 본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라그나르는 조용히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키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역시 그 생각도 못해본 것은 아니지만... 제가 주저했던 생각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들을 줄은 몰랐군요."
"상징적인 존재를 쓰러뜨리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정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젯밤 이곳으로 오면서 전부 다 봤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늑대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검은 늑대들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굳어 있는 그들의 표정은 분노와 슬픔으로 교차했고, 라그나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선택지는 하나뿐인 것 같군요."
라그나르의 의도를 알아차린 자이론이 현실을 부정하듯 입을 열었다.
"장로님... 정말, 방법이 이것뿐입니까?"
목소리는 잠긴 듯 낮았다. 그 속에는 간절함보다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결말이 깃들어 있었다. 라그나르는 잠시 눈을 감은 뒤, 천천히 다시 뜨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네. 그의 말이 맞아.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지 않나."
그 말에 검은 늑대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대답 없는 침묵만이 그들 사이를 채웠고, 말보다 무거운 감정들이 짙게 깔려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온 그리즈마는 오랜만에 대지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러나 부패로 오염된 공기는 무거웠고, 숨이 폐 안에서 낡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검게 변질된 안개로 물들어 있는 하늘에는 광기 어린 독기가 가득 깃들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지상도 심연처럼 변화하리라는 아쉬운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곧, 그는 조금 전 생각을 털어내듯 어깨를 틀은 뒤 날개처럼 뒤틀린 막을 펼쳐 남쪽 평원으로 몸을 날렸다. 그 아래로 펼쳐진 대지는 생명을 잃은 듯 말라붙어 있었다. 썩은 진흙으로 뭉개진 늪, 시체의 기름처럼 들러붙은 검은 웅덩이, 들끓는 증오와 부패가 얼룩진 땅은 어느 방향에서도 생명의 숨결을 품고 있지 않았다.
그 위를 어슬렁거리는 것은 그리즈마가 지상의 생물들을 강제로 유린해서 태어난 이형의 짐승들이었다. 짐승이라기보다는 파괴된 생명과 본능이 부정하게 엉겨 붙은 파편들이었다. 어떤 것은 배가 터진 채 내장을 끌며 시체를 핥았고, 또 어떤 것은 제 동족의 다리를 물어뜯다 목덜미를 꺾였다. 더 끔찍한 것은, 그 무질서한 이형들이 심연에서 흘러나온 파도의 악마들마저 잡아먹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땅은 오염을 넘어 스스로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런 광경 한복판에서 그리즈마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무언의 손짓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배였다. 정신을 조이는 사슬, 마치 벌레가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것처럼 이형의 짐승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며 손짓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짐승들의 혼은 이미 그리즈마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리즈마가 짐승들을 이끌어 곧장 타리안을 향하려 하는 그때, 바람 사이로 스며드는 낯익은 떨림이 그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북쪽 어딘가. 기억을 뚫고 올라온, 오래도록 갈망하던 냄새 하나.
거인의 기운이었다. 그토록 찾고, 갈망했던 존재의 조각이 이토록 가깝게 느껴지다니! 몇 년 만의 외출이 뜻밖의 축제가 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은 모르티아의 흥미에 장단을 맞춰야 했기에, 그리즈마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그 거인을 뒤로한 채 이형의 무리를 이끌고 타리안이 한눈에 보이는 구릉 위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그리즈마는 천천히 손을 내려 짐승들의 구속을 풀었다. 자유를 되찾은 짐승들은 곧장 바람 너머의 기척을 감지했고, 본능은 이성을 앞질렀다. 온몸이 일그러지고, 등뼈와 뿔이 뒤틀리며 솟아났으며, 이빨마저 길게 자라나 스스로의 혀를 찢었다.
썩은 폐에서 토해진 포효와 광기, 굶주림이 얽힌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짐승들은 일제히 타리안을 향해 맹렬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아로스와 시즈, 그리고 라그나르와 검은 늑대들이 침묵 속에 발걸음을 옮겼다. 바르그가 있는 요새 앞으로 다가가자, 죽은 듯이 누워있던 거대한 늑대가 마침내 눈을 떴다.
바르그의 몸은 치명상으로 뒤덮여 있었다. 검붉은 피와 송진처럼 끈적한 검은 액체가 군데군데 굳어 있었고, 몸 곳곳에는 지독한 기운을 뿜어내는 수십 개의 검은 창이 어긋나게 박혀 살점을 찢고 튀어나와 있었다. 창마다 엉겨 붙은 살점과 고름이 말라붙어 있었고, 짐승의 거대한 체구는 마치 처형 직전의 사형수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얼굴을 가로지른 깊은 흉터에는 오래된 분노와 망각할 수 없는 고통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발톱으로 수십 번 그어낸 듯, 형체조차 흐려진 그 상처 위로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한때 순수했을 하늘빛 눈동자는 절반이 검게 물들어 있었고, 남은 한 조각의 희미한 빛마저 바람 속에 꺼질 듯 위태로웠다.
바르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통의 무게로 무너질 것 같은 육신을 끌어올리며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소리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깊은 상처에서 쥐어짜 낸 숨결과 함께 토해낸,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마지막 경고였다.
"......정말 이게 옳은 선택일까요?"
시즈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늘 당당하고 냉철했던 그녀조차 이 광경 앞에서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때, 바르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는 순간, 그 실체가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다. 짐승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거대한 육체였다. 키는 거인에 필적했고, 덩치는 상상을 초월했으며, 처참한 상처를 안고 있음에도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은 여전히 강렬했다. 그것은 단순한 짐승의 존재감을 넘어 신화의 공포가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