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과 늑대 (6)

타리안의 늑대들

by 이샤라

검은 늑대들은 걸음을 멈췄다. 발톱은 이미 거둬들였고,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신화 속의 왕이자 원초적 본능의 뿌리, 감히 이빨을 드러낼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 그들에게 바르그는 단순한 우상이 아니었다.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그 앞에 설 수 없었기에,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솟구친 경외가 그들을 단단히 사로잡고 있었다.


남은 건 아로스와 라그나르 둘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두 사람이 앞으로 다가가자, 바르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라그나르를 향한 그 시선은 단지 날카로운 경계가 아닌 분노와 증오였다. 오랜 원한이 본능과 맞물려 치솟았고, 라그나르는 그 무게에 잠시 발을 멈췄다. 주저가 길어지면서 아로스가 칼끝을 천천히 들이밀려는 그 순간, 바르그가 갑작스레 몸을 틀었다. 온몸의 털이 일제히 솟구치며 등뼈가 곤두섰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날카로운 으르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으르르르르르르릉...... 아르르르르르릉!!"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소리였다. 그 울림은 허공을 찢었고, 바람 속에 섞인 피 냄새를 일순에 일깨웠다.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으면서 아로스는 피부에 스치는 감각을 따라 순간적으로 몸서리를 쳤다. 그것은 낯설지 않은 기시감이었다. 타리안으로 오는 길목, 등 뒤를 끈질기게 핥았던 그 불길한 기운.


그리고,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지축을 흔드는 발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이형의 짐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마리에 달하는 이형의 괴물들. 사람과 짐승의 형태가 뒤섞인 그들은 발톱을 땅에 박고, 뿔을 들이받듯 치켜세운 채 광기에 젖어 달려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르그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검은 구름 사이로 숨은 달을 향해, 마침내 짐승의 포효가 터졌다.


"——아아아우우우우우오오오오——!!"


그 울음은 단순한 울음이 아닌 부름이었다. 핏줄을 깨우는 선율, 피의 기억을 뒤흔드는 전언.


바르그의 울음소리와 함께 검은 늑대들이 반응했다. 주춤하던 무릎이 굽혀지면서 회색빛 눈동자는 야수의 본능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근육이 솟구치듯 부풀었고, 짙은 털이 솟아올랐으며, 송곳니와 발톱이 날카롭게 뻗어 나는 그들의 모습은 점차 짐승에 가까워졌다.


"검은 늑대들의 모습이...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시즈의 목소리엔 놀라움과 불안이 섞여 있었다. 남아있던 인간의 형상이 녹아내리며 그 안의 짐승이 가죽을 찢고 나왔다. 그녀의 시선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점점 더 짐승에 가까워지는 전사들의 형체에 고정돼 있었다.


"바르그께서 권능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 힘은 전사들의 내면 깊숙한 곳의 짐승을 깨워 극한의 전투 상태로 끌어올리죠. 비록 오래가진 않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떤 필멸자도 그들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시즈는 라그나르를 바라보았다. 다른 늑대들이 야수로 변모하는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노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의문이 입안을 맴돌았으나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라그나르의 눈동자 깊은 곳에 서린 것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 그리고 세월을 넘어선 사무친 회한, 그리고 차마 건드릴 수 없는 내면의 상처. 시즈는 질문 대신 침묵을 택하며 고개를 돌렸다. 라그나르의 낡은 지팡이만이 주인의 마음을 대변하듯 조용히 떨리고 있었다.


그 사이, 타리안을 향해 돌진하던 이형의 짐승들이 드디어 결계에 닿았다. 카야의 결계는 짐승들의 진입을 일순 막아냈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결계에 들어서면서 움직임은 잠시 느려졌으나, 눈빛에 깃든 광기만은 더욱 짙어졌다. 짐승들은 앞다리를 갈기갈기 찢어가며 결계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라그나르는 곧바로 자이론에게 명령을 내렸다.


"바르그께서 외친 포효 때문에 성 안의 전사들이 모두 달려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일반 전사들은 나스툴룬들에게 버틸 수 없으니 검은 늑대들만 전장으로 나가고, 나머지는 성채의 방어에 전념하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장로님."


명령을 들은 자이론은 망설임 없이 성채 안으로 달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라그나르는 천천히 지팡이 손잡이를 뽑아 들었다. 가늘지만 날카로운, 서늘한 빛을 띤 검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자 시즈의 눈이 놀람으로 살짝 흔들렸다.


성채와 가까워진 이형의 무리들은 더 심하게 뒤틀리기 시작했고, 이어서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두 무리가 충돌했다. 짧은 숨, 단말마, 피와 살이 튀는 소리와 함께 맹수들의 전장이 열렸다.


뿔이 솟은 이형의 짐승들은 검은 늑대들과 맞붙자마자 광기에 젖은 움직임을 드러냈다. 그들은 틈만 보이면 몸을 양옆으로 갈라 뜨리며, 마치 상대를 통째로 삼키려는 본능에 이끌려 덤벼들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드러난 갈비뼈는 새까맣고 날카로웠고, 그것은 단순한 뼈가 아닌 휘어진 칼날 같았다.


하지만 검은 늑대들은 그 틈에 결코 잡아먹히지 않았다. 그들은 낮게 몸을 틀며 짐승의 틈을 유영하듯 빠져나갔고, 뒤따른 발톱은 정확히 짐승의 약점을 찔렀다. 파열음이 튀었고, 짐승들의 뼈는 차례로 부러져나갔다. 전장을 지배한 건 이형이 아닌 검은 늑대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싸움의 한가운데, 바르그가 있었다.


온몸에 창이 박힌 채, 피와 고름이 얽힌 상처를 짊어지고 있음에도 그는 거짓말처럼 민첩했다. 움직임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빠르고도 날카로웠으며, 거대한 앞발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이형의 짐승들은 허리가 끊어지며 쓰러졌다. 그의 턱이 닿은 것들은 발악조차 못하면서 그대로 파괴됐다. 이빨에 물린 순간 붉은빛과 푸른빛이 얽힌 불꽃으로 타올랐고, 재로 변한 뒤 대지 위에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바르그의 힘은 단순한 완력이 아니었다. 그 힘은 신화의 잔재이자 고대의 저주처럼 보였다.


바르그의 곁에서 싸우는 라그나르 역시 눈을 뗄 수 없는 존재였다. 스스로를 일선에서 물러난 노병이라 자처한 늑대인간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늙었다는 말은 단지 겉모습에만 해당될 뿐, 그의 몸은 전장에 최적화된 전사였다. 단 한 번의 동작으로 셋을 베고 흐트러짐 없이 다음 움직임으로 이어가는 그 모습에 문득, 아로스는 라그나르가 스스로 닫았다는 그 힘의 문을 연다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저것이 닫힌 문 너머의 힘을 억누른 검격이라면, 그 문을 열어젖힌 존재는 대체 어떤 괴물인 것인가.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그리즈마는 예상 밖의 전개에 당황하며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사실은 불쾌함을 안기는 동시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흥분을 끌어올렸다.


"어디, 나를 한번 즐겁게 해 봐라!"


그리즈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타리안의 상공으로 날아들었다. 결계에 닿자 불쾌한 기운이 몸을 감쌌지만 대수롭지 않게 떨쳐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르그와의 충돌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공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뒤엉킨 두 존재는 땅을 뒤흔들며 나뒹굴었고, 그 충격의 여파로 요새 일대가 뒤흔들렸다.


콰앙——콰과과과광————


그리즈마는 날카롭게 비틀린 양팔과 뱀처럼 휘감긴 꼬리로 바르그의 몸을 죄기 시작했다. 그 위로 창처럼 뻗은 검은 날개가 번쩍이더니, 그대로 내리꽂으며 바르그의 몸을 난폭하게 찔러대기 시작했다. 이미 수많은 창이 박힌 육신에 새로운 구멍들이 뚫리면서 바르그의 온몸은 점점 벌집이 되기 시작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바르그의 머리를 짓눌러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든 그리즈마는 이마 위에 감춰졌던 괴이한 눈을 천천히 열었다. 그것은 단순한 감각 기관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이빨로 뒤덮인 눈처럼 생긴 그 생체 기관은 혓바닥처럼 들썩이며, 안쪽에서 또 다른 눈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눈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잠식할 것처럼 혐오스럽게 꿈틀거렸다.


바르그는 고통에 겨운 울음을 토해냈다. 목구멍에서 터진 그 소리는 분명 비명이었다. 짓눌린 채 피를 흘리는 거대한 몸은 더는 일어설 수 없다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라그나르가 움직였다.


"——어딜 감히!"


손에 쥔 검이 섬광을 그리며 그리즈마를 향해 내리 꽂혔다. 그의 일격은 정확했고, 무엇보다 무자비했다. 흉측하게 갈라진 외피 위로 선홍빛과 푸른빛이 뒤엉킨 불꽃이 일었다. 깊숙이 패인 상처에서 나온 화염은 살을 태우면서 그 흔적마저 태우려는 듯 진득하게 남아 번들거렸다. 그 불길의 색과 흉터는 검이 베어낸 자국이라기보다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송곳니가 훑고 지나간 흔적 같았다.


"틈새의 미물 따위가, 우리의 상징을 더럽히려 드느냐——!!"


라그나르의 일갈이 전장을 가르듯 울려 퍼졌다. 칼날이 번뜩이면서 마지막 일격이 그리즈마를 향해 내려 꽂히자, 이내 그리즈마의 왼팔이 무참히 잘려나갔다. 바르그를 짓눌렀던 압박이 순간 느슨해졌고, 풀려난 바르그는 단숨에 육중하고 두꺼운 목덜미에 이빨을 꽂았다. 순간 검게 흐려져가던 바르그의 눈이 다시 푸르게 타오르며 그리즈마의 목에서 붉은 불꽃과 푸른 불꽃이 동시에 일렁였다. 불길은 살과 뼈를 동시에 태웠고, 그의 육체는 비틀리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즈마의 비명이 요새 벽을 따라 메아리쳤다.


"끄아아——르르르아악!! 크아아아아아악——!!"


죽음의 공포. 그것은 심연 밖으로 나온 이후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그리즈마는 본능적으로 바르그의 이빨을 떼어내며 몸을 비틀었고, 검은 피로 범벅이 된 채 땅을 박차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목덜미는 바르그에게 물려 절반쯤 찢어졌고, 사지는 라그나르의 칼에 도륙당한 뒤였다. 간신히 남아 있는 날개로 비틀거리며 날아오른 그 뒷모습은 포식자가 아니라 처절하게 도망치는 패배자에 가까웠다.


그리즈마가 도망치자 그의 피조물들도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이형의 껍데기가 벗겨지면서 본래의 흉측한 몰골을 드러낸 짐승들은 가죽과 뼈밖에 남지 않은 채 차례차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형체들은 검게 타들어가며 연기처럼 사라졌고, 잔재는 불타버린 악몽처럼 느릿하게 흩어졌다.


마침내 짐승들이 모두 쓰러지자, 검은 늑대들이 일제히 포효했다. 라그나르와 아로스는 서로를 바라보며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도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치명상을 가득 안고 가혹한 전투를 이어나간 바르그의 몸은 더 이상 부패의 침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격통으로 머리를 흔들었고, 흐트러지는 호흡과 함께 거대한 육체가 경련하며 떨리기 시작했으며, 목에서는 갈라진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맙소사......"


"안 됩니다. 바르그여, 제발......!"


검은 늑대들은 발톱을 세우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공포가 아니라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 누구도 바르그를 향해 발톱을 내밀 용기를 품지 못했지만, 오로지 아로스만이 주저 없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푸르게 불타오르던 하늘빛 눈동자에서 마지막 남은 빛마저 스러지면서 어둠으로 완전히 잠식된 그 눈에는, 더 이상 이성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 보이지 않았다.


검붉은 육편으로 범벅이 된 채 격렬하게 떨리던 바르그의 몸에서 울림이 피어오르더니, 그것이 점차 대기 전체로 퍼져나갔다. 뼈와 근육, 피로 굳어진 대지까지 함께 진동했다. 포효가 터지기 직전, 마치 무언가 안에서 끓어오르는 저주가 형체를 얻는 듯한 고요가 흘렀다.


그리고, 바르그는 고개를 젖혔다. 터져 나온 울음은 포효가 아니었다.


"——아아아우우우우우우오오오오——!!"


그 안에는 고통과 분노, 저항도 함께 녹아 있었다. 마치 상처로 가득한 영혼의 마지막 절규와도 같았다. 요새 앞은 그의 울음으로 가득 찼고, 검은 늑대들마저 그 비통한 외침에 흔들렸다. 포효가 끝나자마자 바르그는 아로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거대한 늑대의 움직임은 치명상 위에 치명상을 겹친 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절륜한 속도와 파괴력으로 가득했다.


콰아아아아앙——————


발톱이 휘둘릴 때마다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잘려나갔다. 바위는 마치 유리처럼 쪼개졌고, 땅은 날카롭게 갈라졌다. 그의 일격 하나하나가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 세상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그 힘은 생물의 것이 아닌 재앙의 파문이었다. 그 힘 앞에서 아로스는 대적조차 할 수 없었다. 움직임은 방어라기보다 회피에 가까웠고, 바르그의 맹렬한 공격 앞에서 점점 벼랑 끝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이성이 사라진 짐승의 본능과 그것을 붙들고 있는 마지막 힘. 그 모든 것이 겹쳐진 지금의 바르그는 신도 제어하지 못할 짐승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그나르는 결국 고뇌와 결단이 뒤섞인 얼굴로 칼을 고쳐 들었다.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지만, 바르그를 막아야 한다는 의지가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죄송합니다, 바르그시여. 부디 저를 용서하소서."


라그나르는 짧게 사죄의 말을 남기고 깊은숨을 들이쉬더니, 곧장 바르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눈동자는 떨렸지만, 검을 쥔 손만큼은 망설임이 없었다.




부서진 심장의 노래 1-2부 - 여신과 늑대 (7)로 이어집니다.
작가의 이전글여신과 늑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