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
부서진 심장의 노래 1-1부 - 여신과 늑대 (6)에서 이어집니다.
라그나르와 아로스가 동시에 나서자, 바르그는 전처럼 무차별적인 맹공을 퍼붓지 못했다. 그 거대한 몸이 잠시 멈칫하더니, 바르그는 이내 자신의 몸에 박힌 검은 창 하나를 입으로 물었다. 날카로운 이빨로 창을 단단히 물어 기다란 창이 뽑혀 나오면서 폭포처럼 붉은 흐름이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바르그는 고통이라고는 전혀 느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피에 물든 창을 입에 문 채 몸을 회전시켰고, 그대로 라그나르를 향해 던졌다.
"무슨......?"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로스는 경악했다. 눈앞을 스치듯 날아간 창은 하마터면 라그나르의 머리를 꿰뚫을 뻔했다.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바르그는 몸에 박힌 창들을 연달아 뽑아 던지고 또 던졌다. 아로스는 입을 다문 채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짐승의 육체로 어떻게 이런 전투가 가능한가. 말 그대로 이해의 경계를 넘어선 광경이었다. 바르그가 내던지는 창은 마치 폭풍우 속을 가르는 번개 같았으며, 한 번의 스침마저도 치명에 이를 만큼 정교하고 날카로웠다.
마침내, 바르그는 창 하나를 입에 단단히 물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 동작은 더 이상 짐승의 것이 아니었다. 창을 휘두르는 움직임은 야수의 난폭함이 아닌 숙련된 전사의 기예에 가까웠다. 거칠기보다 날카로운 그 동작 하나하나에는 허투루 낭비된 힘이 없었다. 휘몰아치는 그 움직임 속에서 아로스는 잠시 라그나르 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그의 검은 여전히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고, 미간에는 오래된 고뇌의 자국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반격을 할 수 있음에도 무엇인가가 그의 손끝을 붙잡고 있는 듯 보였다.
라그나르에게 있어서 바르그는 단지 적이 아니었기에 여전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임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짧은 망설임이 위기를 불렀다. 또 한 번 섬광처럼 날아든 창의 궤적은 아로스의 옆구리를 정통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라그나르는 숨도 쉬지 않고 몸을 날렸다. 검이 튕기듯 날아들며 둘 사이를 가로막았고, 두 개의 칼날이 바르그의 창과 동시에 부딪쳤다.
카아아아앙————
금속이 찢기는 비명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힘의 균형은 처음부터 기울어 있었다. 두 사람의 합이 완벽했음에도 바르그의 일격은 밀릴 줄을 몰랐다. 검 끝이 밀려나면서 중심을 잃은 두 사람의 발아래로 대지는 깊게 패여갔다. 단지 막아냈을 뿐, 거대한 늑대의 공격을 '받아넘긴 것'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단 한 차례의 일격이었음에도 끝없이 뒤로 밀려났다.
아로스는 숨을 고르기도 버거웠다. 팔 끝은 이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고, 숨결은 낡은 피리처럼 떨려왔다.
"라그나르 경! 망설일 때가 아닙니다!"
아로스는 안간힘으로 버티는 와중에도 외쳤다.
"마음을 독하게 먹으셔야 됩니다!"
그 외침에 무언가가 무너졌다.
"그읅... 그르으으윽......!"
라그나르의 몸이 천천히 부풀기 시작했다. 근육은 비현실적인 속도로 커지는 동시에 갈기와 송곳니가 자라나더니, 등줄기 아래서부터 커다란 기운이 솟구치며 주변을 떨리게 했다.
폭주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전장을 뒤흔들자, 바르그조차 그 압도적인 힘 앞에 공격을 멈추며 한 걸음 물러섰다. 곧이어 라그나르의 눈빛이 점점 새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성의 빛이 꺼져버린 자리를 대신한 것은 원초적인 본능뿐이었다. 변해버린 호흡에서 새어 나오는 열기는 온화한 늑대인간이 아닌 자아를 잃은 짐승의 숨결이었다.
내면을 짐승을 가둔 빗장이 부서졌다. 이대로라면 그는 무너질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아로스는 더 이상 막을 힘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르그의 파상공세에 전신이 끊임없이 내몰린 탓에, 한 차례도 숨을 고르지 못한 채 겨우 창날을 막아내는 것으로 목숨줄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라그나르 경의 자아를 붙잡아 보겠습니다!"
시즈의 손끝에서 피어난 이능의 빛이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라그나르에게 날아갔다. 이능의 줄기가 그의 몸을 감싸며 내면에 침투하려는 그 순간, 광기에 휩싸인 라그나르의 눈동자가 시즈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시선이었다.
피잉——
이능이 깨지는 동시에 강렬한 충격파가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시즈는 종잇장처럼 튕겨나가며 땅 위를 구르다 쓰러졌다.
"허윽...! 끄읍......"
숨이 턱 막히는 충격에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명치를 관통한 듯한 통증이 전신을 휘감자 한동안 숨조차 쉬지 못했다.
"장로님을 막아라!! 지금 멈추지 않으면......!!"
자이론의 다급한 외침에 검은 늑대들이 일제히 달려들었지만 라그나르는 달려드는 늑대들을 말 그대로 한 순간에 쓸어버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번개처럼 터지면서 거친 팔짓 하나에 검은 늑대들은 사방으로 날아갔다.
"장로님, 그 힘에 잡아 먹히시면 안 됩니다!"
"라그나르 경, 정신을 붙드셔야 합니다!"
자이론과 검은 늑대들, 그리고 아로스의 절박한 외침에도 라그나르는 이미 폭주의 늪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광기로 붉게 이글거리는 눈빛은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짐승이 격돌했다.
자아를 잃은 짐승 라그나르와 상처투성이의 거대한 늑대 바르그. 둘의 싸움은 피비린내 나는 대격돌이었다.
거대한 송곳니가 허벅지를 찢었고, 발톱이 뼈를 가르며 살점을 뜯어냈다. 그러나 아무도 쓰러지지 않았다. 두 존재는 서로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의로 맞으며 발톱을 더 깊이 박아 넣으며 싸웠다. 맹수의 광기와 신화 속의 포효가 교차하면서 전장은 순식간에 피와 육편으로 물들어갔다.
이 싸움에는 승자가 없었다. 계속된다면 둘 모두 파멸로 향할 게 분명한 그때, 시즈의 외침이 터졌다.
"귀공, 등불을!"
시즈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카야의 유해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아로스는 품 안에 있던 등불을 꺼내 망설임 없이 그녀를 향해 던졌다. 등불이 허공을 가르며 빛을 그리자 시즈는 그것을 낚아채듯 붙잡아 곧장 유해 앞에 섰다. 손끝은 떨렸고, 숨은 끊길 듯 짧았다.
카야의 유해에 등불이 마주 닿자, 희미했던 빛이 거세게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르그의 시선이 번뜩이더니, 그 거대한 고개가 천천히 시즈를 향하면서 이내 포효가 터졌다. 대기를 찢는 울음과 동시에 바르그는 카야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안 돼!"
아로스는 온몸을 던져 바르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거대한 다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바르그는 벌레를 쳐내듯이 그를 단번에 튕겨내 버리며 다시 카야를 향해 달렸다. 시즈는 등불을 쥔 채 떨리는 손으로 여신의 유해를 바라보았다. 눈에는 두려움과 간절함, 상반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바르그의 이빨이 그녀를 향해 덮치려는 찰나, 등불에서 환시의 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아로스와 시즈의 시점
환시의 빛은 라그나르가 뿜어낸 광기와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거칠지도, 희미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오래된 숨결처럼 조용히 전장을 감쌌다. 부드럽게 퍼져나간 빛의 안개는 차갑지만 따스한 결을 품고 있었고, 이내 현실과의 경계를 허물듯 공간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無)의 중심, 침묵의 공간이 열렸다. 깊은 안쪽에서 은은하게 숨 쉬는 온기가 느껴졌다. 산들바람처럼 일렁이는 그것은 생명이 깃든 의지였다. 그 안갯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전쟁의 여신 카야. 날카로운 칼날처럼 단단하면서도 여느 수호신의 손길처럼 따스한 자태. 찬란함과 위엄이 조화를 이룬 그녀는 말없이 시즈와 아로스를 바라보았다.
「......대지의 생명이 닿지 않는 곳에서 길을 찾거라.」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 같았고, 또한 땅처럼 깊었다. 그 말이 전해지자 빛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고, 안개는 조용히 걷혔다.
차가운 현실의 감각이 다시 손끝으로 돌아오면서, 시즈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본 순간, 그곳에는 바르그가 서 있었다. 위협으로 가득했던 검은 눈동자는 하늘빛이 천천히 돌아와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떠날 준비를 마친 존재의 모습처럼 평온해 보였다.
바르그는 천천히 카야의 유해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코끝이 가면의 곡선을 스치자, 마치 약속된 순서처럼 그의 몸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말없이 쓰러진 거대한 늑대의 육체는 서서히 바스러져갔다. 먼지와 흙으로 되돌아가는 형상 속에서 여신의 유해 또한 바람에 흔들리듯 조용히 사라졌다.
그렇게, 두 존재는 함께 안식을 맞이했다.
라그나르의 시점
...따뜻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짐승의 자아에 잠식되어 모든 감각이 광기에 물들어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낯선 빛이 의식을 감쌌다. 희미한 은빛 안개가 발끝에서부터 피어올랐다. 피부에 닿은 감촉은 서늘했지만 차갑지 않았고, 오히려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기운 하나가 안개 사이를 뚫고 다가왔다.
라그나르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고개를 들었다. 일렁이는 빛이 서서히 형태를 이루더니 그 안에서 15년 전 목숨을 잃은 자신의 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빛과 안갯속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영광의 날을 품은 존재.
숨이 막혔다. 가슴이 죄여 들었고,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아아...... 나의 주군이시여......"
라그나르는 무릎을 꿇었다. 깊이 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경의를 표했다. 모든 감정이 그 짧은 호칭 하나에 실려 있었다. 카야는 조용히 다가왔다. 부드러운 손길이 라그나르의 턱을 받치자 비현실 속에 놓인 듯한 차가운 온기가 손끝을 타고 흘렀다.
카야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차갑고도 따뜻한 그녀의 손이 라그나르의 손을 감싸는 순간, 거대한 기억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장면들이 빛의 조각처럼 터져 나와 라그나르의 의식을 휘감았다.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묻듯 외쳤다.
"이것이 대체...... 전부 다 무엇입니까......?"
카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신비한 가면에 가려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라그나르는 느낄 수 있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표정 속에는 미안함과 유감,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슬픔이 서려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또 다른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기억들은 카야와 라그나르가 함께한 시간들이었다. 어린 시절, 심판의 불길의 재앙 속에서 그녀의 품에 안겼던 순간. 전장의 함성과 함께 웃었던 일상의 평화. 지나간 모든 순간들이 조용히 되살아났다.
정신을 차린 라그나르는 자신이 어릴 적 모습으로 돌아가 있음을 느꼈다. 카야는 무릎을 꿇고 앉아 다정한 손길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끝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눈물은 참으려 해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울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쏟아진 감정이 눈가를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그렇게, 카야는 안개의 빛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사라진 빈자리에는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거라. 더는 슬퍼하지 말거라. 그리고... 너 자신을 믿거라.」
라그나르는 그 말에 끝내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마음으로 외쳤다.
'나의 주군, 나의 여신, 나의 천사여...
당신은 언제나 제 마음속 어둠의 등불이었습니다.
심판의 불길 속에서 저를 감싸 안으셨고,
험난한 전장에서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엇을 돌려드렸습니까.
당신의 희생에 끝내 보답하지 못한, 죄 많은 영혼일 뿐입니다......'
현실로 돌아온 라그나르의 손 안에는 피보다 더 짙은 선홍빛 혈석이 놓여 있었다. 늑대의 기다란 얼굴을 타고 흐른 눈물이 혈석 위로 천천히 떨어진 순간, 작은 빛이 그 위에 머물렀다.
라그나르의 울음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잊지 못할 충성심과 깊이 각인된 상실감,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비가를 엮은 음악처럼 밤하늘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