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속의 그림자
타리안 요새 중심의 광장은 무겁고도 엄숙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15년에 걸친 상흔과 균열을 고스란히 간직한 석상은 푸른 달빛을 받아 음울하게 번들거렸다. 주민들은 거대한 석상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기도에 잠겼고, 수천의 숨결이 일제히 멎은 침잠된 광장에는 잔잔한 바람이 그 틈새를 고요하게 스쳐가듯 어루만졌다.
라그나르는 석상의 발치에 홀로 서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낮고 느릿한 기도를 읊조렸다. 뜻을 알 수 없는 고대어의 음절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마치 사라진 신전의 기둥처럼 공중에 하나씩 세워졌다. 그 목소리는 강철로 된 벽들을 타고 메아리치면서 광장 전체를 감쌌으며, 기도는 되돌아와 그를 감싸 안았다. 한 시대를 지켜낸 두 존재를 위한 마지막 예우를 다하는 기도는 마침표가 아닌 이름 없는 전언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휘날리며 석상의 틈새가 반짝였다. 달빛이 흘러든 자리에 라그나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기도를 마친 뒤, 눈을 감은 채 깊은숨을 내쉰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려 요새 내부에서 가장 높은 제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단 위에 선 라그나르는 광장을 둘러보면서 조용히 침묵했다. 그리고 마침내, 중대한 결단을 내린 자의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타리안의 시민 여러분, 그리고 용맹한 전사들이여.
지난 15년간, 우리는 이 거친 땅 위에서 함께 버텨냈습니다. 전신의 가호 아래, 바르그의 인도로 우리는 파도의 악마와 부패의 그림자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우리의 터전이자 긍지였고, 무엇보다 카노르 평원의 마지막 방패였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태고의 전쟁 당시, 카야께서는 거인과 고룡의 군세를 맞서 이곳을 끝끝내 사수하셨고, 그 전장의 심장에 직접 '타리안'이라 이름 붙이셨습니다. 방패를 뜻하는 그 이름은, 평원의 마지막 방벽이자 핍박받던 이들을 품은 신의 마지막 손길이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는 그 뜻을 품고 이 대지를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방패의 역할은 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파도의 악마가 다시 몰려드는 지금, 전신께서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쪽으로 향하라. 이곳을 떠나, 새로운 길을 준비하라.
이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전신께서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권속들을 걱정하셨기에 그 뜻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결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신의 방패에만 기대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이 노병을 믿고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곧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더는 저 같은 노인이 아닌, 젊고 강인한 이들이 타리안의 정신을 이어가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진정한 타리안의 힘이며, 전신의 뜻을 계승할 자들입니다.
전신 카야의 가호가, 이곳의 모든 이들과 함께하길."
연설이 끝나자 광장은 깊은 정적에 잠겼다. 군중들은 가슴 위로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이며 타리안의 방식으로 마지막 경의를 표했고, 석상의 실루엣은 달빛 아래 서서히 희미해졌다. 라그나르는 조용히 머리를 숙인 뒤 제단에서 내려와 광장을 떠났다. 그 뒷모습은 어떤 말보다도 긴 작별이자, 오래된 신화가 형상을 내려놓고 사라지는 순간처럼 보였다.
군중들을 물린 그는 아로스와 시즈만을 따로 불러들였다. 조용한 발소리 끝에 도착한 개인 서고는 어두운 목재 책장과 오래된 양피지들로 가득했다. 창문 틈새로 스며든 달빛은 바닥을 희미하게 적시면서 빽빽한 책장과 서류들 사이로 길게 드리워졌다. 그 빛과 공기 속에는, 마치 세월의 무게가 눌러앉은 듯한 적막이 조용히 깃들어 있었다.
"상처는... 괜찮으신가요?"
시즈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라그나르는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살다 보면... 남는 건 늘 이런 것뿐이지요."
말끝은 담담했지만, 그 짧은 침묵 사이로 오래 묵은 허무와 어딘지 모를 피로가 조용히 스며들었다. 라그나르는 말없이 묵묵히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다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아로스가 시선을 잠시 시즈에게로 향하며 답했다.
"일단 아우로라로 향할 예정입니다. 여신께서 환시를 통해 '대지의 생명이 닿지 않는 곳에서 길을 찾으라'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무녀님께서 지금까지 너무 많은 것을 감당해 오셨기에 잠시라도 심신의 안정을 취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라그나르는 아로스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책상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손톱 끝이 나무 표면을 천천히 두드리는 동안 얼굴에는 잠시 사색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눈빛에는 곧 알 수 없는 의문으로 물들었고, 그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대지의 생명이 닿지 않는 곳이라... 혹시 짐작 가는 곳이 있으십니까?"
"엘나가 사라진 직후, 지고의 존재께서 카노라스의 무저갱으로 기사들을 보내신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죠. 아마 그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라그나르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이자 시즈는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어렸을 적에 아우로라를 떠나던 기사들의 행렬을 본 기억이 있어요. 갑옷은 여명의 빛을 받아 반짝였고, 모두 위풍당당했죠. 그 당시에는 그저 멋지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단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무거운 여정이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시즈의 이야기가 끝난 뒤, 잠시동안 서고에 정적이 찾아왔다. 라그나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면서 방 안은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라그나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는 매우 비밀스럽고, 그 무엇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미 살만큼 살았기에 더는 잃을 것도,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타리안의 젊은 이들, 혈기 넘치는 그들을 이런 어둠 속에 끌어들이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는 우리 셋만 있는 겁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라그나르의 목소리는 낮고도 진중했다.
"두 분이 찾고 계시는 언령, 그리고 그 여정에 얽힌 진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한 존재들의 갈등과 얽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라그나르는 한숨을 삼키듯 말끝을 흐리더니, 곧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15년 전, 제 주군을 쓰러뜨린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분의 혈육... 모르티아였습니다."
서고 안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시즈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전쟁의 여신께서... 모르티아와 자매였다고요?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자매끼리 서로를 죽이려 했던 건가요?"
라그나르는 시즈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득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신다면 더 놀라실 겁니다. 불의 심판 당시, 모르티아를 직접 제압하고 심판대에 올린 이가 바로... 제 주군이셨습니다."
시즈는 말을 잃은 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자매라니. 피를 나눈 혈육끼리 어째서 칼을 겨눴다는 말인가. 그녀의 눈빛이 믿기지 않는 듯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으나 라그나르는 담담하게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모르티아는 불의 심판을 초래한 주범이었습니다. 그녀와 함께한 신들과 사자들이 저지른 일은 이 땅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고, 셀 수 없이 수많은 생명이 스러졌죠. 거인 엘라마에 대한 전설은 한 번쯤은 들어보셨겠지요. 엘나를 지키던 생명의 거인 모두가 쓰러졌던 비극... 모르티아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세 치 혀로 신들과 사자들을 구슬렸고, 끝내 심판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주군께선 결국 친동생을 직접 제압해야 했습니다만, 그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심판의 순간은... 차마 눈 뜨고 보기조차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직접 보셨다는 건가요?"
"그 심판의 현장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모르티아의 절규와 주군의 흔들림... 그럼에도 신들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심판을 선택했습니다."
시즈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어떤 기억을 더듬었다. 전선을 떠나기 전, 아마룬과 나눴던 대화의 한 조각이 머릿속을 번쩍 스쳐 지나갔다.
"시스테나 전선의 거인께서 알려주신 이야기가 있었어요. 경께서는 굉장히 오랜 시간을 살아오셨다고......"
"흠, 그저 지나치게 오래 살아온 노인일 뿐입니다."
그 말에 시즈와 아로스가 뚫어지게 바라보자, 라그나르는 잠시 미소를 머금은 뒤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샜군요.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제가 얼마나 살았는가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의 차분한 태도에 시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라그나르는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두 사람을 바라보며 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모르티아는 세상 밖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서 카노라스의 신들을 이용해 최우선적으로 바트라님을 쓰러뜨리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에 신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전부 신계로 향했다더군요."
"단 한 명의 신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신들이 필요했단 말인가요?"
"그분은 오래전 이 땅에 강림한 신들의 수장이십니다. 그 힘은 여타 신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의 숨을 한순간에 앗아갈 만큼 파괴적인 동시에 절대적이죠. 과거, '불의 심판'으로 불리는 대재앙도 바로 그분의 힘이었습니다."
라그나르의 말이 끝나자, 시즈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아우로라의 서고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불의 심판이라 불리던 그날, 하늘은 붉게 물들고 대지는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도시들은 불길에 휩싸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산과 평야는 타오르는 화마 속에서 생명의 숨결을 잃었다. 짐승들은 화염을 피해 끝없이 달렸고, 새들은 하늘을 잃고 추락했으니,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이 심판은 곧 재앙이었다. 수백 년 동안 검붉은 연기로 뒤덮인 하늘아래의 대지는 회색의 재로 뒤덮여 생명의 기운을 거부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 세계의 끝을 두려워하며 절망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책에서 보았던 삽화들을 떠올렸다. 거대한 불꽃이 도시를 삼키는 장면과 하늘을 가리는 검붉은 연기, 그리고 절망에 빠진 생명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황야를 헤매는 모습. 상상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시즈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과거의 문명이 멸망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라면,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은 그저 바트라의 손끝에 달린 것과 다름없다는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 스며들었다.
"모르티아가 초래한 대혼란 이후, 엘나가 본래의 힘을 잃으면서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지의 균열이 전역으로 번지는 동시에 생명의 흐름조차 끊길 위기에 처했지요. 당시 바트라께서는 엘나가 더는 본래의 축으로서 기능을 잃어 대지를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나릴'이라는 것을 만들어냈죠."
라그나르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로스와 시즈는 점점 더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아나릴은 신들의 정수를 하나로 응축한 매개체인 동시에 망가진 엘나에 새롭게 심은 심장과도 같았지요. 아나릴을 통해 중심을 되찾은 엘나는 생명의 순환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시즈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질문했다.
"그런데... 아나릴이 신들의 힘을 하나로 모은 거라면, 결국 그들의 힘을 억제한다는 말이잖아요? 그 틈을 타 반역이 일어난다거나 권속들이 신을 배반한다면요?"
"좋은 질문입니다."
라그나르는 잠시 시선을 멈춘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엔 짧은 감탄과 수긍이 함께 담겨 있었다.
"아나릴은 지상에서 신들의 권능을 억제한 것이 아닙니다. 엘나와 융합된 그 힘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세상의 일부가 되어 질서를 이루는 흐름으로 작용했지요. 하지만 바트라께서는 예외였습니다. '불의 심판'을 일으킬 만큼 거대한 권능을 가지셨던 그분은 자신의 힘을 결코 지상에서 선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건 타인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 선택한 경계였지요. 다른 신들이 지상에 머무르며 권능을 나누던 동안, 바트라께서는 누구보다 조용히 자신의 힘이 또다시 대지를 무너뜨리지 않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