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과 늑대 (9)

노병의 충고

by 이샤라

"그렇다면... 신들 중에서도 바트라께서 가장 많은 것을 포기하신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르티아가 어떻게 그 구조를 알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미궁입니다."


라그나르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녀의 계획은 신들의 힘을 틀어쥐고, 바트라를 쓰러뜨린 뒤 엘나를 발판 삼아 자신만의 새로운 문명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실패했던 야망을 다시 일으키려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상황은 모르티아의 뜻대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엘나가 사라지는 동시에 아나릴 마저 자취를 감췄고, 그로 인해 신들의 권능이 약해졌습니다. 그 여파로 주군께서 힘을 잃고 쓰러지셨을 테지요. 이유는 알 수 없었습니다만, 격전 끝에 모르티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육체가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그 이후로 그녀의 흔적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즈는 라그나르의 말을 곱씹으며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여신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아신 건가요?"


"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주군께서는 모르티아와의 싸움 도중, 알 수 없는 이유로 균열이 난 그녀의 내면 속 단편을 마주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르티아는 단순한 복수자에 불과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편에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닌, 더 오래되고 음험한 존재가 얽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앞서 거대한 존재의 위협을 말씀드린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대지의 생명이 닿지 않는 곳에서 길을 찾으라 말씀하신 장소... 분명 심연일 것입니다. 이 여정은 두 분이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위험할 겁니다."


라그나르의 말끝이 가라앉자, 서고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쉬운 길이 아니란 것은 순례길에 나섰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시즈가 작게 중얼거렸다. 눈앞의 위협보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이 먼저 떠오른 듯한 말투였다. 라그나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등을 곧게 펴고 말을 이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언령을 찾는 여정이라 들었지만 지금 흐름을 보면... 그 배후에 얽혀있는 것은 훨씬 복잡하고 예측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이 모든 것과 연결된 실마리를 찾아보려 합니다."


"언령이 아닌 다른 정보라면... 어떤 것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이를테면 공허를 신격화하는 이교도들 말입니다. 특히, 지하 깊은 은거지에 모여 산다는 공허의 신도들에게는 뭔가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듣기로는, 그들을 이끄는 '주교'라 불리는 존재도 저만큼이나 오래 살아왔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시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공허의 신도들에 대한 기록은 늘 모호했고, 대부분은 실체 없는 이단의 그림자로만 남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15년 전까지 세상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존재들이었다.


"그 주교라 불리는 자도 수인인가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멸족한 용의 피를 이은 용인이라고도 하고, 인간이라 말하는 자도 있지요. 종족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혼돈의 파편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있다고 합니다. 또, '죽음을 거니는 자'라 불리는 존재도 있지요."


"혼돈의... 파편이라니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혼돈의 파편은 안개의 땅이 최초로 형성될 때 흘러나온 잔재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인격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그저 지나가는 돌이라 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을 흉내 내는 존재가 눈앞에서 웃으며 지나갔다고도 했지요. 형태도, 규칙도 없어 가장 난해한 존재라고들 합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시즈는 점점 더 형체 없는 무언가를 상상하게 되었다. 실체도, 규칙도 없으며, 존재는 하나지만 이야기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파편들. 그것은 공포라기보다는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불쾌감이었다. 그래서일까,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더 깊이 마음속에 남았다.


긴 시간 라그나르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아로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말씀하신 '죽음을 거니는 자'는 대체 무엇입니까?"


"그 존재는 저도 여지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뿐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자세히 본 것은 아니지만... 틈새의 존재들을 제외하고 그 지독한 알루인 늪을 아무렇지 않게 횡단한 이는 아마도 그 사람 단 한 명뿐일 겁니다. 타리안에서는 '오미누스'라고 부르죠."


아로스는 어제 자이론이 말하려다 멈췄던 그 존재가 바로 죽음을 거니는 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 왜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겁니까? 그저 늪을 건넜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불길한 이름이 붙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라그나르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대답했다.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누구도 감히 넘지 못할 부패의 땅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죽음조차 비껴가는 존재로 비쳤을 겁니다. 혹은 어떤 이들이 말하듯, 정말로 죽음을 다루는 힘을 가졌다고 믿는 이들도 있지요. 제가 보았을 당시, 그의 뒤로 나스툴룬들이 줄줄이 따라다녔으니 말이지요."


시즈와 아로스 모두 말없이 그를 쳐다보자, 라그나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무저갱에서 올라온 존재들과 다를 게 뭐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분명 인간이었고, 무엇보다 심연에서 올라온 존재들이 결코 지니지 못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파도의 악마들처럼 몸이 녹아내리는 모습은 아니었지요.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말씀드리자면 벽안을 지녔고,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거대한 부러진 칼날 하나를 지니고 다녔습니다."


"벽안이라면......"


시즈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벽안. 안개의 땅에서 그 푸른 눈을 가진 인간은 흔치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특징은 오직 아우로라 고룡들의 권속에게만 있었다. 시즈는 문득 자신의 외모를 떠올렸다. 푸른 눈동자와 연한 청회색빛 머리칼, 그리고 다른 인간들보다 훨씬 희고 맑은 피부. 그것은 아우로라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외형적 특징이었다. 그렇다면, 오미누스라 불리는 자도... 자신과 같은 뿌리의 그 피의 일부를 잇고 있는 것일까.


"늙은이의 말이 길어졌군요. 어쨌든, 제가 드릴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한층 목소리가 낮아진 라그나르의 말투에는 더욱 진중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북쪽으로 향하는 여정에서는 그 누구도 쉽게 믿으셔서는 안 됩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합니다. 엘라리모스... 그나마 사람들의 온기와 질서가 남아 있던 마지막 땅이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앞으로 나아갈 길에는 그런 곳은 없을 겁니다. 사람들의 정이나 도움을 기대하신다면 실망하게 될 겁니다. 짐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안전하지 않지요."


서고 안의 공기가 다시 한번 조용히 가라앉았다. 라그나르의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닌 앞으로 두 사람이 겪게 될 여정의 냉혹한 실체였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사람들과 맺은 관계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신뢰할 수 없는 이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노골적인 적대나 잔혹한 배척을 감내해야 했던 적은 드물었다. 엘라리모스에서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고 길 위에서 마주한 이들 역시 말 한마디, 손길 하나쯤은 나눌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라그나르의 경고처럼 북쪽으로 향할수록 그런 기대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짐승들... 시즈는 이미 그런 잔혹함을 겪은 적이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 길 위에서는 어떤 호의도, 인간적인 온기도 더는 쉽게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잠깐의 정적 뒤로, 시즈와 아로스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서고의 공기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라그나르의 경고는 가슴속에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말씀하신 충고, 반드시 마음속에 새겨 두겠습니다."


시즈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라그나르는 잠시 시선을 고정한 채 덧붙였다.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특히, 귀공께서는 더욱 그리해야 합니다."


그는 아로스의 표정을 살폈다. 잠깐 말이 없던 라그나르는 속삭이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대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아로스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자이론이 손님방에서 던졌던 말이 스쳐 지나가면서 라그나르의 말과 어렴풋이 겹쳐졌다.


"...그저 호위기사일 뿐입니다."


"흠, 그렇습니까? 제가 괜한 말을 한 모양이군요. 크흠. 아무튼, 반드시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농담처럼 들린 말에 담긴 무게는 가볍지만은 않았다. 라그나르가 의도적인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흘려보내며 시선을 바깥으로 옮기자, 시즈가 그 틈을 타서 화제를 옮겼다.


"경께서는 언제쯤 떠나실 예정이신가요?"


"타리안의 모든 주민들이 무사히 결계 밖으로 나간 뒤에 떠날 예정입니다."


라그나르의 시선이 문 너머로 향했다. 서고 틈 사이로 보이는 타리안의 광장. 그곳을 가르며 불어오는 바람이 조용히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시즈는 그가 바라보는 광장을 함께 바라보며 생각했다. 붕괴된 방벽, 세월과 균열로 마모된 집들, 그리고 더는 돌아오지 않을 수호신들의 흔적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있어서 도시와의 이별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긴 침묵 속의 애도에 가까웠다.


"...이제 정말로, 타리안과 작별을 할 때가 다가오는군요."


"모두가 경을 잊지 못할 것에요."


시즈의 말에 라그나르는 잠시 웃음을 머금었다.


"허허, 그렇습니까? 좋은 기억만 남아준다면야 더 바랄 게 없지요. 아무튼, 오늘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두 분도 얼른 쉬시지요."


"알겠습니다. 오늘 주신 많은 가르침,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시즈와 아로스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고, 라그나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서고를 나섰다.



검은 석재 타일 위로 차가운 달빛이 내려앉았다. 오래된 등잔 불빛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는 복도를 걸으며 두 사람은 말없이 발소리만을 남겼다. 그렇게 복도 중간쯤 이르렀을 때, 문득 시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는... 참 여러 생각이 남네요. 라그나르 경께서는 항상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시니까요."


아로스는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달빛을 바라보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시즈는 곁눈질로 그의 옆모습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걸까요.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라고......"


아로스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창틀을 스치는 손끝의 움직임처럼, 짧은 침묵 뒤로 답했다.


"...경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마 제 역할을 상기시켜 주신 것일 겁니다. 호위기사로서의 본분 말입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시즈의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머물렀다. 표정은 차분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내일은 어떤 계획을 세울 생각이십니까?"


"카노라스로 향하는 지도를 미리 확인해볼까 해요. 북쪽으로 향하는 길은 변수가 많을 테니까요. 특히, 에리스 협곡을 넘어가는 길은......"


시즈가 말을 얼버무리는 동시에, 복도의 공기는 어딘가 차분하면서도 묘하게 무거워졌다. 시즈 스스로도 알지 못한 미묘한 긴장이 목소리에 섞여든 것을 느낀 아로스는 그 어색한 기류를 감지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편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레 대화를 정리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하시죠."


간결하면서도 어딘가 배려가 있던 그의 말 끝으로, 잠시 망설이던 시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귀공께서도 편히 쉬세요."


그 말에 아로스는 작게 웃듯 고개를 숙였다. 시즈와 아로스는 짧은 인사를 끝으로 복도 끝에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객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타리안의 마지막 밤바람이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은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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