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로라의 무녀 (5)

불완전한 날개, 소리 없는 비명

by 이샤라

닷새 전 떠나온 태고의 땅은 여전히 아마룬의 기억 속 깊은 곳에서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에메랄드빛 온기가 품었던 그 태초의 기운은, 어떤 위로의 말보다 생생하게 그들의 지친 영혼을 감싸 안았다. 노아는 가끔씩 눈을 감고 코끝을 스치던 풀 내음과 대지의 박동을 떠올리며 거친 숨을 골랐다.


그들은 다시 카노르 평원을 달리고 있었다. 검게 말라붙은 균열 위로 거인의 발걸음이 철퇴처럼 박동을 울렸고, 그 손에 안긴 노아는 평원 너머로 부는 황량한 바람에 옷자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죽음으로 가득한 평원의 들판 너머로 펼쳐진 수평선은 음산하게 흔들리는 잿빛 대기 속으로 스러져갔다.


하지만 이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들의 폐를 가르던 독기는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고, 발아래 땅속에서조차 미약하나마 숨결이 감지되었다. 잠깐이나마 진짜 생명의 기운을 맛본 두 사람은 이 땅조차도 언젠가는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게 되었으며, 그 믿음은 두 사람을 목적지로 보다 활력 있게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깐."


아마룬이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춘 뒤, 하늘 위에서 움직이는 형상들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노아는 그의 손 위에서 몸을 세우며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저건... 새인가요? 까마귀?"


하늘 높이, 다섯의 검은 익인들이 어설프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짙은 윤곽, 그리고 그 발톱 아래로 길게 늘어진 무언가가 바람을 갈랐다. 그것은 결박당한 채 끌려가는 존재였다.


그 찰나, 아마룬의 숨이 멈칫했다. 기억은 단박에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다."


"네? 뭐라고요?"


"닷새 전 협곡, 그 뿌리로 태고의 땅을 품고 있었던 대지의 현신말이다. 지금 저놈들이 끌고 가고 있다!"


아마룬은 이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는 짧았지만, 그 안에는 분노와 결심이 실려 있었다. 단순한 납치가 아니다. 저것은 사냥당한 짐승의 꼴이 아닌가. 고결한 모습의 생명의 어머니가 어찌 저런 몰골로 하늘에 매달려 있단 말인가.


아마룬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다 바닥에 널브러진 검게 썩은 고목 하나를 단숨에 집어 들었다.


"노아, 불을 지펴라."


"...네? 지금 여기서요?"


"말이 길어질 시간 없다! 지금 당장! 바로 여기서!"


노아는 혼란에 휩싸였지만, 아마룬의 눈빛을 본 순간 주저하지 않고 손끝에서 불꽃을 피워냈다. 바싹 마른 고목 주변의 부패한 나뭇잎과 껍질들이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됐어!"


아마룬은 짧게 외친 뒤, 타오르는 나무기둥을 어깨에 메고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투창처럼 앞으로 힘껏 내던졌다. 어깨와 등 근육이 비명을 지를 듯 팽창했고, 거대한 나무기둥은 대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포효하듯 하늘을 갈랐다.


"내려와라——!"


콰지직———


기둥은 정교하게 그들 중 하나, 중심을 날고 있던 익인을 정확히 강타했다. 나무기둥에 맞은 익인은 순식간에 날개가 꺾이며 순식간에 곤두박질쳤고, 그 발톱 아래 매달려 있던 정령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다...!"


노아의 외침과 동시에, 나머지 네 명의 익인 중 둘이 빠르게 방향을 틀며 그녀를 붙잡기 위해 수직으로 낙하했다. 하늘이 일순 요동쳤고, 그 아래로 아마룬의 몸이 번개처럼 튀어 나갔다.


"붙잡히게 둘 순 없다. 꽉 잡아라!"


"네!"


노아는 아마룬의 품으로 뛰어올라 밧줄을 단단히 붙잡았다. 지면이 거칠게 쓸려나갔고, 공기의 흐름조차 그들을 위해 틀어진 듯 바람은 앞으로만 불어왔다.


"저들은 대체 뭘 하려는 거죠? 어째서 그녀를—"


"나도 모른다! 하지만 저대로 내버려 둘 순 없다!"


아마룬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고, 독기와 부패를 헤치며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그의 시선은 오직 추락하는 대지의 현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여전히 온기 어린 숨을 품고 있을까. 그 힘을 노리는 자들은 단순한 어둠의 손길이 아닌, 오래전부터 태고의 기운을 쫓아온 정체조차 알 수 없는 무언가일까.


전속력으로 달려든 아마룬은 대지의 경계를 짓밟듯 협곡의 바닥을 내달렸다. 발걸음은 한 걸음마다 진동을 일으켰고, 앞을 가로막는 파도의 악마는 거인의 무릎에 치이자마자 일그러진 포말처럼 터져버렸다.


공중에서는 익인 둘이 여전히 날개를 퍼덕이며 그녀를 다시 붙잡으려 애쓰고 있었고, 그중 하나가 급강하하며 발톱 끝으로 가녀린 팔을 움켜쥐었다.


"노아, 어서 불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아는 아마룬의 손 위에서 불꽃을 피워냈다. 빛의 파편처럼 흩날린 불덩이는 곧장 익인의 곁을 스쳐 지나며 타올랐다. 익인은 화염을 피해 몸을 비틀었지만 그 반동으로 발톱을 놓고 말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틀린 자세로 부패한 평원 위에 떨어진 그녀는 바닥을 짚으며 일어나려 애썼다. 그 순간, 측면에서 익인 두 마리가 그림자처럼 내리 꽂혔다. 아마룬의 등 뒤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고, 한 마리는 발톱을 세운 채 그의 어깨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마룬은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 날아들던 익인의 다리를 붙잡은 그는 반 박자도 쉬지 않고 그대로 허공을 휘돌아 다른 익인을 향해 내던졌다.


퍼어어억——


공중에서 충돌음이 터졌고,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날개가 꺾인 익인들은 멀리 나가떨어져 썩은 나무더미 어딘가로 고꾸라졌다. 휘두르던 손에 남은 하나는 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아마룬은 힘으로 틀어막고 절벽으로 던져버렸다. 절벽으로 던져진 익인은 튀어나온 바위에 허리를 직격 당해 척추가 부러지면서 그대로 추락했다.


급강하하며 내려왔던 익인 둘 또한 불길과 압도적인 아마룬의 기세 앞에 더는 다가오지 못했다. 잠시 머뭇대던 끝에, 그들은 이내 방향을 틀어 먼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안도할 틈은 없었다. 노아는 다급하게 아마룬에게 소리쳤다.


"아마룬!"


바위틈 아래서 퍼지는 기묘한 소리가 아마룬의 귀를 찔렀다. 축축하게 끈적이는 울음소리, 숨을 죽인 채 기어오르는 불길한 기척은 파도의 악마들이었다. 익인들을 잡으려는 사이에 검은 틈에서 기어오른 악마들은 먹잇감을 향해 쇄도했고, 움직이지 못하던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발아래 놓였다.


한 놈이 상처로 가득한 팔에 손톱을 내리찍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몸에 얼굴을 들이밀고 살점을 물어뜯었다. 비명은 없었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조용히 갈라지던 입술과 일그러진 눈동자 속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생생히 드러나 있었다. 벌어진 상처와 눈동자 사이로 붉은 피 대신 초록빛 이물질이 흐르듯 흘러내렸고, 그 조용한 고통은 절규보다 잔혹했다.


파도의 악마들이 수액처럼 흐르는 초록빛을 전신에 묻힌 채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찢긴 살결 아래에서 반투명한 빛이 불규칙하게 일렁였고, 금이 간 껍질 같은 피부 아래로는 무언가 끈적이는 광휘가 멍울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중 하나의 얼굴이 정령의 목덜미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뾰족한 이빨 사이로 녹색의 점성이 뚝뚝 흘렀고, 다른 놈은 그녀의 하반신을, 또 다른 하나는 허리를 물고 탐욕스럽게 찢어내고 있었다. 마치 짐승들이 아무런 저항도 없는 시체를 찢듯 혀를 놀리고, 발톱으로 긁고, 내장을 파헤치듯 쑤셔 넣었다. 빛도, 숨결도 점점 흐려져 가는 생명의 형상은 이제 더 이상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아마룬의 초록빛 눈이 격노와 살기로 이글거렸다.


그는 노아를 한 손으로 단단히 끌어안고, 남은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악마 하나가 형체도 남기지 못한 채 터지듯이 튕겨나갔다.


이후는 짧았다. 아마룬이 손을 뻗을 때마다 파도의 악마들은 사방으로 찢겨졌다. 비명도 없었고, 반항도 오래가지 못했다. 기형의 육체들은 수십 조각의 육편이 되어 부서지듯 터져나갔고, 마지막 하나는 발악하다가 무자비하게 바위에 처박혔다.


정적 속에서 남은 것은 무너져 내린 생명의 몸이었다.


아마룬은 허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대지의 현신의 가녀린 몸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더는 저항하지도, 말하지도 못하면서도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노아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려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피를 보는 것도, 살점이 갈라진 것도 익숙했다. 하지만 그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몸이었지 무참히 유린당한 존엄 그 자체는 아니었다. 구할 수도, 말도 건넬 수도 없이 무너진 존재 앞에서 그는 의사로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아마룬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눈물도 없었다. 그 시선에는 조용한 위로가 담겨 있었다. 자신이 감내한 고통을 아마룬까지 함께 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듯 더는 슬퍼말라고 조용히 다독이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 아주 작고도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잠시 후, 그녀의 몸은 점차 회색빛으로 변했다. 손끝에서부터 피부가 가늘게 부서지기 시작했고, 금이 간 듯이 갈라진 조각들이 마침내 바람을 타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룬의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부스러져 내려가던 생명의 형상은 마지막 순간 바람결에 실려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마룬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 두 손을 바라보았다. 텅 빈 손바닥 위에서 바람만이 흔들렸다. 이윽고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손을 내리며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땅을 짓밟듯 걸음을 옮긴 그는 썩은 나무 더미 속에 처박힌 익인을 향해 다가갔다. 한쪽 날개는 접힌 채 축 늘어져 있었고, 두 눈은 충혈된 채 깜빡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룬이 익인을 들어 올리자 그의 날갯죽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저 부상당한 줄로만 여겼다. 그러나 깃털 사이로 엷게 드러난 이음매들이, 그 생각을 비틀어 놓았다. 깃털 밑면 깊숙이 숨겨져 있던 금속편들과 조잡한 관절 구조, 얇은 철선들이 뼈대를 따라 덧대져 있었다. 살갗과 깃 사이를 억지로 꿰맨 듯한 부실하고 조잡한 봉합 자국은 이 날개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흉물. 이 날개는 비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어설프게 날고 있었던 이유가 그제야 명확해졌다. 하늘을 날던 익인들의 모습은 비행이 아니라, 날갯짓을 흉내 낸 비틀거림이었다. 필시 누군가의 뒤틀린 오만함이 빚어낸... 날 수 없는 육신을 강제로 띄우기 위한 욕망의 결과물일 터.


익인의 날개가 축 처지는 동시에, 망토 자락이 뒤집히며 그의 한쪽 어깨에서 무언가가 드러났다. 불에 그을린 듯한 먹빛 천 위에는 정사각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네모 안에는 날 선 송곳니와 짐승의 발톱이 교차하듯 그려져 있었으며, 거칠고 투박한 선들이 마치 피로 그려진 낯선 상흔처럼 눈에 걸렸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아마룬은 그 시선을 뒤로한 채 거침없이 익인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네놈들은 대체 누구냐."


목소리는 땅을 가를 만큼 낮고 깊었고, 멱살을 쥔 손아귀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반쯤 뒤집힌 눈으로 아마룬을 올려다보던 익인이 가까스로 입을 열자, 목이 칼칼하게 긁히는 소리와 함께 알아듣기 힘든 말이 힘겹게 흘러나왔다.


"...네놈들의 신은...... 이제... 끝......"


그 말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내뱉은 말... 그것은 마치 오래된 예언처럼, 확신에 찬 파멸의 선고인가.


익인의 말끝은 점점 희미해졌고, 그의 머리는 천천히 뒤로 꺾이더니 그대로 늘어졌다. 깃털처럼 흔들리던 숨결이 멎는 순간, 아마룬은 더 이상 그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무언가를 더 캐물을 여지도 없었기에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익인의 몸은 축 늘어진 천조각처럼 바닥에 떨어졌고, 주변의 썩은 가지들이 그것을 삼키듯 다시 덮는 모습을 본 아마룬은 한동안 말없이 응시하다가 등을 돌렸다.


"가자."


노아는 아마룬의 품 안에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키는 대신, 그의 손을 조용히 더 깊이 붙잡았다.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이미 지켜내야 했던 것은 사라졌고, 확인할 말조차 남지 않았다.


바람이 다시 불었지만, 허공에는 이미 태고의 생명의 잔재마저 사라진 후였다. 아마룬은 발을 들어 평원을 향해 걸었다. 아무 말 없이, 발걸음만이 균형을 맞추며 이어졌다. 그저 앞을 향한 거인의 그림자만이 길게 늘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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